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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생-52화 (5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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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에이든이 찾아왔다. 에이든이 황위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네리아도 알았다. 하지만 에이든은 수업을 잘 듣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제르펠만큼 뛰어난 두각을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수업 진도는 무난하게 따라온다고 했다.

에이든이 아직 어려서, 지금은 황제의 자리 가치를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며 황후는 에이든이 세상을 알면 자연스럽게 욕심이 생길 거라 희망을 품고 있었다.

황위는 당연히 제 자식인 에이든의 것. 그것이 에이든의 권리라고 생각했다.

“에이든 님이 찾아왔습니다.”

“에이든이? 이리로 데리고 오렴. 너는 차를 준비하고.”

네리아는 에이든이 연락도 없이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궁금했다. 소식을 알려온 시녀에게 에이든을 데리고 오라고 명하고 옆에 있는 시녀에게는 차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곧 에이든이 웃는 얼굴로 네리아를 마주했다.

“어머니!”

“에이든 어서 오렴. 건강한 너의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편하구나.”

“어머니가 주신 약 덕분이에요.”

“다행이구나. 우선 앉고 말하자꾸나. 네가 좋아하는 차를 준비했단다.”

네리아는 흐뭇하게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에이든은 냉큼 자리에 앉았고 대기하던 시녀가 에이든의 찻잔에 차를 채워 주었다. 네리아는 에이든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물었다.

“수업에서는 힘든 부분이 없니?”

“네. 괜찮아요! 배우는 건 재미있는걸요.”

네리아는 흡족하게 웃었다. 성과는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열정이 중요했다. 에이든은 한동안 차만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평소의 모습과는 달랐다. 평소라면 이것저것 이야기를 떠들고도 남았겠지만 에이든은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에이든의 안색이 들어왔다. 그녀는 손을 뻗어 에이든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눈에 밑 그늘이 졌구나.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무리는 하지 말렴.”

“네.”

네리아는 에이든의 수척해 보이는 얼굴을 보고 생각했다. 섣부른 재촉 때문에 에이든의 건강이 나빠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이제는 약을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하지 못하니.

“혹시 수업이 많이 힘드니?”

유모는 욕심 때문에 에이든의 스케줄을 수업으로 빡빡하게 채웠다. 네리아도 수업을 하는 것에는 반대를 하지 않았고, 에이든도 의욕이 있었기에 문제가 없었다. 유모도 곁을 떠났으니 힘들겠지. 적당한 휴식도 필요하겠어. 네리아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건 네리아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아, 아니요. 수업은 괜찮아요. 오히려 재미있는걸요.”

“그러니? 그럼 찾아온 이유가 뭐니?”

네리아의 재촉에 에이든은 크게 침을 삼켰다. 주춤 눈치를 보던 에이든이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에이든은 힐끗 네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자상하게 에이든을 달랬다. 계속 고민하는 에이든의 표정에 요즘 큰일이 있었나? 라고 생각했다.

“말해 보세요. 어미가 들어주겠습니다.”

“화내지 말고 들어주세요.”

에이든은 단호한 눈초리로 똑바로 네리아를 보았다. 방금까지 주춤거리던 아이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는 약간 의아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이번 사건으로 깨달았어요. 전 이제껏 제 의견을 제대로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을요. 항상 말해도 어물쩍거리며 말했어요. 그게…… 유모가 떠나 버린 이유라고 생각해요…….”

에이든은 알고 있었다. 유모의 방을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었을 리가 없었고, 그저 모른 척했을 뿐이다. 자신에게는 자상한 사람이었고, 그녀를 잃기는 두려웠다.

에이든은 땀이 차는지 연신 바지에 손을 닦았다. 네리아의 미간이 좀 좁혀졌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에이든의 이야기를 들었다.

“제가 상처받는 게 싫어서 유모가 그러는 걸 알아도 내심 모르는 척했어요……. 그래서 항상 고민했던 말을 어머니에게 똑바로 전하고 싶어서요.”

에이든은 네리아에게 자신의 다짐을 이야기하러 온 것이었다. 에이든의 결심은 확고했다.

“전 황위를 물려받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네리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에이든은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그녀가 에이든의 말을 달갑게 여길 리가 없었다. 네리아는 입을 살짝 벌렸다가 이내 이를 악물었다. 에이든이 쳐다보는 게 느꼈지만 표정 관리가 어려웠다. 네리아는 답답한 마음에 손이 떨렸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려서 웃는 낯으로 말했다.

“유모의 추방으로 많이 힘들었니? 어미가 미리 알아보지 못해 미안하구나. 그럴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다녀야지.”

네리아는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부드러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아버지의 자리는 당연히 너의 것이다. 황제가 되면 좋은 점이 얼마나 많은데. 이 제국의 주인이 너란다. 아무도 너를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지. 이 제국의 권위자가 되는 거란다.”

네리아의 말에도 에이든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에이든은 슬펐다. 제 뜻을 진지하게 말했는데도 황후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아서, 에이든은 목울대가 울렁일 정도로 크게 침을 삼켰다. 그리고 에이든은 용기를 내고 다시 한번 더 말했다.

에이든은 황후에게 자신의 다짐을 이야기하러 온 것이었다. 에이든은 홀짝이던 차를 내려놓고 바지를 움켜쥐었다.

“어머니 저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

이전에도 황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말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칭얼거리면서 말했다. 지금은 굽힐 생각이 전혀 없는 결심이 담긴 눈동자로 말하고 있었다.

네리아가 애써 올렸던 입꼬리가 내려갔다. 에이든은 네리아의 표정에 흠칫했지만 꿋꿋하게 말을 이어 갔다. 떨리지 않는 목소리가 그의 결심을 보여 주었다.

“저는 형님이 황제가 되면 좋겠다고…….”

찰싹.

그 소리에 모두가 움찔했다. 황후는 말하던 에이든은 입을 강제로 다물게 하였다. 시녀들은 조마조마하는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하지만 함부로 나설 수도 없었다. 그만큼 궁내에서 황후의 권력은 막강했다. 그것이 설령 에이든의 일이라도.

제국의 일인자인 황제가 황후 편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알았다. 황제는 황후의 허수아비라며 비꼬는 자도 있을 정도였다. 네리아는 제르펠에 대한 이야기라면 상대가 누구든. 심지어 황제에게도 무섭도록 차가워졌다.

네리아는 분을 참을 수 없었다. 에이든의 말은 치기 어린 마음에서 그런 거라고 넘어갈 수가 있었다. 그런데 제르펠의 이야기는 넘어갈 수가 없었다. 제르펠은 현재 승승장구 중이었다. 기우제를 성공하고 백성에게도 귀족들에게서도 좋은 평을 받고 있었다. 베르트 공작까지 섭외하면서 더욱 그랬다.

그런데 에이든이 제르펠이 황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이다. 네리아는 숨이 턱 막히게 찾아온 분노를 감당하지 못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

에이든은 아무 말이 없었다.

“대체…… 왜…… 너는 그리 마음이 약한 것이야!”

이전의 반복이었다. 에이든의 미소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역시 아니었구나…… 네리아의 얼굴은 굳어갔지만 계속 제 말을 듣는 것을 보고는 본심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며 에이든은 기대하고 있었다.

한 점 남았던 기대가 와장창 처참하게 무너졌다. 네리아는 에이든의 어깨를 꽉 잡았고, 그녀의 손톱이 아프게 어깨를 파고들었다. 에이든은 네리아의 힘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안 그래도 힘든 상황에 너까지 힘들게 하는 것이냐? 네가 황제가 되어야 어미의 마음이 놓이지 않겠느냐? 넌 왜! 황제가 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니? 황제가 어떤 자리인데!!”

네리아는 독이 잔뜩 오른 표정으로 말했다. 앙칼진 목소리가 방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숨이 찼던 네리아는 헉헉대며 에이든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에이든의 표정에서 아무런 감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네리아는 충격을 받아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어머니를 위해서요?”

에이든은 단조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네리아는 입만 벙긋거렸다. 이내 차분하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힘을 꽉 주던 손을 풀고 제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나와 너를 위해서란다. 나중에 제르펠이 황제가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니? 제르펠이 넌 방해가 된다며 쫓아낼 수도. 죽일 수도 있다. 나는 유폐가 될 가능성이 크겠지.”

“형님은 그럴 분이 아니에요.”

“그건 아무도 모른다. 긴 역사가 말해 주고 있지. 제르펠의 어미도 가소롭게 황비의 자리를 넙죽 받더니 황궁에서 유유히 살고 있다. 그 어미에 그 자식이라고 제르펠이라고 다를지 누가 아느냐?”

“……황비 마마를 들이신 건 아버지였잖아요. 왜 엄한 사람에게 화를 내세요?”

“…….”

네리아는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 말 없는 황후를 대신해서 시녀가 살며시 끼어들었다.

“저하. 그건 폐하께서도 원치 않은 일이시었습니다. 귀족들의 성화에 이기지 못하고…….”

“형님과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네요?”

네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는 에이든의 모습에 치가 떨렸다.

에이든은 수업을 받고 지식이 생기고 많은 이야기를 학자와 주고받으면서 자신의 상황과 제국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알게 되었다. 절대 학자는 누구의 탓이다. 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했다. 에이든은 이제 주변의 말에만 흔들리는 아이가 아니었다. 자신의 귀로 듣고 진실을 파악하고 결단을 내릴 줄 알았다.

네리아는 또박또박 대꾸하는 에이든을 보기가 싫었다. 옆에 있는 유모에게 에이든을 어떻게 관리를 하냐며 추궁하기 시작했다. 에이든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것은 그 방에 있는 누구도 몰랐다.

다들 황후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뒤늦게 안 황후와 시녀들이 에이든을 찾기 위해 호수로 갔다가 슈이렌을 보고 티타임을 제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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