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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생-66화 (66/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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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리 두어도 괜찮겠습니까?”

“무얼 말이지?”

제르펠과 카밀라는 귀족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받으면서도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춤을 추었다. 카밀라는 사랑에 빠진 소녀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 잘 어울린다는 소리가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귀족들은 깜빡 속아 넘어갔다. 그녀는 우수한 연기자였다.

“사자님 말이에요. 무척이나 귀여우신 분 같던데요?”

“……뭐?”

카밀라는 살짝 미소를 지었고 그 반대로 제르펠의 눈썹은 찌푸려졌다. 카밀라가 몸을 주춤할 정도로 그의 목소리는 스산했다. 그는 카밀라의 손을 확 잡아당겼고, 그녀의 귓가에 으름장을 불어넣었다.

“난 유능한 인재를 순간의 실수로 잃고 싶지 않군.”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다행이군.”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서로가 멀어졌다. 카밀라는 떨리는 입술을 숨겼다. 제 귀에 들리는 잘 어울린다는 소리가 어리석게 들렸다.

“귀족들의 꽉 막힌 생각은 어쩔 수 없네요. 전하와 사자님께서 단둘이 있는 모습을 봤음에도 저런 소리가 나오다니…….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다른데 말이죠.”

남자와의 관계는 쉬쉬하게 마련이다. 더군다나 귀족은 피를 고귀하게 여기며 대를 이어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르펠은 황태자의 신분이니 더욱 그랬다. 현 황제도 지극정성으로 황후를 사랑하지만 후계자를 얻지 못하자, 귀족들의 성화로 황비를 들였다.

“너의 역할만 충실히 하면 된다.”

“물론입니다.”

카밀라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예의상 표하는 웃음이었지만 이미 선입견이 쓰인 귀족들은 제르펠과 춤추는 것이 기뻐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카밀라는 제르펠에 대해 아무 관심이 없었다. 나를 인정해 준 좋은 지도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제르펠과 베르트 공작가의 동맹. 귀족에게 보여 주기 용이었다. 약혼한다는 소문도 한순간이다.

원래 사교계의 소문은 많고 한순간에 지고 한순간에 뜬다. 훗날에는 제르펠과 슈이렌이 깊은 관계라는 소문이 확 뜰 확률이 높았다.

그녀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 공작의 후계자라는 자리였다.

“조건을 지켜 주신다면 방패 역도 해내 보이겠습니다.”

제르펠은 카밀라에게 슈이렌의 방패 역을 하라고는 정확하게 제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탁월하게 제르펠의 의도를 잡아냈다.

“기대해 보지.”

“실망하시지 않게 해 드릴 자신 있습니다. 전하가 재위하시기 전에 저의 가치를 보여 드리죠.”

제르펠은 그녀를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한동안 그들 사이에는 말조차 오가지 않은 채 춤에 열중했다. 카밀라는 제르펠의 날카로운 눈매를 보았다. 단 한 번도 그의 눈매는 휘어지지 않았다.

카밀라는 슈이렌 옆에 서면 인상이 달라지는 제르펠이 신기했다. 그리고 어떤 분이길래 제르펠을 웃음 짓게 하는지 궁금해졌다. 그녀는 이번이 슈이렌과 첫 만남이었고, 공작을 통해서 들은 바도 없었다. 공작도 슈이렌과 몇 번 얼굴을 마주한 것이 다라고 했다.

그녀가 공작에게 슈이렌에 대해 묻자, 공작은 말을 흐리면서 귀여운 분이라 칭했다. 하지만 실제로 보니 마냥 귀여운 분은 아니었다.

당당하게 황제에게 말하는 모습은 흡사 제르펠과 비슷했다. 카밀라의 시야에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슈이렌을 발견했다.

“사자님을 혼자 두어도 괜찮으신가요?”

“…….”

카밀라의 눈에 어깨가 축 처진 슈이렌이 보였다. 슈이렌은 귀족들 사이를 헤치며 한없이 구석으로 갔다. 왠지 그 발걸음이 위태롭게 휘청였다. 제르펠의 시선이 슈이렌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연애가 서투시군요?”

“서툴다고?”

“제가 전하의 손을 잡자 충격받은 표정이시던데…… 홀로 두셔도 괜찮겠습니까? 사자님을 노리시는 영애들도 많던걸요?”

카밀라의 말에 제르펠의 눈썹이 사정없이 요동쳤다. 음악이 고조되고 카밀라와 제르펠은 더욱 가까이 붙었다.

“설마. 그는 내 옆에 있을 것이다.”

“…….”

그렇게 해야 한다고 세상이 정했다는 듯이 아주 확신이 가득 찬 목소리였다. 제르펠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개구쟁이처럼 보이는 그의 미소에 살짝 눈을 내리깐 그녀는 그렇군요. 라고 대답했다.

손을 놓고 떨어지려는 찰나 ‘무엇보다…… 내가 그리 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제르펠이 흘러가는 식으로 말했다. 중얼거린 말은 공기처럼 흩어졌다. 카밀라가 고개를 돌렸지만 제르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졌다. 큰 박수 소리와 함께 드디어 춤의 끝이 찾아왔다.

그와 동시에 많은 사람이 모여 그 주위를 에워쌌다.

이제 본격적인 연회의 시작이었다.

* * *

제르펠은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진 슈이렌을 찾았다. 사라진 슈이렌의 모습에 황금빛 눈동자를 번뜩이며 연회장을 쭉 둘러보았다. 곧 베르트 공작이 테라스 쪽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테라스에 있나 보군. 제르펠은 카밀라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러 영애와 귀부인에게 둘러싸여 잘 대처하고 있었다. 약혼의 여부에 묻는 이들이 많았지만 모호한 대답으로 그들의 상상을 부추겼다. 귀족들 사이를 뚫고 제르펠에게 베르트 공작이 다가왔다.

“사자님은 따로 테라스 쪽에 모셨습니다.”

베르트 공작이 작게 귓가에 말했다. 제르펠은 고개를 끄덕였다. 춤추는 중 본 슈이렌의 기가 죽은 어깨와 시무룩한 표정이 신경이 쓰였다. 심통이 나서 혼자서 성질을 부리고 있는 모습이 상상이 됐다. 슈이렌은 분한 일이 있으면 무언가를 씹거나 발로 차는 행위를 하곤 했다.

‘빨리 기분을 풀어 주러 가야겠군.’

제르펠은 귀족들을 물리고 테라스로 가려 했으나 한 인물이 그를 방해했다.

“전하. 대체 얼마 만입니까.”

처음 듣는 목소리였지만 제르펠의 한쪽 구석에 있는 기억을 자극했다. 모든 귀족이 모이는 연회였고, 베르트 공작의 언급으로 마주칠 거라고 예상했다. 제르펠의 낯이 서늘하게 굳었다. 다가온 자는 프란시아 후작가로 한때는 귀족들의 정점에 있던 자였다.

황궁에 돌아온 후 한 번도 마주친 적은 없었지만 어릴 때는 몇 번이나 보았다. 하찮은 것을 바라보던 노골적인 시선이 기억났다. 제르펠은 몸을 돌려 프란시아 후작을 마주했다. 시간의 흐름을 비껴가지 못했는지 기억보다 후작 머리는 하얗게 세었고 눈가의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하지만 표정과 시선만은 똑같았다. 제르펠은 프란시아 후작을 훑어보았다.

슈이렌을 보러 가던 차에 후작이 튀어나왔으니 제르펠의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프란시아 후작은 여유롭게 수염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프란시아 후작. 오랜만이군.”

“네. 전하. 어릴 때와 다름없는 총명한 모습이군요. 그때가 그립습니다.”

“어릴 적 모습이라…… 그렇군. 소식은 들었다. 요즘 하는 사업이 제법 고난을 겪고 있다더군.”

프린시아 후작의 미소가 일그러지고 낯이 굳었다. 사업에 불똥이 튄 이유는 사업에 참여한 귀족들이 대거 숙청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베르트 공작의 출현으로 등을 돌린 귀족들도 수두룩했다.

“이런, 전하께 걱정을 끼친 것 같습니다. 사업이 원래 그런 거지요. 잠깐 주춤하더라도 언제 회복될지 모르는 것이 사업입니다.”

후작의 눈이 번뜩였다. 그리 말하는 후작은 마치 너 또한 그렇다는 듯이 제르펠을 향해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귀족들은 그들의 신경전을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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