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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생-51화 (5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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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카사가 제 일을 잘했는지 제르펠이 도착했다. 이러시면 안 된다는 말과 함께 문이 벌컥 열리며 제르펠이 들어왔다. 내가 고개를 돌려 반기기도 전에 뒤로 다가온 그는 내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더니 의자에서 나를 불쑥 들어 올렸다. 제르펠의 돌발행동에 놀란 난 벙쪄 있었다.

“엥?”

난 눈을 빠르게 깜빡였고, 볼썽사나운 내 모습이 절로 상상됐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네리아에게 나는 뒷전인지 제르펠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태자. 여기에는 무슨 일이죠? 황후궁으로 발걸음을 옮긴 적이 드물지 않습니까?”

“제 사람이 여기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찾아온 것뿐입니다.”

이 상태로 이야기한다고? 위에서 짜릿한 스파크가 튀었다. 네리아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군요.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것 같네요. 가끔은 어미의 문안도 와 주세요.”

말속에 가시가 박혀 있었다. 난 위를 올려다보았다. 나와 있을 때에는 어딘가 풀려 있던 제르펠의 날카로운 눈매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심지어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강렬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아 참. 태자께서도 차를 한잔하시겠습니까?”

네리아는 시녀에게 손짓했다. 어느새 내 옆의 시녀는 새 찻잔을 올리더니 차를 따랐다. 향기로운 차 향기가 퍼졌다. 제르펠은 탁자 위의 차와 다과에 시선을 주더니 삐뚜름하게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권유는 감사하지만 국정의 일이 많이 바쁜 관계로 어려울 듯합니다.”

“…… 폐하께서도 참. 태자에게 너무 큰 짐을 주는 것 같아 미안하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너무 큰 짐은 서로 나누어 드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오히려 이 기회를 발판 삼아 성장하라는 폐하의 큰 뜻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음…… 끝에는 약간 황제에게 아부하지만. 그거지? 황제에게는 너무 큰 짐이라는 거? 황후도 그의 말을 이해했는지 대번에 눈빛이 사나워졌다. 제르펠에게 어미라는 말을 한 사람이 맞아? 제르펠은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나를 제 옆으로 잡아끌었다.

“더는 하실 말씀이 없다면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제르펠은 고개를 숙이고 바로 등을 돌렸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그와 같이 걸었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낯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황후궁에서 점점 멀어지자 걸음 속도가 늦춰졌다. 그는 깔끔하게 손질된 머리를 사정없이 헝클어 놓았다. 제르펠은 나를 야단치듯 혀를 차며 말했다.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왜 무턱대고 황후를 따라간 것이냐?”

“무슨 꿍꿍이인지 궁금해서…….”

“큰일이 있었던 뒤 얼마 되지 않았으니 더 조심해야지.”

사납게 쏘아대는 말투였지만 그의 만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기에 입만 삐쭉거렸다. 그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카사에게 네가 황후궁에 갔다고 들었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앞으로 외출 금지다.”

입을 떡 벌렸다. 그가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했다면 저번과 같이 방 안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갈 가능성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인기척을 살피던 그가 내 귓가에 속닥이듯 말했다.

“…… 우선 궁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하지. 여기는 보는 자들이 많다.”

난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삐졌다는 태도를 보였지만 그는 눈 하나 꿈쩍 안 했다. 툴툴거리면 달래줄 만도 한데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아서 더 못마땅해졌다.

방에 도착하자 난 침대에 걸터앉아 보란 듯이 고개를 팩 돌렸다. 아니, 나도 안 가려 했어. 그런데 계속 사정사정하니까 어쩔 수 없이 간 거 아니야! 주인 때문에 간 것도 있는데…… 제르펠은 픽하고 김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어떻게 그 작은 시간에 사고를 치느냐.”

“그냥 차만 마신 것뿐이잖아.”

“단둘이서 차를 마신다는 뜻이 무엇인지 아느냐?”

“……모르는데. 혹시…… 문제 있어?”

난 한쪽 눈을 게슴츠레 떴다. 딱딱하게 굳었던 그의 눈매가 풀려 있었다. 그의 표정은 이걸 어찌해야 하는 표정이었다. 설마 큰 뜻이 있나?

“광범위하게는 친분을 다지기 위한 의미도 있다. 특히 황후와 차를 마시게 된다는 것은 당신과 뜻을 함께한다는 의미로 비추어질 수도 있다. 심지어 차 종류도 문제였지. 황궁에서만 접할 수 있는 차라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귀족들이 충분히 오해하기 좋은 상황이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가 그리 말했다. 제르펠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내 사람에게 주는 차라는 뜻도 담겨 있다.”

“아니? 왜??”

“그만큼 귀중한 차라는 뜻이다.”

나는 화들짝 놀라면서 대답했다. 고작 차에 그런 깊은 뜻이? 내 입맛에는 전혀 맞지도 않았는데 무슨…… 티타임이 그런 뜻으로 해석된다고?

“나 전혀 몰랐는데!”

“나도 안다. 황후도 네가 그럴 의도가 없다는 걸 알고 있겠지. 하지만 가십을 좋아하는 귀족들의 눈에는 다르다. 아니, 아니라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떠들어대는 것이 귀족이다.”

“왜 나한테 그런 중요한 차를 대접한 거야!”

“그만큼 귀족들이 너에게 많은 관심이 있다는 증거지.”

괜히 혼자서 나댄 것 같아서 많이 미안해졌다. 침울한 나를 제르펠이 부드럽게 달래 주었다.

“넌 내 궁에서 머물고 있지 않으냐. 금방 사그라들 소문이다. 하지만 현재 황후와 내가 대립하는 상황이니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가 있지. 이해해 주렴. 카사에게 듣기론 에이든과 있다가 우연히 만났다고 했지?”

“응…….”

“한순간의 판단이었을 거다. 너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도 가지고 싶었을 테지. 황궁은 연회를 개최할지 말지로 떠들썩하다. 너의 존재로 점점 연회를 개최하자는 쪽이 우세하게 되었으니 나에게 붙을 귀족을 조금이라도 견제하고 싶었을 테지. 그러니 한동안 방 안에 있자. 응?”

“하지만…….”

“……문제라도 있나?”

“…….”

그는 눈썹을 삐뚜름하게 치켜세웠다. 내가 주춤거리며 말을 하지 않자 그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이거, 에이든 이야기를 해? 말아? 그의 말을 들으니 말하기 껄끄러웠다. 그의 입장이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나로 인해서 제르펠의 입장이 좋아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황후는 이를 조금이라도 견제하고 싶었다는 말이.

하지만 나는 에이든을 지켜보아야 했다. 에이든이 황후의 자식인 게 걸렸다. 설마 내가 에이든을 지지한다든가 그런 말이 도는 거 아니겠지? 내가 볼을 긁적이며 시선을 피하자 그는 내 턱을 잡아 들게 했다. 바라본 그의 낯이 매섭게 나를 질타했다.

“싫은가?”

한편으로는 어딘가 기가 죽어 보였다. 낮게 가라앉은 제르펠의 목소리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단지…… 에이든이랑 보기로 약속했거든. 있잖아. 사실은 오늘 에이든을 보았는데…….”

오늘 에이든을 만났던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숲에서 있었던 일을 그에게 말한다는 것을 깜빡했었다. 그동안 머릿속에 그의 고백이 맴돌았기에 까마득히 잊어버렸었다. 난 저번에 목격한 것과 오늘 목격한 것을 그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내가 저번에 수신의 호수에 찾아간 건 알지? 거기서 뱀들을 누군가가 죽이고 있었는데…….”

무거운 마음에 차마 말을 잊지 못해 아랫입술만 깨물었다.

“슈이렌.”

“응?”

“카사에게 보고는 들었다.”

“어……? 알고 있었어?”

“그래, 그러니 입술 깨물지 마라. 피가 나지 않느냐.”

제르펠이 손으로 내 아랫입술을 만지면서 말렸다. 하지만 그의 손가락에 피가 묻어나지는 않았다.

“피 안 나거든…….”

“혹여 나면 어찌하느냐.”

미세한 미소를 짓는 그의 표정과 걱정에 내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건 그렇고, 카사 이 자식 아예 술술 다 털어놨나? 아니…… 뭐, 말해야 하는 부분이기는 한데…….

“오늘 이야기는 들었어?”

“황후궁에 갔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음…… 그니까 키르가 에이든이 오래 살지 못할 거래…… 몸이 좋아진 건 일시적이고 나중에는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몸이 죽는대. 내가 그…… 뱀들의 원한을 빼낼 수는 없어? 라고 물어보니까. 에이든의 몸이 너무 약해서 빼다가 잘못될 거래…… 그래서 내가 옆에서 봐줘야 할 것 같아.”

“에이든이 말이지…….”

내 비통함이 느껴졌을까. 그의 목소리는 길게 늘어지고 있었다. 제르펠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그를 올려다보았을 때는 이미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감고 생각하던 제르펠은 눈을 살며시 뜨고는 긴 침묵 끝에 말했다.

“알겠다. 하지만 호수뿐이다. 다른 곳은 안 돼.”

제르펠이 한 수 물러났다. 난 알겠다고 힘차게 말했다. 에이든의 상태가 어떻게 바뀌는지 내 눈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방법이 없다고 두 손을 놓고 있다면 확실하게 에이든은 죽을 것이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다시 한번 키르와 이야기를 나눠야지……

난 그의 허리를 꼭 안았다. 순간, 이마에 촉촉한 무언가가 맞닿고는 떨어졌다. 위를 올려다보니 제르펠이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의 두 손이 내 두 볼을 감쌌다. 나를 달래듯이.

“너무 마음고생 하지 말고.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

멍하게 그를 보았다. 말하는 제르펠의 눈매가 찡그려졌다. 부끄러운 마음에 다소 퉁명스럽게 말이 나갔다.

“물가에 내놓은 아이도 아니고…….”

“그만큼 걱정이 된다는 것이다.”

“주인이야말로 아프지 마.”

“그리고…….”

난 말을 길게 늘어뜨리는 제르펠을 쳐다봤다.

“에이든을 잘 부탁한다.”

그의 말에 왠지 웃음이 나왔다. 에이든을 걱정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고, 나를 믿어 주는 것 같아 괜스레 뿌듯했다. 난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에이든은 나한테 맡겨.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까. 주인은 일에만 집중해. 빨리 황제가 돼야지!”

“……고맙구나.”

제르펠은 내 콧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 * *

그들이 떠난 응접실에는 싸한 기운이 감돌았다. 시녀들은 곧 일어날 일을 직감했는지 숨을 죽였다. 쨍그랑하는 소리가 울렸다. 조신하게 앉아 있던 네리아는 벌떡 일어나서 테이블을 엎어 버렸다.

“참으로 맹랑하구나…… 교황이 괜히 그리 말한 것이 아니야…… 주제도 모르고 날뛰다니…….”

기선 제압을 한 것은 네리아였다. 하지만 슈이렌은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맞받아치는 태도가 그녀를 질색하게 했다. 황후가 된 이후로 그 누구도 그녀의 말에 거역하는 사람은 없었다.

안 그래도 제르펠의 암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분노가 이글이글 끓어올랐다. 그 당사자인 제르펠이 네리아의 심기를 살살 긁었다. 그녀는 제르펠이 궁에 돌아온 뒤 일부러 그와 만남을 피했다.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더는 어리지 않다는 말인가.”

제르펠의 얼굴을 볼 때마다 네리아는 왜 자신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지 자책했다. 그리고 뻔뻔하게 황비로 들어온 제 어미를 똑 닮은 것이 분노를 치밀어 오르게 했다. 황비는 주제를 알아서 구석진 궁에 처박혀 있지만 제르펠은 황태자라는 명목으로 좋은 궁을 하사받았고, 그에 대한 학자들의 칭찬이 끊이질 않았다.

제르펠이 못마땅했던 황후는 어릴 적 문안을 핑계로 사사건건 괴롭혔다. 제르펠은 황태자로서, 황후의 부름에 꼬박꼬박 답을 해야 했다. 제르펠의 주변 시녀, 시종들도 황후의 눈치를 보았기에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제르펠이 처음 문안을 왔을 때 네리아는 말했다.

“내 너의 친어미는 아니지만 제국의 국모로서 너를 애정을 가지고 대해 주마.”

네리아는 그리 말했지만 자상한 표정과는 다르게 속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내가 몸이 좋지 않아 네가 온 줄도 몰랐구나. 너를 들이지 않는 시녀들을 따끔하게 혼을 내주마.”

시시콜콜 제르펠을 불러서 수업을 받지 못하도록 수를 썼고, 일부러 궁에 들어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뻔히 궁 밖에 그가 서 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제르펠의 문제로 황제에게 화를 내기도 수십 번이었다. 조금이라도 잘해 주는 시녀나 시종이 있으면 황후의 권한으로 그들을 잘라 버렸다. 황비가 제르펠의 궁에 손을 놓고 있으니 일어난 사태였다.

제르펠은 어렸기에 시녀 장이 제르펠의 궁에 대한 인사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유모는 처음부터 없었고 시녀 장과 황후는 한패였다. 즉 시녀 장의 말이 곧 황후의 말이었다. 그녀는 계산적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그러나 제르펠이 내면적으로는 결핍되게 만들었다.

“만난 적도 없는 그놈을 왜 그리 따르는 건지…… 내 아이지만 이해할 수가 없구나.”

제르펠이 전쟁을 떠났을 때 에이든은 아기나 마찬가지였다. 에이든이 제르펠에게 관심을 가질 만한, 좋은 인상을 받을 만한 모든 요인을 제거했다.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그녀는 에이든에게 손찌검을 한 이유를 떠올랐다. 그건 제르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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