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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생-65화 (65/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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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

황제의 우렁찬 소리에 떠들던 귀족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태자는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황제는 인상을 구기며 의자 손잡이를 꽉 부여잡았고 들숨을 내쉬며 화를 삭였다. 제르펠은 나를 힐끔 쳐다보았고, 그의 눈동자에는 애정이 흘러넘쳤다. 제르펠은 황제를 똑바로 마주 보며 이야기했다.

“이상할 건 없습니다. 더 나아가 바라본다면 제국을 위한다는 뜻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고정하시지요.”

헉.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한 발짝 물러서 있던 제르펠이 결국 칼을 뽑아 든 것과 마찬가지였다. 간접적으로 다음 황제는 자신이니 별 상관이 없다는 말이었다.

중앙 귀족들은 드디어 때가 되었는가 하고 눈치를 보았지만 이제 수도로 상경한 지방 귀족들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 바빴다.

황제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황제는 흉흉한 기색으로 죽일 듯이 제르펠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국을 다스리는 자는 바로 짐이다! 너를 위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황제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황제의 얼굴은 분노로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분노에 몸을 맡긴 황제는 도저히 한 제국을 다스리는 지도자로는 보이지 않았다. 귀족 중에는 얼굴이 노랗게 질린 자와 열심히 눈치를 보는 자, 얼굴을 찌푸린 자 다양했다. 단상 위라서 귀족들의 표정이 생생히 잘 보였다.

“저를 위하는 것 또한 제국을 위하는 것이 아닙니까.”

태연한 제르펠의 말에 황제가 일어나려는 찰나 황후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아직 사자님이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한 것이겠죠. 태자의 말대로 넓은 의미로는 제국을 위한 길이 아닙니까.”

황후가 말리자 분노로 물들었던 황제의 얼굴이 풀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황제는 황후의 만류에 진정하기 위해 미간을 꾹꾹 눌렀다. 황후는 제국을 위한다는 척하며 퍽이나 우아한 어조로 조곤조곤 나에게 말했다.

“사자님. 저희 제국을 위해 힘을 써 주신 점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국은 많이 어려운 처지라 사자님의 힘에 기댈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기우제 때 비가 왔다고 하나 그 뒤로는 오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사자님의 능력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신계에서는 어떤지 모르나 제국에는 관습이 있습니다. 폐하에 대한 불경한 태도는 다른 사람에게 눈초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저번에 도움을 청한 자라고 생각할 수 없는 태도였다. 척을 지기로 했는지 아니면 내 발언에 나를 회유하는 것을 포기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아니면 티타임 때 단단히 잘못 보였다든가. 그러면 어쩔 거야?

“불경한 태도라고 말했는데 어느 부분? 두리뭉실하게 말하면 잘 모르겠는데? 애초에 주인을 위한다는 말이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는걸? 날 보살펴 주는 건 주인인데 그를 위해서 도와주는 게 나쁜 일인가?”

“사자님은 제국을 가장 위하셔야죠. 수신님이 제국을 위해 내려 주신 분 아닙니까.”

“그건 내가 정하는 거잖아. 난 누구한테도 명령받지 않을 건데?”

상냥한 척하는 황후의 가면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부채를 꽉 움켜쥔 황후의 손등 위로 솟은 핏줄이 보였다.

“그만! 그대의 뜻은 잘 알겠다. 이제 그만 물러나라.”

황제는 손짓으로 물러나라고 했다. 갈수록 불리해진다고 생각했는지 논쟁을 멈추게 했다. 나와 제르펠은 살짝 고개를 숙였고 뒤로 물러났다. 귀족들은 숨 쉬는 소리도 죽였다. 황제의 심기가 불편해 보였기 때문이다. 제르펠과 황제의 대치를 보고 귀족들의 머리가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단상에서 내려오는 동안 귀족들의 시선이 날카롭게 꽂혔다. 내 옆에서 시선이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시선의 주인공은 제르펠이었다. 내가 입 모양으로 ‘왜’라고 묻자 살포시 희미한 미소를 지은 그가 말했다.

“잘했다.”

“그렇지?”

배시시 웃으며 그를 올려보았다. 제르펠은 자신의 견제함과 황위를 노리겠다는 의지를 이 연회에서 보여 주기로 했다. 그가 칼을 빼 들었고 내가 거기에 힘을 보태어 주었던 것뿐이다. 뿌듯함에 코를 쓱 문질렸다.

아쉬운 건 저쪽이지 내가 아니었다. 이미 황제는 무능하다는 여론과 분쟁과 불행을 일으켰다는 호칭을 달고 있었다. 만약 기우제가 성공하지 않았다면 그 타이틀은 제르펠이 달았을 것이다.

‘비가 오지 않는 것은 국가적으로 봐도 비상시였으니 나에게 함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지.’

자신의 지위로 다른 사람을 누를 줄이나 알지 당하는 건 처음이었을 거다. 이게 바로 역지사지의 마음이지. 너도 당해 봐라!

“그렇지만 자칫 잘못하면 위험할 뻔했다.”

제르펠은 굳은 표정으로 나를 질타했다.

“기껏 생각해서 말했더니…….”

내 마음도 몰라주고 구박하는 제르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입을 삐쭉 내밀었다.

“하지만……. 무척이나 든든하구나. 덕분에 일이 원만해지겠군. 큰일을 했으니 나중에 원하는 상을 주마. 내가 직접.”

황제가 뭐든지 주겠다는 말을 의식한 것 같았다. 제르펠의 표정이 얼음이 녹듯이 사르르 풀어졌다. 쑥스러워져 괜히 헛기침했다. 난 머쓱해져 목덜미를 만졌다.

“알면 됐어.”

우리가 내려오고도 한참을 미간을 잡으며 문지르던 황제가 지시했다.

“음악은 어디 갔느냐!”

화들짝 놀란 음악대가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정적이 가득한 연회장에 음악 소리만 들렸다. 음악이 흐르자 황제와 황후가 서로 손을 잡으며 벌떡 일어났다. 귀족들은 큰 동그라미를 그리며 물러났고 귀족들이 만들어 준 자리에서 그들은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귀족들은 춤을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시작된 댄스에 어리둥절했다.

“연회의 첫 춤은 연회를 주최한 자로 정해져 있습니다. 주최자가 춤을 추고 나면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는 것이죠. 첫 춤이 끝나고 다른 자들도 춤을 춥니다.”

뒤에서 고운 미성이 들려왔다. 뒤를 휙 돌아보니 카밀라가 웃는 낯으로 서 있었다. 그 옆에 베르트 공작이 흐뭇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훌륭했습니다. 전하. 특히 사자님의 발언이 컸습니다. 귀족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귀족들을 포섭하기에는 수월할 듯합니다. 다만…….”

“무슨 일이지?”

“프란시아 후작가가 왔다고 합니다.”

“모든 귀족이 모이는 연회니 말이지.”

“그것만이라면 괜찮지만…… 복귀를 한다는 말을 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마마께서 수를 쓰신 듯합니다.”

황후가? 심각한 일 아니야? 경악한 얼굴로 제르펠을 바라보았다. 그도 예상치 못했는지 눈썹을 찡그렸다. 베르트 공작은 나를 보며 미안하다는 투로 말했다.

“아무래도 확실히 보여 줄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사자님과의 관계는 알지만 보여 주기용은 필요합니다. 되도록 많이 선보이는 게 이득인 자리입니다. 사자님. 죄송합니다.”

그가 나에게 미안할 일이 뭐가 있다는 건지 어리둥절했다.

“쯧. 하필 그자가 복귀를 말한다라…….”

“복귀? 어떤 복귀? 역시 정치?”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의 옷깃을 잡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프란시아 후작이 누구인데? 나를 배제하고 나누는 말에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귀신같이 내 기분을 캐치하는 그가 턱을 문지르며 고심하고 있었다. 나는 뒷전이었다.

제르펠의 심각한 얼굴로 봐서는 아마 프란시아 후작이 귀족 사회의 복귀를 말하는 것 같았다.

“춤이 빨리 끝날 모양입니다.”

황제와 황후의 춤이 끝나고 그들은 애초에 오래 있을 생각이 없었는지 아니면 기분이 상했는지 명분만 지키고 떠났다. 하지만 다른 귀족들은 눈치를 보고 그 누구도 춤을 추지 않았다. 춤추는 사람 없이 음악 소리만 들렸다.

옆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제르펠은 내 머리에 손을 얹더니 쓰다듬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그저 과시 용이니 신경 쓰지 마라. 혼자 우울해하지 말고.”

제르펠은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뒤에서 카밀라가 입가를 손으로 살짝 가린 채 웃고 있었다. 제르펠은 카밀라에게 손을 내밀었고, 카밀라는 승낙의 표시로 그 손 위에 살짝 손을 얹었다. 그 둘은 천천히 걸어갔고, 모든 귀족들이 지켜보는 곳에서 같이 춤을 추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애매한 제르펠의 태도에 말을 조심했지만 그렇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카밀라와 춤을 추는 제르펠을 보고 선뜻 짐작하며 말했다.

“사자님의 복장은 단지 폐하에게 긴밀한 사이임을 알리기 위함이었나 보네요.”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네요.”

“가문으로서도 좋은 조합 아닌가요?”

“전하가 어디서 아까워서 남자를 만날까요.”

“후계도 마땅히 생각하셔야죠.”

“정말로 약혼을 하시는 걸까요?”

“저리 다정하게 추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알지 않겠나요?”

누가 뒤통수를 딱 때린 기분이었다. 그의 고백을 처음 받았을 때도 망설이게 한 이유 중 하나였다. 감미로운 음악 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공녀와 제르펠을 보고 소곤거리는 말이 왜 가슴에 콕콕 박히는지…… 내 눈앞에서 아름답게 춤을 추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화가 나기보다는 그저 기운이 빠졌다. 내 스스로도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격지심과 비슷했다.

우울해하지 말라던 제르펠의 당부가 있었지만 이미 한없이 우울해지고 있었다. 속으로는 별거 아니라고 애써 달래고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사자님. 단지 정치적인 이유일 뿐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침울해진 내 표정을 본 건지 베르트 공작이 자상하게 말했지만 그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는 있다. 그가 보인 애정이 거짓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속상한 마음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실제로 자신도 그리 생각했지 않았는가? 나도 성별로 고민했고, 거기에 후계자도 걱정했잖아?

제르펠이 전해 주는 달콤한 감정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다. 씁쓸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제르펠과 친밀함을 표한 것은 나였지만 그가 카밀라와 춤을 추자 바로 돌변한 귀족들의 반응이 짜증 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했다.

‘주인이랑 사귀는 사람은 나인데…….’

그런데도 막상 화를 낼 수 없는 것이 나 또한 그리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베르트 공작을 보며 걱정하지 말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

과감하게 끼어들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접착제라도 붙인 듯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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