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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생-61화 (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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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은 세상이 허탈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신랄하게 비난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제르펠에게 받은 보너스를 상기했다.

이안은 며칠 전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제르펠을 슈이렌에게 보냈다.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의미 없이 보내는 시간이 아까워 차라리 스스로 일을 마무리 짓자는 마음가짐으로 그를 보냈다.

이안은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서류를 분류하고 방으로 들고 가려는 찰나 제르펠이 슈이렌의 손목을 잡아끄는 장면을 목격했다. 멀리서 본 제르펠의 분위기가 스산했다.

하지만 큰 걱정은 없었다. 설마 제르펠이 슈이렌에게 진심으로 화를 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나도 방에서 나오지 않는 두 사람이 걱정됐다.

이안은 방문 앞을 서성거렸고 문을 지키는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전하께서는 아직도 나오지 않았나?”

“네……. 나올 때까지 들어오지 말라는 말만 남겼습니다.”

기사가 이안의 말에 대꾸했다. 옆에 있던 카사가 노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이안에게 말했다.

“괜한 걱정인 것 같습니다.”

카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안에게 말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인물이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안의 직책은 제르펠을 보좌하는 것, 시계는 식사 시간대를 가리키지만 안에서는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슈이렌 님의 성격상 절대 식사를 거를 분이 아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이안은 이상한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결심한 그는 크게 숨을 내쉬고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에서 아무 답이 없었고 한 번 더 노크를 했다.

그리고 외마디 비명과 퍽 치는 소리가 들렸다. 곧 안에서 들어오라는 슈이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잠시 실례하겠…….”

이안은 카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자신을 원망했다.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걸 늦게 깨달았다. 문이 반쯤 열리다가 멈추었다.

“이, 이, 이안. 왜? 볼일 있어?”

“누가 들어오라 했지? 내 분명 나올 때까지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기사가 전하지 않더냐?”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은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자세는 문제가 없었지만 슈이렌의 촉촉하게 젖은 눈과 붉게 물든 볼, 심지어 둘 다 빨갛게 부푼 입술이 이안의 눈동자에 비쳤다.

슈이렌은 어설프게 웃으면서 목덜미를 손으로 만졌고, 제르펠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듯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짜증스럽게 이안을 노려보았다. 그 자리에 돌처럼 굳은 이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제르펠의 연애 상담을 들어주었던 시간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이안은 표정을 가다듬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오늘 식사는 어찌하실 겁니까?”

제르펠은 창가를 바라보았다.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어둠이 졌군. 슈이렌, 식사하러 갈까? 어찌하고 싶으냐?”

“응? 바, 밥은 챙겨 먹어야지.”

슈이렌은 이안을 힐끔 쳐다보며 연신 고개를 주억였다.

그날부터였다. 궁에서 둘의 사이를 모르는 자가 더 이상할 정도였다. 다들 쉬쉬할 뿐 제르펠이 슈이렌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졌다는 것을 알았다. 단지 시중 인으로서 언급하지 않을 뿐.

이안은 언젠간 이리되리라 생각했다. 자신은 이미 전하께 언급했고, 서로 마음이 통했다면 전하의 행복을 응원했다. 그리 생각했지만 연인들의 애정 행각을 보는 건 고된 일이었다.

현재 슈이렌은 제르펠의 무릎위에 앉아 그의 일을 도와주겠다며 허가가 된 서류에 도장을 쾅쾅 찍고 있었다. 이안은 들고 온 서류가 손의 압력에 의해 구겨지는 것조차 모른 채 그 모습을 정면으로 보고 있었다.

제르펠은 이안이 들어올 때마다 불청객을 보는 눈빛이었다. ‘전하. 일 안 하십니까?’라고 말하고 싶은 걸 참았다. 이제는 문을 열 때마다 손이 흠칫했다.

이안은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제르펠에게 말을 전했다. 어제 제르펠은 슈이렌에게 선물해 줄 꽃을 찾고 에이든에게 꽃다발 만드는 법을 배우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기에 디자이너를 돌려보냈다. 이안은 방금 디자이너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시종에게 듣고 제르펠에게 전하기 위해 집무실에 찾아왔다.

“디자이너분이 오셨습니다.”

“옷 왔어?”

“네, 응접실로 안내해 드렸습니다.”

“빨리 가자!”

“알겠다. 지금 가지.”

제르펠은 목에 매달리는 슈이렌을 다정한 눈길로 보았다. 이안은 왠지 옆구리가 시려 왔다.

* * *

응접실에 들어가자 옷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옷가지 수가 너무 많았다. 분명 카탈로그에서 내가 고른 디자인은 하나였다. 그것도 제르펠과 고심하고 고심한 끝에 고른 디자인이었다.

옷들이 왜 이리 많아? 그런데……. 이상하게 낯설지 않네? 자세히 살펴보니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던 옷이었다. 설마……. 다 주문했어? 난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제르펠은 아무렇지 않게 옷을 평가했고 흡족했는지 살짝 입꼬리가 올라갔다. 허탈함에 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많이 필요 없는데……. 이 많은 옷을 언제 입어…… 드레스 룸에 먼지만 쌓여 가고 있는 옷이 생각났다.

맞춤복은 일상복과 달리 자수도 화려하고 디자이너가 직접 제작한 디자인에 딱 한 벌만 생산하는 옷이다. 맞춤복을 통해 귀족들의 재력을 뽐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말은 맞춤복의 가격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었다.

치수에 맞게 만들어진 옷을 보면 이미 결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난 제르펠의 옷깃을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주인아…… 이거 너무 많지 않아? 무슨 연회가 매번 있는 것도 아니고, 딱 하루인데. 옷이 너무 많잖아.”

“적당한 선이다. 그리고 여분은 필요하지.”

그 여분이 10벌이나 넘어가는 건 과하지 않니?

“그래도 옷 수가…….”

“그리고 연회는 하루가 아니다. 내가 미처 말하지 못했나 보군. 사흘 동안 연회가 이루어진다.”

“사흘이나??”

내가 사교회 모임을 너무 만만하게 보았나…… 이게 무슨 돈 지랄이야? 하루면 끝날 줄 알았지! 사흘 동안이나 귀족들의 얼굴을 맞대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피로가 몰려왔다. 하루만 딱 하고 끝내면 좋잖아? 같은 얼굴 또 봐서 대체 뭘 한다는 거야.

“슈이렌 님께 언급하지 않으셨습니까?”

뒤에 있던 이안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놀란 내 얼굴을 본 이안이 설명을 덧붙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본래 닷새였습니다. 3일도 전하께서 줄인 날입니다. 3일 동안 지속이 되긴 하지만 다 참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첫날과 마지막 날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흘 중에 이틀이라 다 참석하는 것과 비슷하군요. 첫날은 모든 귀족이 모이고, 둘째 날의 참석은 자유입니다. 피치 못한 사정으로 첫날에 참석하지 못한 귀족들을 위해 마지막 날 다 같이 모입니다. 그리고 황궁 연회의 마지막 날에는 자신들의 결혼 상대를 찾는 거죠. 그날은 내내 음악 소리와 파트너를 바꾸어 가며 춤을 춥니다. 귀족들에게는 자신의 짝을 찾는 모임이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슈이렌 님과는 상관없겠죠.”

이안의 말 중 나에게 크게 닿았던 부분은 댄스였다. 댄스? 왈츠 추나? 하지만 난 제르펠과 수업 중에 댄스를 배웠던 적이 없었다.

“주인아. 그러고 보니 나 춤춘 적이 없는데 어떻게? 마지막 날 춤춘다며? 상대방 발 밟는 거 아냐?”

초등학교에서 배웠던 포크 댄스가 처음이자 마지막 기억이다. 영화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던 장면이 기억났다. 내 말의 어느 부분이 제르펠의 심기를 거슬린 건지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누구 마음대로 다른 자와 춤을 추겠다는 거지?”

과잉 반응에 난 이안을 슬쩍 보았고 이안은 나를 끌어들이지 말라는 듯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아니…… 이안이…….”

제르펠은 경솔한 발언을 한 이안을 째려보았다.

“난 내 것을 남과 공유하는 취미는 없다.”

제르펠은 단호하게 내 말을 끊어냈다.

“그렇군…… 댄스라. 배우는 것이 좋겠지. 하지만 나와 춤추는 것이다. 그 다른 누구도 아닌 나와.”

난 눈을 껌뻑껌뻑 뜨며 바라보았다. 나라고 ‘다른 누군가와 춤을 추고 싶었나?’라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이안이 마지막 날 춤을 춘다고 말했을 뿐이고, 난 그에게 물었을 뿐이다.

제르펠은 내 팔을 붙잡으며 나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답을 강요하는 제르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난 이내 밝게 웃으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나도 주인이 아니면 싫은걸.”

내 말을 끝으로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디자이너가 움직였다. 눈치 하나는 잘 파악하네. 이야기를 나눌 때는 있는지 없는지 조용히 있다가 이제 자신의 차례가 되자 다가와서 옷을 권해 주었다. 저번에 잰 치수를 토대로 맞춰서 제작한 옷들이었고 오늘은 시착하여 세세한 부분을 조정하는 단계였다.

아무래도 전문가의 세밀한 손길이 필요했기에 제르펠은 잠시 뒤로 물러갔다. 그는 자신에게도 옷을 건네는 고용인을 거절한 후 내가 시중받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고용인들의 눈동자는 떨렸지만 역시 전문가는 전문가. 손은 떨리지 않았고 척척 나에게 옷을 입혀 주었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괜찮아.”

앞에 대령한 전신 거울에 나를 비춰봤다. 괜찮은데? 난 뒤로 돌아 제르펠에게 보여 주었다.

“주인아, 나 어때? 잘 어울려?”

“아름답다.”

“……그, 그래?”

진지한 얼굴로 칭찬하자 부끄러워 그의 시선을 회피했다.

디자이너는 내 복장을 보더니 세심하게 천의 구겨짐 상태, 너무 헐렁하거나 조이지는 않는지 살펴보았고 수정할 부분이 있다면 핀으로 고정하기도 하였다. 한참이나 두 팔을 벌려 있어야 해서 어깨가 뻐근했다. 그것도 한두 벌의 옷이 아니라 더욱 그랬다.

드디어 모든 시착이 끝났다. 지쳐서 의자에 앉았다. 어깨가 뻐근한 감이 있어 주무르면서 어깨를 돌렸다. 뒤에 제르펠이 성큼 다가오더니 말없이 손을 내 어깨에 얹어 힘을 주었다. 제르펠은 딱 뻐근한 부분을 꾹 눌러 주었다. 시원한 느낌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수고 많았다. 여기가 아픈가?”

“주인도 옷 입어 봐야지?”

“나중에 입어도 된다.”

그의 뒤에는 당황해하는 고용인이 보였다. 뒤에 대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뭉친 근육이 풀어지는 느낌에 몸을 맡겼다. 제르펠은 너무 세지도, 그렇다고 너무 약하지도 않은 적당한 힘으로 안마를 해 주었다. 난 입으로 세세한 주문을 넣었고 제르펠은 내 어리광을 다 받아 주었다.

“역시 주인 표 손길이 좋아.”

온몸이 노곤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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