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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위에 모은 보석들을 한곳에 펼쳐 두었다. 질이 좋은 보석은 아니었지만 나름 뿌듯한 내 성과였다. 그동안 내 신성력을 나눠 주면서 보답을 받았다. 작은 보석들이긴 하지만…….
이안에게 절대 들키지 않기 위해 시중, 기사들에게 당부, 또 당부했다. 폴과 월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카사가 없다는 게 다행이었지. 카사는 빠짐없이 내 일과를 주인한테 말해서 곤란하단 말이지.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난 재빨리 이불로 보석들을 덮었고 곧 이안이 들어왔다.
“슈이렌 님, 전하께서 밖에서 식사하시자고 합니다.”
“밖?”
“네.”
“알겠어.”
밖에서 식사라……. 밖에 나간 김에 하는 건가? 난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행이 마음에 들기는 했나 보네. 예전의 그였다면 먼저 권하지 않을 만남이었다. 난 이안에게 얼른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우선 이 보석들부터 안 보이게 해야지. 이안이 나가자 난 바로 주머니에 보석들을 쓸어 담았다. 주머니 끈을 풀리지 않게 꽁꽁 묶은 다음 침대를 밟고 일어서서 등 위쪽에 주머니를 숨겼다. 혹시 주머니를 발견하면 안 되니까.
사람은 제 눈높이에 맞는 곳을 찾는다고 하니까 높은 곳에 숨겨 놓으면 아무도 못 찾겠지? 주머니를 안 보이게 숨긴 후 먼지 묻은 손을 탈탈 털었다.
“좋았어. 완벽해.”
뿌듯하게 내 결과물을 바라보고 이제 제르펠을 보러 가야 했다. 나는 내 옷차림을 확인했다. 어차피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는 몸. 이안이 준비해 주는 옷으로 대충 입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입었던 옷이지만 데이트를 하기에는 옷이 매우 후줄근해 보였다.
전생에서 따진다면 집에서 입는 트레이닝 복과 같았다. 그가 권한 데이트에 트레이닝 복을 입고 가는 건은 예의가 아니지. 난 벌떡 일어났다. 문을 확 열자 이안이 서 있었다.
“나 먼저 옷 좀 입고.”
이안을 피해서 드레스 룸의 방을 열었다. 단정한 옷부터 화려한 옷까지 다양한 옷들이 쫙 전시되어 있었다. 가지각색의 옷이 나를 입어 달라는 듯이 제 빛을 발했다. 솔직히 말하면 여기에서 입은 옷은 한 손에 꼽았다. 특히 화려한 옷들은 입지도 못했다. 집구석에 박혀 있는데 패션쇼 할 거도 아니고…… 갈 곳이 제약되어 있었기에 항상 단조로운 옷을 입었다.
먼지만 쌓여 가는 걸 보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주인을 잘못 만나 바깥 공기도 쐬지 못한 옷이었다.
“근데 일상에서 입기에는 좀…… 부담스럽지. 그니까 이럴 때 입어야지. 좋았어. 오랜만에 차려입어 볼까?”
지금 이 모습은 스타일링 하기에는 제법 괜찮은 비주얼이었다. 뒤에서 이안이 도와주려 했지만 거절하고 스스로 옷을 뒤적거렸다. 내가 보지 못한 옷들도 많았기에 일일이 내 몸에 옷을 대보고 겨울을 봤다. 괜히 옷의 스타일이 다양하니까 더욱 고민이 됐다.
“이것도 괜찮을 것도 같은데…… 이것도…… 나름 어울리는데…….”
집어 던지는 옷이 점점 쌓여 갔지만 딱 이거다! 하는 옷이 없었다. 귀찮은데 대충 입어? 아니 그래도…… 머리를 벅벅 긁적이면서 고민하고 있을 때 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이안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주춤했다. 아직도 있었어? 안 갔던 거야? 한껏 기대하고 오두방정을 떨며 옷을 고르고 있던 나를 지켜본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귀가 달아오른 것이 느껴졌다.
“전하께서 도착했습니다.”
“벌써?”
해가 이제 지고 있었다. 물론 저녁 식사 때를 맞춘 시간이지만 평소 그가 돌아오는 시간에 비하면 이른 시간이었다. 결국 무더기로 쌓인 옷 중에서 그나마 마음에 든 걸 집었다.
‘주인은 나한테 흰색이 잘 어울린다고 했으니까…….’
급한 마음에 계단을 성큼 뛰어넘고 후다닥 달려가니 제르펠이 보였다.
“빨리 왔네?”
숨을 헐떡이며 내가 말했다.
“천천히 와도 괜찮았다.”
그는 숨을 거칠게 쉬는 내 등을 쓸어주었다.
“기다리는 걸 뻔히 아는데 늦장을 부릴 수는 없지.”
제르펠의 입가에 상냥한 미소가 번졌다. 난 괜히 큼큼 헛기침하며 허리에 손을 짚었다. 어때? 말로 하지 않고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그를 곁눈질했다. 하지만 그의 입은 열리지 않았고 오히려 멀뚱멀뚱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살짝 기가 죽었다. 그는 별안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난 괜히 옷깃을 만지작거렸다. 안 어울리나?
흰색이라 그다지 이미지 변화가 없는 건 맞긴 한데…… 그래도 자수라든가 핏이 좀 다른데…… 나름 신경을 썼는데 괜찮다. 라는 작은 한마디라도 듣고 싶은 게 사람의 심정이었다. 칭찬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오늘은 왜 그래? 난 실망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어디서 먹을 건데?”
“좋은 곳을 예약해 두었다.”
“그래?”
툴툴거리는 말투로 말했지만 그의 시선은 나에게 향해 있지 않았다. 그는 마부와 대화를 나눴다. 갈 장소에 관해 설명하는 듯했다. 살포시 한숨이 나왔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기대할 만하다는 그의 말에 이번에도 데이트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거나 자료를 보며 물색했을 그가 생각나 포르르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열려 있는 마차로 가려던 순간 그가 읊조렸다.
“잘 어울리는군.”
“응? 뭐라고?”
“잘 어울린다고 했다. 날 위해 입은 옷인가?”
늦은 리듬으로 훅 치고 들어오자 부끄러움이 배가 됐다. 귓가에 살짝 속삭인 말은 내 볼을 붉히기는 충분했다. 왜 늦게 말하느냐고 구시렁거렸다. 아까 말했으면 그냥 뿌듯해하고 말았을 텐데…… 일부러 그런 거 아냐?
눈꼬리를 곱게 접어 웃고 있는 그가 능글맞게 보였다. 얼굴을 붉혔다는 것을 알리기 싫어 마차에 빨리 타려고 했다. 하지만 마차 한 면에 새겨져 있는 용 그림을 보고 멈칫했다.
“근데…… 이 마차 타고 갈 거야?”
“문제라도 있느냐? 아니면 원하는 마차가 있나?”
떡하니 황가의 문장이 있어 주춤했지만 열린 문으로 보이는 쿠션이 푹신해 보였기에 군말 없이 올라탔다. 어차피 저번처럼 모습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 마차는 유유히 출발했고 궁을 빠져나갔다. 중심가에 진입하자 소란이 일었다. 역시나…… 천천히 움직이는 마차 주위로 많은 사람이 호기심 어린 눈길로 보았다.
“내리지.”
도착했는지 제르펠은 거침없이 마차 문을 열었다. 그는 먼저 내려서 나에게 손을 내밀었고 난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거대한 건물이 눈앞에 보였다. 몇 층으로 된 건물은 금장식으로 화려하게 모델링이 된 레스토랑이었다.
레스토랑이 아닌 저택으로 보일 정도였다. 스테인드글라스 조명이 아름답게 비추었고, 그 아름다운 빛에 매료가 되었다. 유명한 장소인지 유리로 된 벽면으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식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주로 귀족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곳 같았다. 안에서 고상하게 식사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딱 봐도 나 비싸요. 하는 가게였다. 멈춰 선 마차를 보고 다가오면 종업원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헉!”
종업원이 제르펠이 타고 온 마차와 나를 보더니 안내는 해 주지 않고 재빨리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그를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이미 사라진 뒤였다.
“저 사람 어디 가?”
“기다리지.”
어리둥절하게 물었지만 제르펠의 태연한 말이 돌아왔다. 솔직히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제르펠의 말이 끝나자 지점장으로 보이는 인물이 나왔다.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와는 다르게 몸가짐은 물이 흐르듯이 태연했다.
“전하. 저희 레스토랑을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약하신 대로 풀코스로 준비했습니다. 안내하겠습니다.”
친히 레스토랑 문까지 열어 주면서 길을 비켜 주었다. 황태자가 찾아왔으니 지점장이 직접 나왔나 보네…….
밖에서 봤을 때는 화려해서 눈이 부셨는데 가게 안에는 은은한 불빛들이 가득했다. 분위기를 잡기에는 딱 좋았다. 그래서 커플들이 대부분이었다. 레스토랑 안에서는 남녀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난 감탄사를 내며 고개를 두리번거리는 중 정확히 나와 눈을 마주친 영애는 깜짝 놀라 포크를 떨어뜨렸다. 귀족이라면 하지 않을 실수였다. 쇠가 바닥과 부딪치는 소리가 났고 눈살을 찌푸리며 그 영애를 쏘아볼 귀족들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조용했던 가게가 소란으로 들썩였다. 어색한 웃음을 지은 지점장은 우리를 위쪽으로 안내했다.
“전하. 이쪽이십니다.”
우리는 1층이 아닌 좀 더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1층에는 많은 테이블과 사람이 있었지만 2층에는 1층보다 테이블의 수가 적었고 3층까지 가자 한적한 테라스에만 테이블이 존재했다. 테이블 간의 거리도 멀어 대화에 방해되지 않을 수준이었다. 가게 안에서는 잔잔한 음악 소리가 들렸다.
우리를 안내해 준 곳은 바깥 풍경이 잘 보이는 테라스 자리였다. 자리에 앉아 창문 밖을 바라보니 사람들 거리를 다니는 모습이 잘 보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제르펠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딱 일몰이 지는 타이밍으로 노을과 밤의 경계선으로 붉은 일몰과 어두운 하늘이 그러데이션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탁자 한편에 자리 잡은 꽃병에 담겨 있는 꽃을 톡 건드렸다. 탐스러울 정도로 싱그러운 꽃이었다. 그리고 자주 보던 꽃이기도 했다.
“……좋네.”
이 말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그는 바람이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나중에 밤이 찾아온다면 어떤 야경을 보여 줄지 기대가 됐다. 일몰이 다 지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다 구경했나?”
“어…… 밖에서 먹는 것도 나쁘지는 않네…… 근데 웬일이야?”
기사에서도 대놓고 연인 사이라고 표명했으니 이제는 대놓고 연애하려고 하나? 지금도 수군거리는 소리 때문에 귀가 따가웠다.
“음…… 저번 너의 모습을 보고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너의 웃음도 볼 수 있었고.”
“난 항상 웃는데?”
누가 들으면 내가 웃음이 없는 사람인 줄 알겠다. 난 따진다면 웃음이 많았다. 특히 그와 같이 있을 때. 고개가 절로 갸우뚱했다.
“물론 그렇지만…… 넌 정말 기쁠 때 입술이 살짝 벌어지면서 웃는다. 지금처럼.”
그 말에 헙 입을 닫았다. ……뭐, 다르다고 하니까. 턱을 괴고 다정하게 보는 눈빛에 시선을 슬쩍 피했다. 나도 모르는 습관을…… 제르펠이 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가 손을 뻗더니 내 입꼬리를 따라 그렸다.
“음식이 나왔습니다.”
종업원이 옆에서 트레이를 끌고 왔고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식탁에 차려졌다.
풀코스답게 처음에는 애피타이저가 나왔다. 먹는 도중 종업원이 코르크와 와인을 가져다주었다. 깜짝 놀라서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술이란…… 나에게 원수 그 자체였다. 아직도 저번의 추태를 생각하면 자괴감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태연하게 와인을 건네받은 그가 뚜껑을 따고 잔에 따라 주었다. 놀란 마음에 말까지 더듬댔다.
“수, 술은 왜? 저번에…… 안 된다고…….”
“나와 같이 마시는 술은 괜찮다.”
아련하게 떠오르는 기억을 더듬었다. 술에 취해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마셔 보렴. 연회에서 준비한 와인과 다를 것이다.”
떨리는 눈으로 와인을 바라봤다. 나비가 꽃을 탐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 것처럼 술이라면 끔뻑 죽었던 나에게 참기 힘든 유혹이었다. 영롱한 붉은빛을 내는 와인의 유혹을 참기 힘들었다. 제르펠은 유연한 손놀림으로 와인 잔에 술을 따랐다. 내 와인 잔에 쪼르르 와인이 따라졌다. 내가 입에 살짝 와인을 머금기 전에 제르펠이 당부했다.
“물론 과음은 금물이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 한 모금 마셨다.
“주인이 골라서 그런지 맛있다!”
이 정도 아부는 또 해 줘야지. 그리고 연신 와인을 마셨다. 제르펠 한 모금 마시더니 잔을 내려놓았다.
“맛있나?”
난 고개를 격하게 끄떡였다. 제르펠은 내가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 식으로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입꼬리가 올라갔다. 문득, 여기도 비싸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번에 받은 선물도 침대 턱에 장식해 놓고 가끔 흔들곤 한다. 그 답례도 못 했는데…….
“왜 그러지?”
갑자기 내가 깨작거리자 문제라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물었다. 그에 난 열심히 도리질을 쳤다. 입은 즐거웠지만 머릿속은 혼잡하게 뒤엉켰다. 선물아…… 선물…….
난 어색하게 그를 향해서 미소 지었다. 살짝 그의 눈썹이 불만스럽게 꿈틀거렸지만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선물에 대한 생각은 저 멀리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