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뱀생-53화 (53/103)

-53-

제르펠은 회의로 잠깐 자리를 비우고 나는 그의 집무실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저번에 말한 연회에 대한 회의였다. 제르펠은 금방 끝난다며 내 머리를 쓸어주고 기다리라고 했지만 시계의 분침이 한 바퀴를 돌고…… 두 바퀴를 돌아도 그는 오지 않았다.

“왜 이렇게 안 와?”

투덜거리며 그를 기다리고 있을 때 제르펠이 한숨을 쉬며 들어왔다. 난 반색하며 그에게 달려갔다.

“어? 왔어??”

“황궁 연회 날짜가 정해졌다.”

“그래?”

“큰 행사가 될 것 같구나. 가뭄으로 미루었던 신년제와 함께 연회를 치르게 되었다. 덕분에 모든 귀족이 모여들 거다.”

그는 걱정이 많은 듯했다. 난 그의 가슴을 다독였다.

“왜? 걱정돼? 그냥 먹고 마시는 자리잖아. 그리고 주인이 있는데 누가 날 함부로 해? 나 애초에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니야.”

에헴 하며 나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쳤다. 황제나 황후도 그렇지만 귀족들이 내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다 주인을 힘들게 한 사람들 아닌가.

사실 주인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연회에 꽤 많은 사람이 모여들 것이고 거기서 난 그를 지지한다고 확실하게 말할 생각이다. 아무도 쓸데없는 수작을 부리지 않게. 신의 사자가 그렇다는데 누가 말대꾸를 하겠어? 그러면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는 내가 대견한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잠깐…… 문득, 그의 말에 거슬리는 단어가 있었다.

“모든 귀족?”

“그래.”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모든 귀족??

“아니? 대체 왜?”

신년제가 큰 행사인 것은 안다. 하지만 모든 귀족이라니…… 인파에 깔려 죽을 일 있어? 제르펠은 턱을 문지르더니 말했다.

“그게 관습이라고 하더군. 말이 모든 귀족이지 오지 않는 자도 있다. 너무 신경 쓰지 말아라.”

그도 관습이라는 것이 귀찮은지 작게 혀를 찼다. 황궁에서 오라는 데 안 오고 배겨? 벌써 머리가 다 아파졌다. 좋게 생각하자. 모든 귀족 앞에서 그를 지지해 주는 거야. 생각 외로 스케일이 커지자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르펠은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화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예법을 배워야겠구나.”

“아…….”

맞는 말이다. 귀족은 예의를 중시하고, 작은 실수도 뒷말이 나올 수 있었다. 뭐, 전생의 기억이 있으니 쉽지 않을까?

“물론 네가 싫다면 상관없단다.”

“아니야. 계속 주인 곁에 있을 건데 예법은 알아야지. 열심히 할게!”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너를 무시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넌 가슴을 펴고 있으면 된다. 넌 나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뒤에 신도 있지 않으냐?”

든든한 그의 말을 헤실거리며 듣고 있었다. 믿는다는 뜻으로 그를 포옹했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길에 위를 올려다보니 웃음기 머금은 눈동자가 있었다. 그는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옷을 맞출까?”

“이리 빨리?”

“미리미리 맞출수록 좋지. 맞춤복은 만드는 데 상당히 오래 걸린다. 원하는 자로 불러 주마. 카탈로그를 보고 의상실을 정하도록 하지. 그다음으로…….”

난 열정적인 그의 말에 좀 얼떨떨했다. 어린아이처럼 상기된 것이 눈에 보였다. 나는 어이없는 헛웃음을 몰래 지었다. 그가 고백한 후 나에게 더 잘해 주려고 하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난 알게 모르게 무시했다. 꼬시려 드는 게 훤히 보이는데 거기에 맞장구를 치기에는 왠지 한입에 꿀꺽 삼켜질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휩쓸릴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원하는 게 있다면 다 주마. 라는 말은 딱 봐도 내 환심을 얻기 위한 말이었다. 매번 필요한 게 없다고, 괜찮다고 말한 게 대부분이었다. 옷이나 보석은 처음에 제르펠이 싹 쓸어 사는 바람에 넘쳐났다. 애초에 궁이 풍족하니 따로 필요할 건 없었다.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한 걸까? 물건으로 환심을 사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 연애에 서툴다는 것이 티가 났다. 어차피 연회 복장은 필요하니까. 나야 좋지. 그의 말을 듣고 있으니 의상실 고르는 것부터, 카탈로그를 고르는 것까지. 복잡해 보였다.

“그냥 저번에 봤던 의상실로도 괜찮아. 거기도 괜찮더라.”

“……좋은 데로 고르지 않아도 괜찮겠나?”

“저번에 거기도 주인이 신경 써서 고른 데 아니야? 난 거기가 좋아.”

내 말이 흡족했는지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안에게 말해 두지.”

그의 손길을 받고 있을 때쯤. 문득 든 생각은 내 수업은 누가 해 주냐 하는 것이었다.

“근데 예법은 누구한테 배워? 선생님이 오는 거야?”

“내가 알려 줄 거다.”

“주인이? 선생님으로도 괜찮은데……. 바쁘지 않아?”

난 고개를 돌려 그의 책상 위를 보았다. 여전히 많은 서류 더미가 책상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스케줄이 너무 빡빡해지는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괜히 주인만 더 귀찮게 하는 것 같아서…….”

“슈이렌. 설마 내가 너에게 다른 자가 접근하게 둘 것 같으냐?”

이제는 숨길 생각도 없는지 대놓고 집착을 드러냈다. 꽉 붙잡은 팔이 나를 옭아내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 그의 집착이 귀여워 보였다. 난 미소를 지으며 제르펠을 바라보았다.

“주인이 잘 가르쳐 주는 거야?”

“물론이지.”

제르펠의 눈가가 예쁜 미소를 그려냈다.

* * *

난 제르펠에게 기댄 채로 이안이 뽑아 준 명단을 대충 훑어보고 있었다. 요즘에는 틈틈이 주인에게 수업도 받으며, 키르에게도 수업을 받으며 지내고 있었다.

제르펠과 하는 수업은 말이 수업이지 대부분 같이 차를 마시며 정도였다. 그렇다고 꼭 노는 것만은 아니었다. 걷는 자세, 인사하는 법, 손짓, 시선 처리, 말하는 법 등 배울 것은 많았다.

난 제르펠에게 제일 먼저 귀족의 언변에 대해 알려달라고 했다. 황후를 만나 보고 나니 귀족의 언변이라는 것이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었다. 까딱하면 바보처럼 당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제르펠은 내 말을 듣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그거에 관해서는 딱 한 가지만 명심하면 된다.”

난 손으로 탁자를 붙잡으며 진지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제르펠은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집중해서 듣고 있었는데 그의 말은 나를 휘청거리게 했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돼.”

“그게 끝이야?? 그럼, 주인이 곤란하지 않아?”

나는 몸을 불쑥 그에게 내밀었다. 그래도 노하우라든가 주의해야 할 사항을 말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저번에도 말했지. 눈치를 봐야 할 건 네가 아닌 그들이다.”

제르펠은 나의 걱정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차를 마시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되냐고 말했고, 제르펠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지 너의 뜻대로.”

뭐만 하면 괜찮대…….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아리송한 얼굴로 봐도 그는 변함이 없었다. 나야…… 편하긴 하다만…… 결국 그는 자세만 알려 주었다. 의외로 예법은 쉽지 않았다.

현생의 기억이 있다고 예법에 능통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패션쇼를 본다고 하더라도 모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이게 은근히 까다롭단 말이지. 어설프게 그의 걸음걸이를 흉내 냈지만 쉽지는 않았다.

그중 인사하는 자세가 특히 곤욕이었다. 신분에 따라 인사를 하는 법이 다 틀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신의 사자라서 고개를 숙일 인물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 인물이 황제랑 황후라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꼬투리 하나 잡히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열심히 했다.

허리는 너무 과하지 않게 살짝 숙이면서 손의 위치 발의 위치 등 세세하게 알려 주었다.

‘귀족은 아무나 하는 거 아니야.’

문제가 발생한 것은 여기서부터이다. 처음에는 발 위치였다. 발끝도 어디 보는 게 중요했다. 어이가 없었지만 여기서는 아주 중요하다고 하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다리는 적당하게 오므리고 허리는 꼿꼿하게 세우는 것. 적당히 기준이 대체 뭐야? 제르펠이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대충 따라 하려고 노력했다.

“슈이렌, 허리에 좀 더…….”

“히익! 오, 왜, 왜?”

눈대중으로 따라 하다 보니 세세한 부분에서 차이가 났다. 그런데 제르펠이 갑자기 허리를 잡았다. 갑작스러운 터치에 소름이 돋았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 버렸다. 내가 뒤를 홱 돌아보자 제르펠도 살짝 당황했다.

“놀랐나?”

“뭐 하는 짓이야!”

“교정을…….”

“아…….”

개 쪽팔렸다. 교정하기 위해 제르펠이 몸을 잡은 것뿐이었다. 과잉 반응을 해 버려 다음에는 그러지 말자고 생각했다.

다짐했지만 무색하게 무너졌다. 이번에는 등 쪽을 확 쓸어내린 것이다. 난 펄쩍 뛰었다. 내가 스킨십에 예민한 편이었나? 그건 아닌데…… 제르펠은 내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불퉁하게 확 돌아보자 요사스럽게 입매를 늘어트린 제르펠이 보였다.

“방……금…… 일부러 했지!”

“흠…….”

그는 아닌 척 헛기침했지만 나를 속일 수는 없었지 그의 가슴이 미세하게 울렁이는 것을 보았다. 서로 장난을 치다가 어쩌나 보니 자세를 빨리 터득하게 되었다. 아직 완벽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욕을 먹을 만큼은 아니었다.

언제부터인지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흠흠 거리며 이안이 서 있었다.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수업 시간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의상 카탈로그를 들고 왔습니다.”

상큼하게 웃으며 말하는 이안의 표정에 난 뻘쭘하게 볼을 살살 긁적였다. 그의 표정은 제 감정을 감추기 위한 영업용 미소였다. 제르펠과 한 짓을 다 본 것 같았다. 괜히 미안하네……

제르펠은 그의 말에 따라 다시 집무실에 갔고 나는 탁자에 걸터앉아 이안이 가져온 의상 카탈로그를 보고 있었다.

명색이 신년제에 황궁에서 연회가 개최되는 만큼 주문 제작품을 보고 있었다. 세상에서 단 한 벌인 복장. 제르펠은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고 난 의상을 검토하고 있었다. 사실 내 것 하나만 주문하는 것이었지만 제르펠의 의상도 보고 있었다.

주인은 전혀 꾸미는 거에 관심이 없단 말이지. 옆에 있는 그를 구경하며 어떤 디자인이 좋을지 살펴보고 있었다. 물론, 내 건 이미 정해 두었다. 음, 이게 좋겠다.

“주인아.”

“다 골랐나?”

“이거 어때? 우선 내 거.”

“하나인가?”

하나면 충분하지? 뭐가 더 필요해?

“마음에 드는 게 별로 없었나 보군.”

“아닌데? 이것 중에서 겨우겨우 고른 건데?”

삐뚜름한 미소와 타박하는 듯한 그의 말투를 보아선 잘하면 사람 하나 잡겠다고 생각한 나는 고민했던 옷 디자인을 재빨리 보여 주었다. 디자인을 많이 보내 주어서 고르는 데 고심했다고.

“그것보다 이건 어때? 주인한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옷 아직 안 정했지?”

“……그렇군. 지금쯤 고르고 있을 가능성이 크겠군.”

“그래서 내가 골랐지!”

거봐. 이럴 줄 알았지. 저번 기우제 때도 그는 전혀 옷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안이 들고 온 화려한 옷을 보고 황당해했었다. 이번에도 이안이 알아서 준비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디자인은 마음에 들어? 색은 역시 검은색이나 회색 쪽?”

내가 열심히 디자인마다 좋은 점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에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했다. 제르펠은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 끝으로 비비더니 말했다.

“왜?”

“같은 디자인으로 된 옷을 입을까? 넌 흰색. 난 검은색으로.”

“어……. 같은 디자인?”

같은 디자인으로 입는 것은 좀 과하지 않나 했지만, 확실하게 보여 주면 좋지 라는 생각에 승낙을 했다.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으면 친밀해 보이겠지?

“좋아! 그럼 어떤 디자인으로 할까? 나는 개인적으로 이게 좋은 것 같은데. 약간 문양도 화려하지 않고…….”

나는 내가 골랐던 디자인 중에서 나에게도 제르펠에게 어울릴 만한 디자인을 살펴보았다. 내 허락에 흐뭇하게 미소를 지은 제르펠은 나를 번쩍 들더니 제 무릎에 안착시켰다. 그러고는 본격적으로 제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같은 디자인이라는 게 그리 기쁜가? 의문이 들었지만 우리는 한참을 옷에 관련해서 수다를 떨었다. 만약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미리 알았다면 난 분명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때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