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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는 고개를 숙이며 놀라는 마음을 감추었다. 처음에 이안의 부름을 받고 황궁에 갔을 때 많이 긴장했다. 제르펠이 냉정한 분이라고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의상실을 하면서 귀부인, 영애를 손님으로 맞이하는 헬리스는 제르펠이나 슈이렌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베일에 싸인 신의 사자나 훌륭하게 장성한 황태자의 이야기는 가장 큰 화젯거리였다. 그녀들은 남편에게 들은 이야기, 혹은 친분 있는 자에게 들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의상실은 친분이 있는 자들끼리 모이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사자님은 여전히 전하의 궁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하죠?”
“사실…… 이런 소문도 있다고 해요. 그…… 연인 사이라는…….”
“설마요. 확실히 사자님의 미모가 돋보이긴 했지만 아름다운 여인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말도 안 되는 소문이죠.”
귀부인은 말하기를 꺼리는 듯 입가를 부채로 가렸다. 그 귀부인의 말을 들은 다른 귀부인들은 손을 내저었지만 눈을 빛내고 있었다. 헬리스는 조금 전에 들은 소문이 사교계에 순식간에 퍼질 것을 예감했다. 그때 옆에 있던 다른 귀부인이 말했다.
“그런가요? 전 오히려 이런 소문을 들었습니다. 공작 각하께서 전하 쪽으로 돌아섰다는 것은 알고 계시죠? 그게 사실은…….”
은밀하게 속닥이며 말했지만 놀라서 말한 한 귀부인의 격양된 목소리가 의상실에 가득 울렸다.
“네? 약혼이요??”
“쉿! 아직 확실한 건 아니에요. 전하의 편을 들어주는 걸 보고 그렇지 않냐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 공녀의 나이가 몇인데 아직 약혼도 하지 않았잖아요. 실제로 황궁에서 나온 마차가 베르트 공작 저에 몇 번 오갔다는 말이 있었고요.”
“만약…… 사실이라면…… 사교계가 발칵 뒤집히겠네요.”
“이번 연회에 전하를 노리고 가는 영애도 많을 텐데…… 사실이라면 안타까운 소식이네요. 공녀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미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사실 제 딸아이도 전하를 노리고 있더라고요. 이 사실을 알면 슬퍼하겠네요.”
“어머, 부인도요? 사실 저도 제 딸아이가…….”
“그럴 만도 하죠. 소문으로 무성한 전하의 늠름한 모습은 영애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긴 충분했죠. 거기에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죠.”
의미심장한 말에 잠깐 정적이 찾아왔다. 귀부인 중 한 명이 헬리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마담. 이번에 황궁에, 그것도 전하의 궁에 간다는 소식이 있던데 정말인가요?”
“어머? 정말인가요?”
그 귀부인은 부채로 입가를 가렸지만 눈빛은 날카롭게 빛내며 행동을 파헤치고 있었다. 헬리스는 그림에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과분하지만 명을 받아 옷을 선보이러 가게 되었답니다.”
“어머, 축하해요.”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혹시……. 무언가를 알게 되면 알죠?”
귀부인은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말했다. 헬리스는 이 바닥에서 눈칫밥을 먹고 살아왔다.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제르펠과 슈이렌을 보았을 때 그들의 사이는 무척이나 가까워 보였다. 특히 제르펠이 슈이렌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귀족에게 있어서, 그것도 황족이 무릎을 꿇는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명예와 관련된 일이었다.
“전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잠깐.”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길 때 제르펠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는 말을 던졌다.
“네가 본 그대로 말해도 상관없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제르펠은 확신한 말투로 말했다. 당연히 헬리스는 부인들께 이 소식을 전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질타라고 생각해 무릎을 꿇으려고 했다. 제르펠은 머뭇거리는 헬리스의 태도를 파악했는지 다시 한번 말했다.
“최대한 네가 본 그대로, 아니 오히려 강조해서 퍼트려라.”
헬리스는 불경한 죄라는 걸 알았지만 멍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치가 빠르다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
“……네. 전하.”
제르펠의 명대로 헬리스는 그 일을 그대로 전달해 주었다. 귀부인들을 놀라워하면서 서로 부채질하기 바빴다.
제르펠이 이번에도 또다시 궁으로 불렀고, 서로 같은 디자인을 주문했을 때부터 직감했다.
저번의 태도에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확신으로 바뀌었다. 한 귀부인이 호사가들이 떠드는 헛소리라 치부했던 소문이 사실이라고. 그들은 의상실에 찾아오는 연인의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그녀는 프로였다. 최대한 표정이 드러나지 않게 빠르게 손을 놀렸다. 이번 황궁 연회는 사건, 사고가 잦을 것이라 확신했다.
* * *
오늘은 황궁 연회의 날이다. 드디어 이날이 오고 말았다! 그동안 내가 쏟아부은 노력을 선보일 장소! 그리고 황제랑 황후가 오는 곳.
이안은 아침부터 단단히 계획했는지 연회 준비를 하느라고 바빴다. 아침부터 목욕을 시키지 않나. 머리에 덕지덕지 향유를 바르지 않나. 옷의 선이 잘 살지 않는다며 음식도 못 먹게 했다.
겨우 준비를 마치고 비틀거리며 의자에 녹아내렸다. 제르펠은 마지막 매무새를 가다듬는 중이었다. 그가 입은 옷은 나와 같은 디자인에 색과 걸치는 장신구만이 달랐다.
위엄 있고 늠름한 제르펠의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내 연인이라 생각하니 절로 어깨가 으쓱거렸다. 참 잘생겼어. 난 멍하니 그를 구경했다. 제르펠이 나에게 시선을 주더니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슈이렌, 이리로.”
“왜?”
그는 나를 곁눈질해서 살펴보더니 약간 삐뚤어져 있는 타이를 고정해 주고 탁자 위에 있는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찬란한 빛을 뽐내는 브로치 하나가 있었다. 크기와 광택 무엇 하나 뒤지지 않는 고급품이었다. 그는 그 브로치를 꺼내어 내 타이 위에 달아 주었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보석 안에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용인가?
“주인 눈동자 색이네? 그런데…… 이 안에 있는 문양은 뭐야?”
“네가 황실 쪽의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해 주는 장신구지.”
보석 안에 촘촘하게 새겨진 용 문양은 아름다웠다. 기우제 때 보았던 용 문양과 같았다. 황가를 상징하는 문양인가? 그는 브로치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남은 상자는 뭐야? 주인 거? 내가 달아 줄게!”
손을 뻗어 탁자 위에 혼자 남은 상자를 가로챘다. 역시 그 안의 물건은 제르펠의 것이었다. 붉은색으로 빛나는 브로치를 보고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난 브로치를 제르펠의 타이 위에 달아 주었다.
“좋아, 완벽해!”
“예쁘구나.”
“그치? 나도 예쁘다고…….”
“누가 눈독 들이면 안 되는데…….”
브로치를 보고하는 말인 줄 알았지만 내 눈동자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말도 참 이쁘게 해요. 그의 눈가가 예쁘게 호선을 그렸다.
“……참나…… 누가 그래. 주인밖에 없으니까 걱정 마.”
그는 고백 이후 닭살 돋는 말을 아무렇게 하기 시작했다. 나도 슬쩍 그를 보며 칭찬했다.
“주인도 멋있어…….”
“고맙구나.”
제르펠은 나를 보며 연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긴 한숨 끝에 말을 붙였다.
“그래도 혹시 너에게 접근하는 자가 있다면 말하거라.”
“…….”
“내 당장 치워 주마.”
제르펠은 한 음절씩 강조하며 말했다. 분명 살벌한 말이었지만 내 입꼬리는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고 올라갔다.
“큼, 주인이야말로…….”
“나 말인가?”
“그래…… 여자들한테…… 인기 많지 않아……?”
내 말에 제르펠은 작게 픽 웃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나는 손발이 절로 오그라드는 기분에 화제를 재빨리 돌렸다.
“주인아, 지금 벌써 연회 시작했겠다. 다른 귀족들도 온다며? 빨리 가서 기선을 제압해야지.”
지금 당장이라도 나갈 준비가 되었다며 발을 힘차게 구르며 말했다. 제르펠은 작게 비소를 짓더니 무심하게 말했다.
“괜찮다. 주인공은 너다. 늦게 가도 된다.”
“그래도 이렇게 느긋해도 돼? 늦게 갔다고 뭐라고 하면 어떡해?”
“그런 말은 무시해도 된다. 애타는 건 귀족이지 우리가 아니다. 목걸이는 빠트리지 않고 했나?”
수군거리며 기다릴 귀족들의 모습이 훤했지만 제르펠이 괜찮다고 하면 믿음이 갔다.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한 제르펠은 목걸이의 여부를 물었다. 항상 착용하던 목걸이라 이제는 없으면 허전한 기분이 들었고, 내 안전장치라는 걸 알았기에 옷 안에 꼭꼭 숨겨 놓았다.
“걱정하지 마. 똑바로 착용했어. 보이지 않게 옷 안에 숨겨 놓았지.”
난 숨겨 놓았던 목걸이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제르펠은 장하다는 식으로 머리를 쓰다듬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걱정된다면 이제 슬슬 출발하도록 할까?”
“그러자.”
난 제르펠의 뒤를 따라갔다. 역시 브로치에 새겨졌던 문양은 황가의 상징이 맞았다. 이안이 준비한 마차에 같은 문양이 보였다.
“자. 손을.”
제르펠은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나를 에스코트하는 제르펠의 행동에 약간 심란했다. 난 거치적거리는 드레스를 입지도, 굽이 높은 신발을 신지도 않았다. 충분히 발판을 밟고 혼자서 올라갈 수 있었다. 뭐, 무슨 상관이야. 좋으면 하는 거지. 난 생긋 웃으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고마워.”
마차의 쿠션은 푹신하고 부드럽게 출발했지만 그런데도 죽어가는 내가 있었다. 멀미……. 이제 막 출발했는데 벌써 난리다…… 속이 울렁거리고 나올 것 같은 느낌에 계속 마른침을 삼켰다. 등을 두드려 주는 제르펠의 손길도 거부하고 축 널브러졌다.
아무리 좋은 마차라도 덜컹거림은 존재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이 든 것은 길이 잘 닦여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마차는 마차. 작은 돌멩이가 마차 바퀴에 걸리면 덜컹거리기 일쑤였다.
“으…… 으……. 마차 싫어…….”
제르펠은 이 정도로 내가 멀미가 심할 줄은 몰랐는지 나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창문도 열어 주었다. 선선한 바람이 그나마 멀미를 달래 줬다.
“이런…… 조금만 참으렴. 곧 도착한다.”
한쪽 눈을 살짝 뜨고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주 살짝이지만 보인 풍경 덕분에 더 속이 안 좋아졌다. 멀리서 보이는 웅장한 연회장과 그 길을 마차들이 쭉 줄지어 있었다. 저 마차들이 들어갈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를 생각하면 안색이 새하얘졌다.
“대체 저게…….”
너무 긴 행렬에 말을 잇지 못했다. 저 마차들이 다 귀족들이라고?? 다행히 우리가 줄 맨 뒤에 서는 것은 아니었다. 신분이 짱이다…… 우리 마차는 프리패스로 통과했다.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나부터 살자.
기사가 마차 문을 열어 주자마자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성급하게 일어났는지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다행히 제르펠이 얼른 나를 잡아 주었다. 그가 먼저 내리고 내 손을 잡고 지탱해서 안전하게 내렸다.
“주인아…… 고마워…….”
고마움에 미소를 지은 채 제르펠을 보자 그도 살짝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리고 주변이 떠들썩해졌다.
“방금 전하께서 미소를……?”
우리를 주시하던 귀족이 제르펠의 미소를 보자 믿을 수 없다면서 중얼거렸다. 그는 내가 다친 곳이 없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난 그의 손을 잡으면서 이제 들어가게 될 연회장을 향해 힘차게 걸어갔다. 다 덤벼라 이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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