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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생-57화 (57/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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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지금…… 이 순간에!

제르펠의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머리카락 끝이 바싹 설 정도로 차가운 공기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이해는 되었다. 나라도 좋아하는 사람이 웬 나신의 사람과 있으면 놀라겠다!

세드릭도 얼마나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점점 벌어지는 입술이 보였다. 난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거리는 고개를 애써 돌렸다. 그리고 툭 고개를 떨구었다.

우선 눈앞의 일부터 처리해야 했다. 긴장감에 옷을 묶으면서 힘이 잔뜩 들어갔는지 키르는 아프다고 말했지만 내 머리에 인식되지 않았다. 싸늘한 살기가 등줄기를 콕콕 찔렸다. 키르도 살기가 느껴졌는지 옆을 돌아보았다.

“저 인간은 왜 저러지?”

아주 뻔뻔스럽고 태연한 말이었다. 옆에 있던 카사가 뒷걸음질을 했다. 그와 동시에 제르펠이 움직였다. 저벅, 묵직한 발걸음이 느껴졌다.

‘이걸 어쩌냐…….’

사태를 모면하기 위해 난 재빨리 일어나 다가오는 제르펠의 허리에 매달렸다. 그리고 얼굴을 들어 올리며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최대한 애교스럽게.

“주인아, 나 데리러 온 거야?”

“…….”

반응이 없다. 제발…… 그냥 넘어가자…… 딱딱하게 굳은 제르펠의 입매가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손으로 키르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이 사람은 키르인데…….”

“알고 있다.”

다행이다……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횡설수설 설명했다.

“어?? 어……. 그럼, 다행이고…….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고 해서 한번 해 보라니까 이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내가…….”

“슈이렌.”

“어?”

“알고 있다고 하였다.”

“…….”

주절대며 떠들던 내 입을 단호한 그의 말이 끊어 버렸다. 그러고는 제르펠은 다정한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그게 더 불안한 건 나의 착각인가…….

“위험하군.”

키르는 딱 한마디를 하고는 다시 뱀의 형상으로 돌아갔다. 난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자아냈다.

그럼 진작에 돌아가라고!! 기가 막혀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키르가 옷 사이로 유유히 자리를 피했다. 저, 저 영감이…… 너어어는 꼭 죽인다. 속으로 이를 갈며 욕을 퍼부었다.

제르펠의 시선이 유유히 사라지는 키르를 지그시 따라갔다

“하…….”

크고 긴 한숨이었다. 그 한숨에 나는 제르펠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있었고 그의 가슴이 크게 울렁였다. 마치 끓어오는 분노를 참아 내듯 깊게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있었다. 난 눈치를 보며 마른입을 다셨다.

마른세수한 뒤 그의 표정은 무미건조했다. 분노도, 다정함도 담겨 있지 않는…… 말 그대로 무의 표정이었다. 직감했다. 일 났다. 최대한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지만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리는 게 느껴졌다.

바닥을 긁어내릴 듯한 낮은 목소리가 그가 분노를 꾹꾹 억누르고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돌아간다.”

“…….”

난 뒤에 서 있는 세드릭을 향해 살려 줘……. 라는 눈빛으로 봤지만 그는 내 눈빛을 보고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에이든을 궁까지 안내해 주고, 저 뱀은 치워라.”

특히 ‘저 뱀’을 강조했다. 난 입을 합 다물고 좌우로 고개를 돌렸다. 나를 구해 줄 사람은 없었다. 제르펠은 말없이 내 손을 잡아 이끌었다. 어기적어기적 따라가면서 반항을 했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저, 주인아……?”

“조용.”

“넵.”

제르펠은 그 말을 끝으로 나를 방으로 데려갔다.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의 힘에 끌려갔다. 평소에는 적절하게 힘을 조절했던 그였지만 그럴 여유가 없는지 잡은 손목이 아팠다.

“주인아…… 좀 아픈데…….”

그는 내가 아파하자 슬쩍 보고는 바로 손의 힘을 풀었다. 왠지 안심되었다. 그의 뒷모습에서 분노가 전해지는 것 같았지만 상냥하게 감싼 손은 따뜻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제르펠이 기사들에게 말했다.

“열어라. 그리고 내가 나올 때까지, 그 누구도 들이지 마라.”

기사들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서로 눈을 마주쳤지만 상황을 알 리는 없었다. 나를 안쓰럽게 보는 세드릭의 얼굴을 끝으로 문이 닫혔다.

그는 도착하자 손을 풀어 주었다. 난 잡힌 손목을 살짝 돌렸다. 제르펠은 방 안에 도착하자 타이를 확 풀어헤쳤다. 조금 눈치가 보였던 나는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침묵만이 돌았다. 나는 긴장으로 비적 마른 입술을 혀로 죽였다. 그러다 더듬거리며 말했다.

“주인아…… 그게…… 아까는…….”

하지만 내 말에 불쾌한 기억만 되살아났는지 제르펠은 살짝 혀를 차더니 몹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난폭하게 내던진 그의 겉옷은 의자에 착지했다.

그의 격한 행동에 난 몸을 움찔 떨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에 변명도 하지 못하고 침만 삼켰다. 제르펠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난 고개를 숙인 채로 눈치를 살폈다.

‘아니, 자세가 미묘했던 건 인정이야. 근데 고백을 주인이 했지만 난 아직 받아 주지도 않았는데? 내가 이렇게까지 눈치를 봐야 해??’

큰 깨달음에 멍하니 땅바닥만 보다가 불쑥 화가 났다. 생각하니 정말 그렇잖아!

불합리에 속으로 화를 내는 도중 갑자기 침대가 푹 꺼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딘가 나른한 자세로 다가온 제르펠이 내 옆에 손을 짚었다. 뭐, 뭐야? 나는 긴장감으로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점점 그의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좀…… 위험한 듯…….’

위험한 분위기에 몸을 슬쩍 뒤로 뺐다. 그 행동은 제르펠의 손이 내 턱을 잡음으로 무산됐다. 그리고 간지럽게 볼을 쓸었다. 그의 금빛 눈동자에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내 심장도 같이 꿈틀거렸다.

열기에 가득 찬 그의 눈빛은 익숙했다. 툭 하면 나를 이런 눈빛으로 보았다.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하게…….

고백한 그날 이후로 제르펠은 나를 유혹하는 듯의 제스처는 취했지만 내가 넘어갈 듯 넘어가지 않자 더 진도를 나가지는 않았다. 입맞춤도 그때가 전부였다. 민망했던 내가 후다닥 도망가도 딱히 붙잡지 않았다.

그가 지켰던 선을 뛰어넘을 것 같았다. 점차 다가오는 그의 얼굴에 내 심장은 주책맞게 쿵쿵 뛰기 시작했다. 심장아…… 가라앉아라……. 안절부절못하는 나에게 짧은 침묵을 뚫고 제르펠의 말이 들렸다.

“전에 말했지. 너의 몸을 보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고.”

“그, 그랬지.”

“그 반대의 경우를 말하지는 않았구나. 다른 남자의 몸을 보면 안 되지? 응?”

제르펠은 부드럽게 권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몸을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말고, 그 아름다운 눈으로 다른 자의 몸을 눈에 담지도 말아야지.”

제르펠은 나를 팔 사이에 가둔 채로 귓가 옆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귓가에 숨이 닿을 때마다 몸이 움찔거렸다.

“오늘은 사고…….”

쉿. 제르펠은 변명은 듣지 않겠다는 듯이 내 말을 막았다. 긍정의 말을 종용했다.

“대답은?”

“으, 응. 알겠어…….”

“처음이었겠지?”

“……당연하지.”

바로 나오지 않는 대답에 제르펠의 눈이 가늘어졌다. 처음이라는 말에 전 여자친구가 생각났다.

“진짜 처음이야! 정말이라고!”

잘못 말하면 끝장난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번 생에서는 진짜였다. 부드러웠던 제르펠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낮게 가라앉고 있었다. 난 손에 차오르는 땀을 몰래 침대 시트에 닦았다.

“슈이렌…… 혹시…….”

“아니야! 주인밖에 없었어!!”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는 제르펠에 다급하게 고개를 뒤로 빼서 손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그래, 나뿐이면 된다.”

안심하고 질끈 감은 눈을 슬쩍 뜨니 손가락 사이로 보이던 그가 화사한 태양처럼 웃었다. 숨이 턱 막혔다. 한차례 태양처럼 웃은 제르펠의 미소가 아련히 지나갔다.

제르펠은 나를 자신의 품에 꼭 앉더니 내 목에 얼굴을 묻고는 쿡쿡 작게 웃었다. 조금 전에 본 제르펠의 아름다운 미소가 생각나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이러니 내가 안 설레게 생겼냐고……. 붉게 오른 홍조를 손으로 숨겼다.

아무 일…… 없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무사하게 넘어가서 다행이다……. 그런 내 안심을 비웃듯이 제르펠이 속삭였다.

“슈이렌. 정정하도록 하지. 당장 무언가를 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지만 취소하지.”

“무, 뭘 취소해? 뭐 하려고??”

“이번에도 말하지만…… 싫다면 거절하여도 좋다.”

손을 떼자 보이는 건 다가오는 그의 얼굴이었다. 붉게 물든 입술이 다가오자 당혹감에 눈이 살짝 떨렸지만 자연스럽게 눈이 감겼다.

제르펠의 입술이 나의 입술을 덮쳤다. 갈 곳을 잃은 내 손은 그의 옷깃을 꽉 붙잡았다. 맞닿은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제르펠은 상냥하게, 애태우듯 나의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부드럽게 훑어 내렸다.

‘인정하자.’

그의 갑작스러운 고백 이후로 많은 생

각을 했다.

확실히 난 그가, 나에게 하는 행동이 싫지 않았다. 남자의 고백임에도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나 또한 제르펠에게 다소의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무의식으로 브레이크를 걸었다.

남자니까, 황태자니까, 나이가 차이 나니까. 그런데도 끌리고 있는 내가 있었다.

누군가가 왜 제르펠을 좋아해? 라고 묻는다면 그저 그가 좋았다고 대답할 것이다. 제르펠이 나에게 다정하게 눈웃음을 지어 주는 행동도, 유혹하듯 간질거리게 하는 행동도, 든든하게 받쳐 주는 등도, 가끔 보여 주는 귀여운 모습도…… 싫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필요하다며 손을 잡아 오는 그가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물들어 간 것이 아닐까.

난 이것저것 핑계를 붙여 애써 두근거리는 심장을 외면했을 뿐이다. 아니, 진짜 누가 싫어하겠냐고요.

그와 입맞춤을 할 때마다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살짝, 아주 살짝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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