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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었고, 안에서는 기분 좋은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이번 여행 진~짜 재미있었다. 그렇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제르펠의 얼굴에서 점차 미소가 번졌다. 오늘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교황의 얼굴을 본 건 짜증 났지만, 첫 여행은 만족스러웠다. 콧노래를 부르며 창문 밖을 보고 있을 때 제르펠이 나에게 상자를 하나 내밀었다. 갑자기 내민 상자에 당황해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뭐야?”
“열어 보렴.”
받은 상자를 열어 보니 안에는 구슬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내가 그를 힐끔 보자 제르펠은 긴장되는지 경직된 표정이었다. 난 상자 안으로 손을 넣어 꺼내 보았다. 내가 잘 아는 물건이었다. 스노볼? 유리구슬 안에는 어제 보았던 꽃들이 반짝이며 흩날리고 있었다. 뒤집고 다시 세우니 밑에 가라앉은 꽃들도 같이 흩날렸다. 이세계에도 스노볼이 있다니, 예쁜 풍경을 보고 싶을 때 보고 싶다는 사람들의 생각은 다 비슷하네…….
“잠깐 나가서 사 왔다.”
여관에서 일어났을 때 혼자서 밖에 나갔다고 했을 때 의심했더니 선물을 사러 갔어? 진짜가 아닌 가짜 꽃잎이었지만 어제 풍경을 생각나게 하기는 충분했다.
“고마워, 간직할게.”
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마음 한쪽이 쿡쿡 쑤셨다. 계속 그에게 선물만 받고 정작 내가 해 준 선물은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선물을 하나 줄까?’
당장은 생각나는 게 없지만 왠지 나도 그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 그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받아 버렸다. 처음에는 당연하게 받았지만 나도 내 선물을 받고 기뻐할 그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나와 같은 감동을 전해 주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솔직히 내가 그에게 준 선물다운 선물은 브로치뿐이었고, 아니면 시중 인에게 받은 먹거리가 전부였다. 그것도 남에게 받은…….
갑자기 저 기억 한쪽에 처박혀 있었던 공물 주머니가 떠올랐다. 한때는 공물을 받은 몸. 그걸 처분하면 어느 정도 돈이 생기지 않을까?
그는 내 화답에 만족한 듯 미소를 머금고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를 빤히 바라보자 시선이 느껴졌는지 눈이 마주쳤고 난 어설프게 생긋 웃었다. 선물은 몰래 주어야 배로 감동하지.
‘좋았어. 좋은 선물을 줘야지.’
난 머릿속으로 그에게 줄 선물 목록을 쭉 나열했다. 실용성이 있고, 그가 좋아할 물건이라……. 그의 행동으로 봐서는 내가 어떤 물건만 줘도 좋아할 것 같지만 기왕이면 완벽한 선물을 주고 싶었다. 머릿속은 어지럽게 돌아가는 와중에 다음에 또 가자는 기약을 했다.
“전하! 왜 이리 늦으셨습니까!”
궁에 도착하자마자 이안이 격하게 제르펠을 반겼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절실하게 보여 주었다. 제르펠은 칠색 팔색을 하며 떨쳐 내려 했지만 이안은 그에게 매달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핼쑥한 그의 안색에서 그동안의 노고가 보였다. 나 때문에 예상보다 일정이 많이 늦어졌기 때문에 더 힘들었을 것이다.
연회니, 교황의 일로 더 바쁘던 제르펠이었는데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도 쉴 틈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서 쉬는 반면 제르펠은 쉴 틈이 없으니 그가 안쓰러웠다. 여행을 다녀와서 더 그런가……. 제르펠의 확인이 필요한 서류가 쌓여 있었다.
베르트 공작이 오면 연회를 가고, 카밀라와 카사가 같이 제르펠을 만나러 왔다. 카사는 따로 조사한다더니 카밀라와 같이 행동하는 듯했다. 제르펠이 카밀라랑 만난다는 점이 괜히 걸렸지만 그를 믿기에 넘어갔다. 거기에 제르펠은 나를 홀로 두는 것에 미안해했고 틈틈이 선물도 사 주었다.
내가 괜찮다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그가 주는 선물은 쌓여 가고 나는 아직 그에게 줄 선물도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주인한테 뭘 사 주지……? 옷? 보석? 아니면 먹을거리……? 좀 특별한 걸 주고 싶긴 한데…….”
순간 내 조각상이 떠올랐지만 머리를 도리질하며 생각을 지웠다.
“에이든에게 갈까……?”
그를 못 본 지 오래됐고, 여행을 간다는 내 말에 흥분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난 여행을 다녀온 소감을 에이든에게 말해 주기 위해 호수에 찾아갔다. 에이든이 있을지는 긴가민가했지만 우선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호수에서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내가 가자 키르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에이든도 나를 보자 손을 방방 흔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에이든의 얼굴은 밝아 보였다. 그동안 키르와 친해졌는지 같이 붙어 있었다.
난 손을 번쩍 들었다가 점점 내려왔다. 자세히 보니 에이든의 머리 위에 키르가 있었다. 혼자서 기어 오거나 다른 시종에게 안겨 와야지. 아픈 아이 머리 위에 올라가고 싶냐? 에이든이 팔로 키르의 몸통을 부여잡고 있었다.
에이든의 뒤에는 껌딱지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시종, 시녀, 기사들까지…… 나처럼 딱 몇 명만 데리고 다니면 되지. 에이든의 의지가 아닌, 황후의 의지인 것 같지만…….
에이든의 달라진 점은 언제부터인지 나를 만나러 올 때 홀로 몰래 나오던 그가 시녀와 시종을 데리고 왔다.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
그들의 시선이 신경 쓰여 말을 자연스럽게 조심했다.
난 에이든이 오자마자 키르를 내가 안았다. 그런데 에이든은 오히려 아쉽다는 듯이 두 손을 뻗었다. 내가 뺏어 가는 것도 아니고……. 의외의 반응에 놀라 물었다.
“무겁지 않았어?”
“아, 아니에요. 제가 좋아서 하는걸요.”
[그렇다 하지 않느냐.]
키르는 긴 몸을 쭉 빼서 다시 에이든의 어깨로 이동해 갔다. 나도 키르를 들고 있기에는 무거웠는데……. 난 키르를 뚫어져라 보았다. 그의 몸이 반질반질한 것이 아주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속을 썩이면 말해.”
“네! 그보다 여행은 어땠어요? 전 궁 밖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형이 병도 물리치고 비도 내렸다고 들었어요. 수도에도 비가 한동안 내렸거든요.”
에이든은 두 볼을 붉히며 상기된 얼굴 나를 보았다. 난 입꼬리가 간질간질해지며 우쭐댔다. 에이든이 나를 추켜세우니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내 지식을 활용했지. 내가 아는 병이랑 비슷하더라고. 그래서 쉬웠어. 근데 하필 물이 오염 근원이라 물이 부족해졌거든. 그래서 내가 힘을 좀 썼지. 덕분에 한동안 뱀의 신세였지만…….”
에이든은 내 말을 듣더니 물개 박수를 쳤다.
“대단해요!”
[수신님이 내린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군.]
뿌듯해진 나는 코를 쓱 닦았다.
“아, 맞다.”
“왜 그러세요?”
“여행 갔다고 했잖아……. 주인이 선물을 줬는데 보여 줄게.”
에이든은 나갈 수 없는 몸이기에 그 풍경을 조금이라도 보여 주고 싶었다. 마침 제르펠의 선물이 그 풍경을 간접적이라도 볼 수 있는 물건이었다. 주머니에서 꺼낸 스노볼을 에이든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응? 주인이 준 선물. 한번 구경해 봐. 이걸 이렇게 뒤집으면…….”
스노볼을 뒤집고 원상 복귀시키자 바닥에 가라앉았던 꽃잎들이 안에서 나풀거리면서 내려앉았다. 이걸 보고 있으면 그 장소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예쁘지?”
“……저도 한번 가 보고 싶어요.”
“……분명 갈 수 있을 거야. 언제 한번 같이 가자.”
난 에이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키르를 향해서 이리 오라고 턱짓을 했다. 그러자 키르가 슬금슬금 기어 왔다. 에이든에게 키르와 말이 통한다는 사실을 들켜도 에이든의 약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난 에이든의 뒤를 보았다.
설마 에이든이 시중 인들에게 말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들에게 들키는 건 꺼림칙했다. 황후의 눈과 귀가 되는 시녀가 있다면 큰일이다.
“요즘 어때? 약은? 너…… 잘하는 거 맞지?”
[당연하지. 나를 뭐로 보는 것이냐? 인간 아이를 돌보는 게 이리 힘들 줄은 몰랐다. 어깨가 다 뻐근하군…….]
“너 어깨가 없잖아.”
[인간들은 피곤할 때 이리 말하더군.]
“……그래…… 잘 지내고 있어서 다행이다. 팔자 좋던데? 몸도 반질반질하고 안 본 사이 몸도 커진 것 같고……. 잘 먹고 잘 살고 있네.”
[저 아이가 워낙에 나를 좋아해야지. 너처럼 맛없는 먹이를 주지도 않는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 스테이크가 뭐 어때서? 맛있기만 한데…….
“그건 둘째 치고 약은 어떻게 됐어?”
[넌 나의 고생을 알아야 한다. 그 여자의 눈치를 보면서 약을 엎는 일이 얼마나 고된지 아느냐? 심지어 그 여자가 내 밥까지…… 다행히 저 아이가 몰래 챙겨 주었다지만…….]
키르는 목소리를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밥을 주지 않는 것은 상도덕이 아니지! 나도 키르의 말에 동감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많이 고생했네……. 난 그의 등을 두드려줬다.
“주인이?”
[그놈 말고 누가 있느냐? 그러니 약의 섭취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방법을 아직 강구하지 못했다는 게 문제지.]
그와 고민하던 중 뇌리에 스치는 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잠깐만. 신이라면 보물 같은 거 있지 않아? 예를 들어 신물? 오히려 왜 이제야 생각났는지 의문이었다.
“키르.”
의아함을 담고 있는 질문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신이라면 성물 같은 거 없어?”
[성물?]
“아니. 뭐, 전설 속에서 신이 내려 주신 보물이든가. 음…… 힘은 신성력이라고 치고 보물 같은 건 없어?”
[보물이라…… 난 들어 본 적이 없다만? 전설이라면 인간들이 더 잘 알겠지. 알다시피 우리는 숲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이 힘이 우리에게는 보물이다. 수신님이 내려 주신 선물이지.]
“그렇구나. 그리고 함부로 인간으로 변하지 마.”
키르에게 인간으로 변했을 때의 일을 상기시켜 주었다. 키르는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라. 감시의 눈이 심해서 변할 생각도 없다.]
“다행이네.”
[넌 별일 없느냐?]
“음……. 키르, 혹시나 해서 묻는데 내 힘을 흡수할 수 있어?”
[그게 무슨 소리지?]
키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비를 내렸을 때 교회에 내 힘을 흡수당했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네가 느끼기로는 그 종이 너의 힘을 흡수했다…… 이 말이냐?]
“그래.”
[그럴 리가……. 우선 알겠다. 내가 한번 알아보지.]
키르와 이야기를 끝낸 난 에이든의 곁으로 갔다. 에이든은 손 위에 있는 스노볼을 뒤집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하염없이 꽃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내가 다가오자 고개를 들더니 싱긋 웃으며 나에게 선물을 다시 주었다.
“형님은 정말 형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어…… 그렇지?”
갑작스러운 말에 얼떨떨하게 답했다. 에이든은 읏차, 소리 내더니 키르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난 에이든의 키에 맞춰 허리를 숙였고 에이든은 내 귀에 작게 속삭였다.
“저는 응원해요. 둘이 정말 잘 어울리는걸요.”
소문으로 당연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얘한테 응원을 받다니……. 에이든은 순수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손을 흔들며 저 멀리 사라졌다. 부끄러운 마음도 있었지만 그의 가족에게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내 편이 있는 게 어디야.
괜스레 제르펠이 준 선물을 만지작거렸다.
“선물…… 나도 줘야 하는데…….”
나도 빨리 선물을 줘야 할 것 같지만 마땅한 방법과 선물이 생각나지 않았다. 난 발을 동동거렸다. 빨리 가서 공물 주머니나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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