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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생-72화 (7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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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했지?”

마지막까지 그는 일정표를 손에 놓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나에게 절대 보여 주지 않았다. 내가 슬쩍 고개를 내밀기라도 하면 턱 덮어 버렸다. 대체 얼마나 좋은 데를 데려가려고 하는 거야? 내 말에 한차례 늦게 답했다.

“누구누구 가냐고. 인원은 최대한 줄여서 갈 거라며?”

“호위 몇 명과 수발들 시녀와 시중 몇 명이면 충분하겠지.”

“그럼 호위는 카사는 바쁘니까…… 내 호위는 폴, 월이면 충분한데 세드릭은 단장 아니야? 같이 갈 수 있어? 주인을 지켜 줄 사람이 필요하잖아. 교황이 좋은 심보로 부른 것 같지도 않고.”

항상 내 뒤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던 카사가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졌다. 딸랑 쪽지 하나 남기고, 제르펠의 명을 수행하고 온다는 쪽지였다. 제르펠에게 물어보니 일손이 부족하여 다른 의무를 맡겼다고 한다. 나야 다른 호위가 있어서 괜찮았지만 그의 유일한 호위 기사는 세드릭이다. 그리고 그는 단장이었다. 단장이 자리를 비우면 아무래도 위험하지 않나?

“누가 나를 해친다는 말이냐?”

제 안전에는 확고한 믿음이 있는 말이었다. 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거 안전 불감증이야!

“그걸 누가 알아! 위험할 수도 있지! 주인도 나를 지켜 주니까…… 나도 주인을 지켜 줄게.”

제르펠은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내 말에 믿음이 안 간다는 뜻인가? 미간이 좁아질 때쯤 그가 내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그는 귀엽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지켜 준다는 말에는 감동했지만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뽀로통한 표정으로 봤지만 말이라도 기쁘다는 답변을 받았다.

“고맙구나.”

내 실력을 뭐로 보고? 일취월장한 내 실력을 보지 못해서 그렇지! 뭐, 내가 제르펠에게는 귀여움을 떤다고 물놀이 수준으로 보여 주기는 했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세드릭도 같이 간다.”

“다행이네.”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난 그날 밤 소풍 가는 어린 애도 아니고 들뜬 기분에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 눈이 떠진 것도 이제 막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을 때였다. 내 평상시 기상 시간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어나도 눈만 깜빡이며 침대에 널브러져 있던 지난날과 다르게 부산하게 움직였다.

“주인아! 빨리 가자!”

“그래, 우선 준비부터 하자.”

준비를 끝내고 나와 보니 시종이 짐을 마차에 싣고 있었다. 짐을 싣고 있던 시종에게서 하품 소리가 들렸다. 예정 시간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내 재촉으로 더 일찍 일어난 듯했다. 너무 들떴나? 난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궁을 떠나는 인원은 그가 언급한 대로 나랑 제르펠 호위 기사랑 시중을 들 시중인 몇 명 정도였다. 마중 나온 이안은 걱정을 떨쳐 낼 수가 없는지 엄마처럼 잔소리를 퍼부었다. 신이 나서 발을 동동거리는 나를 콕 집어서.

“궁을 떠난다고 신나서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세요. 특히, 슈이렌 님 전하와 떨어지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요.”

이안은 장난스러운 내 말에 믿음이 가지 않는지 다시 한번 입을 열려고 했지만 제르펠의 말에 물러갔다.

“이안 그만 잔소리하도록 늦겠다.”

“전하께서도 부디 일의 순서를 잊지 마세요.”

“알겠다.”

이안은 우리가 사라질 동안 하염없이 서 있었다. 난 마차 창문으로 손만 내밀어서 흔들었다.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날씨나 행선지의 문제가 아닌 오로지 나의 문제였다. 제르펠은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고 있었다.

멀미로 속이 말이 아니었다. 궁내는 길이 깔끔하게 처리되어 있었지만, 이제 그렇지 않았다. 수도를 벗어나자 긴 숲이 보이고 울퉁불퉁한 길에 마차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난 끙끙 앓으며 제르펠에게 기대고 있었다.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멈춰!’를 외쳤고 먹은 것을 토했다. 이제는 나올 것이 없어서 위액만 나왔다. 냄새 때문에 저리 가라고 해도 제르펠은 계속 내 등을 쓸어주고 있었다.

“목적지까지 거리가 남았는데…….”

제르펠의 중얼거린 말은 충분히 내 눈앞을 어질하게 했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마차를 탄 순간 내 몸 상태가 어떨지 상상이 갔다. 난 절망에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제르펠도 내가 고생하는 모습에 속이 쓰린 모양이다. 마차 안에는 담요와 쿠션이 준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바람이 잘 들어오게 하도록 창문도 컸다. 제르펠의 노력이 곳곳에 보였지만 내 멀미는 이길 수 없었다. 속절없이 고생길이 눈앞에 펼쳐지는 찰나 좋은 생각이 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주인아! 가자. 나 괜찮아졌어!”

“……정말이냐?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아냐. 정말 괜찮아.”

단번에 기운을 차린 듯이 달하자 제르펠은 억지로 힘내는 척을 한다고 의심했다. 난 제르펠의 손을 이끌고 마차로 돌아갔다. 묘안이 생각났기에 콧노래를 부르며 마차로 갔다. 반복해서 괜찮냐 묻는 제르펠에게 걱정 마, 라고 끄덕였다.

기다리던 세드릭이 우리를 보았다. 그도 나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었다. 마차가 멈추자마자 문을 벌컥 열고 달려 나갔으니 걱정이 될 만했다. 세드릭은 내 안색을 살피며 물어봤다.

“출발하셔도 되겠습니까?”

난 고개를 힘차게 끄떡였다. 그리고 유유히 휘파람을 불며 마차에 올라탔다. 내 옆자리를 팡팡 치며 제르펠이 앉기를 권했다. 그가 앉자 냉큼 기대고는 두 손을 배에 얹었다.

“정말 괜찮나?”

난 그의 말에 답변 대신 손을 보여 주었다. 당황하던 그도 이내 내 생각을 안 듯했다.

“좋은 생각이지? 놀러 가는데 아픈 것만큼 서러운 게 없어. 주인도 어디 아프면 말해. 내가 말끔히 낫게 해 줄게.”

난 저번처럼 신성력을 끌어다 모아 배 쪽에 갖다 대었다. 묘수에 자화자찬하며 순조롭게 마을에 도착했다. 그리고 여관에서 잠을 자고 다시 아침에 마차를 타고 목적지를 향하는 일상이 반복됐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고 이제 멀미가 아니라 마차가 지루할 때쯤 도착했다.

찌뿌둥한 몸을 쭉 기지개를 켜며 바깥 공기를 쐤다.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 허름한 집들이 눈앞에 보였다. 우리가 보고 온 다른 마을과는 확연히 달랐다.

“……여기야?”

“맞습니다.”

“쯧. 여기 영주는 대체 누구지? 분명 지원금을 줬을 텐데…….”

수도와 멀리 떨어진 곳이다 보니 전쟁의 피해가 군데군데 보였다. 자세히 보니 집들이 불에 타다가 남은 모습이었다.

“사자님!”

한 신관이 나를 부르며 달려왔다. 그의 옷자락 끝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새하얀 옷에 대비된 새빨간 피는 선명하게 보였다. 신관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마주했다. 적대적이지 않네? 내가 신전을 거절했다는 건 뻔히 알고 있을 테니 당연히 불만스러운 표정이거나 싫어할 거라 생각했다. 이런 예상과는 달리 그는 나와 제르펠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만나 뵙게 뵈어 영광입니다. 전 로이테라고 합니다.”

주위를 쭉 훑어보니 새하얀 복장을 한 신관들이 잰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그는 확실히 좋은 인상이지만 방심은 할 수 없는지 제르펠이 성큼 내 앞을 가로막고 말했다.

“교황은 어디 있지?”

“아, 성하께서는 환자분들과 같이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그를 따라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행색은 처참했다. 옷은 군데군데 찢어지거나 헤져 있었고, 먹지를 못했는지 얼굴 살이 쫙 빠져 있었다. 핼쑥한 얼굴에 걱정이 앞섰다. 그뿐만 아니었다. 신체 중 한 곳이 없는 자들도 있었다. 제르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나는 걸음을 흠칫할 정도였는데 그에게는 익숙한 풍경인 것 같았다.

나도 감정을 추스르며 과한 반응을 보이지 않도록 했다. 내가 놀란다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곳입니다.”

병자들을 모아 둔 곳인지 안에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연령 성별 관계없이 다들 기침을 달고 있었다. 어떤 자들은 각혈까지 하고 있었다. 겨우 비바람만 가리게 만든 천막 안에 병든 사람들이 누워 있었고 청결함에 대해서는 할 말도 없었다. 청결함이 제일 중요한데…… 없던 병도 걸릴 정도였다.

신관들은 그들을 극진히 보살피고 있었다. 그러는 척이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속으로 의외다, 라고 생각했다. 저번에 보았던 교황과 신관들의 이미지가 확고했기에 이런 일에는 나서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곧 교황을 발견했다. 방금까지 밀려왔던 감동이 싹 사라졌다. 교황과 그 곁에 있는 신관들은 옷자락이 한 점 흐트러짐 없었다. 병을 간호하고 있는 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하여간 윗대가리들이 문제야.

교황은 저번과 같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리운 이를 보는 듯한 표정에 내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난 제르펠 뒤로 쑥 숨었다. 그런데도 교황은 인자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참으로 한결같았다.

“허름한 곳에 발길을 옮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다시피 사태가 심각합니다.”

“그렇군. 고생이 많겠군.”

“아닙니다. 제 일인걸요.”

“……우선 자리를 옮기지.”

제르펠은 주변을 보고 말했다. 이곳은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절한 곳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교회로 가시지요.”

천막에서 나오고 얼마 걷지 않아 교회가 보였다. 다른 집들은 무너지거나 부서져 있었는데 교회는 금만 가 있었을 뿐 염연히 건물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교회는 멀쩡하네…….”

“신도들의 믿음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입에서 나오면 다 말인 줄 아나? 어이없는 미소를 지으며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흠칫 멈추자 제르펠이 뒤를 돌아보았다.

“슈이렌?”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어? 아니…… 아무것도…….”

나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굳어 버렸다. 왜지? 나조차 내 행동에 놀랐다. 제르펠은 혹시 문제가 있냐며 물어왔지만 난 아무것도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나는 갸우뚱거리면서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문 하나를 열고 들어왔을 뿐인데 밖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안에는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고 외부와 내부가 너무 달랐다. 벽지까지 말끔하게 손봐져 있었다. 마치 새로 리모델링한 것처럼 깔끔했다. 옆을 슬쩍 보니 교황은 여유롭게 걸어가고 있었다. 왠지 그들이 오자마자 한 일이 무엇인지 대충 예상이 갔다. 따로 마련된 작은 방에는 다과와 차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제르펠에게도 뻔히 보였을 테고 그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교황은 제르펠의 시선을 말끔하게 무시하고 자리를 건넸다. 제르펠은 앉자마자 느릿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매서운 말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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