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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생-56화 (56/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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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이 창문을 통해서 집무실로 들어왔다. 바람에 의해 종이가 사뿐히 들썩이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제르펠의 책상 위에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평소와 같이 검토를 했다면 한 무더기를 해치우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바람이 부는 소리와 함께 이안의 한숨 소리가 퍼졌다.

제르펠은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지만 중간중간에 그의 의식은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이안이 나지막이 부르면 제르펠은 정신을 가다듬고 일을 시작한 것처럼 보였으나 움직이지 않는 동공과 만년필로 서류를 톡톡 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집중을 못하는 것이 훤히 보였다.

결국, 중요한 서류에 검은 잉크의 웅덩이가 생겼다. 보다 못한 이안이 제르펠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일에 집중하십시오.”

“…….”

“전하?”

“음…… 그래야지.”

“지금 그게 몇 번째인지 아십니까? 제발 이제는 집중 좀 해 주십시오. 이 많은 서류를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이안, 연애는 해 보았나?”

“……네? 무슨…….”

이안은 갑자기 치고 들어온 질문에 당황했다. 순간 제르펠이 시비를 거는 것인가 착각을 했다. 그의 눈에는 제르펠은 한창 연애를 즐기는 도중이었다. 비스듬하게 입꼬리를 올린 이안은 다소 불량하게 말했다.

“전 일 때문에 연애할 시간이 없습니다.”

“쯧, 그 나이까지 연애도 안 하고 뭐 했나?”

‘이걸…… 황태자라 때릴 수 없고.’

이안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마음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영혼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답이었다.

“그러게요. 왜 그럴까요? 그런데 갑자기 왜 물으십니까?”

“흠…… 슈이렌이 넘어오지 않는다.”

“네?”

이안은 깜짝 놀랐다. 약간 핑크빛 기류가 흐르기에 당연히 연인 사이라고 생각했더니…… 아니었다.

제르펠은 정확히 시계의 초점이 수업 시간 때로 향하면 책상에서 일어났다. 나지막이 수업 시간이군. 하며 옆에서 열심히 말하던 이안을 뻘쭘하게 만든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망연자실하게 떠나는 제르펠의 뒷모습만 보았다.

어느 날은 중요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수업 중이던 방으로 찾아갔었다. 조심스럽게 살짝 들여다보니 수업인지 연애를 하는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이안은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안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지만 웃는다면 그의 눈초리를 받을 게 분명했다. 그만큼 제르펠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심하고 있었다.

제르펠은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첫 입맞춤을 했을 때 슈이렌은 거부감은커녕 볼을 장밋빛으로 물들였다. 싫다고 말하지 않았고, 그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확실했다. 수업을 핑계로 같이 있는 시간이 늘었고 다정하게 대하고 좋은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슈이렌은 딴짓을 하거나 시간이 끝났다며 후다닥 도망갔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귀엽게 보였지만 슬슬 인내심이 끊기고 있었다.

“어째서지…….”

“제가 어찌 압니까?”

제르펠은 궁금한 투로 물었다. 이안이라고 알겠는가? 이안은 불만스럽게 서류를 거칠게 넘기며 말했다. 더는 물어보지 말라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제르펠은 이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해답을 원했다. 어차피 서류가 정리되지 않는다면 고생하는 것은 이안이었다. 얕게 한숨을 쉰 이안은 넘기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얼굴로 밀어붙이세요. 슈이렌 님은 전하의 얼굴을 좋아하시잖아요.”

“이미 하고 있다.”

고민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일의 속도가 날 것 같지 않았다. 이안은 못 쓰게 된 서류를 회수했다. 이안이 아는 슈이렌은 좋고 싫고가 확실했다.

“선물 공세는 어떠신가요? 값비싼 거 좋아하시잖아요?”

“원하는 게 없다고 하더군.”

“……슈이렌 님의 물건이 많긴 하죠.”

이안은 방 하나를 가득 채운 슈이렌의 물건을 떠올렸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짚었다. 제 감정은 눈치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은 제르펠에게 어려운 단어였다.

그가 하는 행동은 최대한 다정하게, 충족하게 해 주는 것이 전부였다. 주위에서 애정을 주는 모습을 어설프게 따라 하는 것뿐이었다. 그 이상 무얼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제르펠은 깊은 고민이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안이 넌지시 말했다.

“하…….”

“물어보시면 그렇겠죠. 깜짝 선물은 어떠십니까? 마음이 담긴 선물은 마음을 흔들리게 합니다.”

이안이 보기에 제르펠의 고민은 사치 같았다. 어디 사는 누가 서로 껴안고 서로 음식을 먹여 주며 같이 자겠는가? 이안이 보기에 연인과 다름없었다. 서로 쌍방인 감정이었지만 본인들만 몰랐다.

‘내 연애도 못 해 봤는데…….’

이안은 최대한 알고 있는 선에서 말했다. 그를 보좌하는 사람이기 전에 인간으로서 연애에 대한 충고였다. 이안은 서러운 감정을 억누르고 말했다.

“그 뒤로 고백했습니까?”

“아니. 기다려 준다고 말했다.”

제르펠은 한 번 확실하게 슈이렌에게 자신의 감정을 말한 뒤 재촉한 적은 없었다. 이안은 제르펠의 생각을 읽었다. 슈이렌 님을 배려한 것이겠지.

“전하. 제가 보았을 때 슈이렌 님이 직접 말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 확신합니다.”

제르펠의 손에서 만년필이 뚝 떨어졌다. 데구루루 굴러가다 잉크통에 부딪혀 멈추었다. 이안의 눈길이 만년필을 따라갔다. 그 소리에 맞춰 제르펠이 책상을 치며 일어났다.

이안의 말에 충격받아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제르펠에게서 스멀스멀 살기가 흘렀다. 그는 이안을 슬쩍 흘겨보았다.

“지금…… 뭐라고?”

이안은 살벌한 제르펠의 기세에 움찔했다. 그는 제르펠이 오해를 하지 않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재빨리 말을 이었다.

“슈이렌 님이 전하를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평소 대하는 태도만 봐도 확실하지 않습니까?”

실제로 그랬다. 슈이렌은 제르펠에게 대하는 태도만 확연하게 달랐다. 제르펠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그렇기에 더 안달이 나는 것이었다.

“그렇지.”

바로 확답이 나왔다. 이안은 그럼 대체 무엇을 고민하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먼저 말하지는 않을 겁니다. 모르는 척하지만, 성격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쪽팔려서, 자존심 상해서, 말 안 할 가능성이 큽니다. 원래 먼저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 지는 겁니다. 눈 딱 감고 밀어붙이세요. 슈이렌 님은 강하게 밀어붙이면 얼떨결에 승낙할 겁니다.”

제르펠은 의자에 다시 기대어 앉았다. 이안은 곁눈질로 은근슬쩍 말을 던졌다.

“순조롭게 되어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렇게 보이나?”

사실 그가 애가 탄 이유가 있었다. 곧 열리는 황궁 연회 때문이었다. 황궁에서 주최하는 연회, 신의 사자의 등장을 축복한다는 연회까지 겸해져 있으니 세간의 관심이 남달랐다.

슈이렌의 등장에 제국은 술렁이고 있었다. 신문은 너 나 할 것 없이 슈이렌에 관한 기사를 내놓았다. 그중에는 귀족 영애에게 슈이렌에 대해 질문을 주고받는 내용이 있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슈이렌을 보는 게 무척이나 기대된다는 말이었다. 그와 결혼을 노리는 영애들도 존재했다. 지라시 수준이었지만 제르펠의 눈이 뒤집어지기는 충분했다.

슈이렌은 연인의 대상으로 남자라는 성별에 거부감이 있어 보였다. 황궁 연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 그들 중 슈이렌의 마음을 사로잡을 영애가 나타날 수 있다. 그렇다고 귀족 영애를 아예 출입하지 못하게 할 수 없었다.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에게도 방심할 수 없었다. 자신같이 슈이렌에게 반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하필 황궁 연회는 결혼 상대를 찾는 장소로 유명했다. 제르펠은 슈이렌에게 다가오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곧 연회가 시작되지 않느냐?”

“아…….”

“연회에서 그의 가치를 보고 달려들 벌레만 생각해도 끔찍하군.”

제르펠은 가상의 적을 향해 열의를 불태웠다. 이안은 정확히 탁자 위에 있던 신문에 시선을 주었다. 제르펠은 신문을 꼬박 챙겨 보았다. 신문은 자유롭게 제 생각을 펼치는 곳이다. 무엇을 맹렬하게 비판을 하는지, 그들의 생각, 세간의 평가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신문에는 슈이렌의 정체와 기대감이 섞인 기사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연회가 멀지 않았으니 글이 더 노골적이었다. 이안의 눈동자에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불안감이었다.

사실 영애들이 가장 노리는 건 제르펠이었다. 그도 만만치 않게 제국을 술렁이게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황태자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 모습을 본 자는 적었다. 제르펠은 궁에 들어오자마자 국정을 돌보았고, 제르펠이 아니꼬웠던 황제가 환영 연회를 열어 주지도 않았다.

영상구에 비친 것은 슈이렌뿐만 아니라 제르펠도 있었다. 그의 뛰어난 외모에 대해서도 말이 퍼지면서 영애들이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함부로 슈이렌에게 접근하는 자는 없어야 한다. 내 말대로 준비되고는 있겠지?”

슈이렌의 호위 기사는 연회 때에는 귀족들을 지키기 위해 경비로 서야 했고 이안은 귀족이 아니기에 참석할 수 없었다. 연회 동안 제르펠이 슈이렌의 곁에 항상 있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네. 같은 디자인 옷을 준비하라고 일렀습니다. 내일 견본을 들고 온다고 합니다. 브로치 또한 제작 중입니다.”

이안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전하께서 제안하고 의미를 설명하지 않았나…….’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는다. 사교 회에서 암묵적으로 연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안은 이미 마음이 통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제르펠은 답답한 표정으로 탁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제르펠의 초조한 모습은 흔하지 않았다. 이안은 저 두드리는 소리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긴 숨을 흘린 이안은 흩어져 있던 서류를 톡톡 치면서 가지런히 모았다.

슈이렌이 호수에 간 사실은 언질을 받아 알고 있었다. 이안은 넌지시 제안을 했다.

“슈이렌 님을 마중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전하께 기분 전환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일은 제가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세드릭 님을 데리고 가시는 것. 잊지 마십시오.”

“그러도록 하지.”

책상에서 일어난 제르펠은 망설임 없이 걸어갔고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안은 이때의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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