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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생-29화 (29/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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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해가 뜨지도 않아 시종, 시녀들조차 아직 일어나지 않을 시간이었다. 창문 밖에는 불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제르펠은 언제나 일찍 눈을 떴다. 일어나자마자 어둠 속에서 그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입었고, 허리에 검을 메었다. 침대 위에는 머리카락을 흩트려 놓은 채로 잠들어 있는 슈이렌이 있었다. 그는 색색거리며 세상 편안하게 자고 있었다. 하지만 옆에 있어야 할 온기가 사라지자 침대 시트 위를 손으로 휘적거리며 있어야 할 존재를 찾고 있었다.

제 손에 집히는 무언가가 없다는 걸 알았는지 슈이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모습에 제르펠은 잇새로 작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르펠은 자신이 베고 있었던 베개를 슈이렌에게 주었다. 그러자 베개를 두 다리로 가지 못하게 꽉 붙잡더니 만족한 얼굴로 다시 색색거리며 잠들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항상 이 시간에 일어났다. 해가 뜬 지 한참 지나야 일어나는 슈이렌과는 생활 패턴이 달랐다. 하지만 제르펠은 아침 운동을 갔다 온 뒤 다시 슈이렌 옆에 누워 그의 온기를 나누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기 버거워하는 슈이렌의 칭얼거림을 달래며 깨우는 것도 그의 즐거움이었다.

그 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다 제르펠은 손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아무도 없던 공간에 어느새 카사가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카사. 잘 지키고 있어라.”

“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제르펠의 명을 받았다. 제르펠은 카사에게 슈이렌을 맡기고 문밖으로 나섰다. 걸어가던 도중 반대편에서 세드릭이 걸어오고 있었다.

“오늘도 빠르시군요. 제가 갈 때까지 기다리시라고 언제나…….”

“네가 느리게 오는 거다. 가자.”

“어쩔 수가 없네요.”

세드릭은 자신이 마중 가기도 전에 나온 제르펠을 보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세드릭은 이 시간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연무장에서 수련하는 제르펠을 보며 대견해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도 전쟁 때의 버릇을 못 고쳤다며 씁쓸해지기도 했다. 그에게는 7년은 긴 시간이었고, 그동안 계속해 온 습관이 쉽게 사라질 리가 없었다.

이제는 짐을 내려놓고 편해질 만도 한데……

물론 적당한 수련은 괜찮다. 하지만 제르펠은 매서운 바람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과도하게 검을 휘둘렸다. 옆에서 쉬시라고 말을 올려도 눈 하나 꼼짝하지 않았다. 황궁에 오고 와서도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졌다. 그의 검에는 잡다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이, 조급하다는 듯이.

이러니 이안의 잔소리가 끊이질 않지. 전하를 말리라고 이야기하지만, 그의 고집을 누가 막겠는가. 생각해 보니 막을 사람이 딱 한 명 생기긴 했다. 세드릭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마음 한쪽 구석의 짐이 좀 덜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그분이라면 전하를 맡길 수 있지. 전하께서 웃음이 잦아진 이유도 다 그분 덕이 아닌가.

오늘도 변함없을 거라는 생각과 다르게 검이 똑바로 반듯하게 휘둘려졌다. 흠잡을 대가 없는 자세였다. 평소에도 자세는 흔들림이 없었지만, 항상 조급함이 느껴졌던 지난날들의 검과는 사뭇 달랐다. 전하께 무언가 좋은 일이 있었나? 세드릭은 의아하게 수련하는 제르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빛이 느껴졌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해가 조금씩 보이며 여명이 올라오고 있었다. 천천히 올라온 해는 순식간에 주위를 환하게 비추었다.

“이제 그만 하시죠. 전하.”

“그러지.”

그의 말에 세드릭은 깜짝 놀랐다. 보통은 두세 번 권해야 겨우 그만두는 일이 대다수였다. 너무 심한 날에는 부러 슈이렌을 들먹일 때도 있었다. 역시 오늘은 다르다. 사뭇 다른 제르펠의 반응에 세드릭의 의심은 더욱 커졌다. 그는 의아함을 가지고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항상 제 말을 듣지 않으셨던 분이.”

“그랬던가?”

제르펠은 휘두르는 것을 그만두고 검을 손질했다. 세드릭은 그 행동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고집스럽게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은 누구인가. 그동안은 세드릭이 말려도 슬쩍 바라보고는 다시 검을 휘두르기 일쑤였다. 방해하지 말라는 듯이. 세드릭의 시야에 제르펠의 눈매가 보였다. 손질하고 있는 제르펠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슈이렌 님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휘어지지 않던 눈매가…… 세드릭은 확신했다. 이번에도 슈이렌 님이 전하를 바꾸었구나.

항상 전하 주위에는 날카로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특히 검을 들고 있을 때는 더욱. 귀족들을 처단해도, 기우제를 성공적으로 마쳐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날카로워진 것은 기우제 후였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봐오던 전하는 언제나 조급했다. 말하지는 못하지만 조급했던 이유는 ‘살아남는 것’ 때문이라 생각한다.

“슈이렌 님과 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제르펠은 어제 일이 생각나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세드릭이 응시하는 제르펠은 정말 기뻐 보였다. 어느새 다 올라온 해는 제르펠의 옆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제르펠의 흑발이 바람결에 따라 흩날렸다. 태양처럼 웃고 있는 그가 눈앞에 서 있었다.

“슈이렌이 그러더군. 너무 혼자 짊어지지 말라고, 담아 두지도 말라고. 참 기특해.”

“하…….”

세드릭은 그 말에 헛웃음만 나왔다. 자신들이 몇 번이고 하던 이야기였다. 이안이 입버릇처럼 달고 있었던 말이었다. 이안이 들었다면 불같이 성질을 낼 게 분명하다. 그만큼 전하께 슈이렌 님이 특별하다는 거겠지만. 검을 잡고 있는 중에도 부드럽게 풀어지는 전하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제르펠의 주위에는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누구 말하느냐에 따라 말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게 이 경우를 뜻하는 게 아닐까.

“……그러니 어딜 내놓을 수가 있나.”

대놓고 드러내는 독점욕에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제르펠의 눈동자에는 기이한 열기가 돌고 있었다. 애정 공세가 쌍방인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슈이렌이 떠났다고 했을 때 어떤 행동을 보이질 훤했다. 제르펠과 슈이렌의 서로를 위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놓였다.

‘그런 의미에서 다행이군.’

* * *

제르펠은 수련을 마친 후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방 안에는 색색거리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제르펠은 손짓으로 카사에게 물러가라고 했다. 그는 조용히 방 안에서 사라졌다.

제르펠은 침대 이불을 들어 슈이렌 옆으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슈이렌이 안고 있던 베개를 빼앗았다. 그러자 슈이렌이 다시 손을 휘적거렸다. 제르펠이 살며시 그 손을 잡았고 슈이렌은 그 온기에 매달려 왔다.

제르펠은 품 안에 쏙 들어와 만족한 듯이 얼굴을 비비는 슈이렌을 응시했다. 슈이렌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쓱 넘겨주었다. 슈이렌과 마찬가지로 제르펠도 한 손으로는 허리를 끌어당겨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향기에 취해 있던 제르펠은 슬며시 슈이렌의 머리카락을 처음부터 끝까지 손가락으로 쓸어 주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은빛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슈이렌의 머리카락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매일 오일을 꼬박꼬박 바른 보람이 느껴졌다. 이 반짝이는 은발을 보고 있으면 자그마했던 슈이렌이 생각났다.

“으…… 햇빛.”

감은 눈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는 게 느껴졌는지 더욱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침이다. 슈이렌 일어나야지.”

“5분만…….”

자상한 목소리로 슈이렌을 불렸다. 웅얼웅얼하는 소리가 들린다. 저 말은 절대 지켜지지 않았다. 제르펠 또한 딱히 깨우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 온기를 오랫동안 느끼고 싶을 뿐이었다.

똑. 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안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옷가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전하, 오늘은 바쁩니다. 잊으셨습니까?”

“드디어 오늘인가.”

제르펠은 일어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본능을 억누르며 자는 슈이렌의 얼굴을 쓸어 주고는 침대 속에서 벗어났다. 슈이렌이 감기에 걸리지 않게 꼼꼼히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이안이 들고 온 옷을 입었다.

“자료는?”

“이미 집무실에 놓아두었습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여자가 눈이나 꿈쩍할 것 같으냐?”

“그 말이 아닌 걸 아시잖습니까.”

제르펠은 뒤에서 기다리는 이안을 슬쩍 쳐다보고 말했다.

“괜찮다. 그 애도 언제까지 어린애가 아니야.”

“10살이면 충분히 어린 나이라고 생각합니다.”

“황자로서의 10살은 달라. 이제 새장을 박차고 나올 때가 된 거지. 앞으로는 힘든 고난이 있을 것이다.”

슈이렌은 아직도 일어날 생각이 없는지 입을 오물오물하며 단잠에 빠져 있었다.

“오늘 머리를 못 빗겨주어 미안하구나.”

제르펠은 슈이렌의 이마를 쓸어내리고는 짧은 입맞춤을 하고 떼었다.

빨리 포기하면 나을 것을……

황제와 황후는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포기를 하지 않으니 이쯤 되면 정말 에이든을 위해 황위를 넘겨주려고 하는 건지도 의심되었다. 그렇기에 제르펠은 더욱더 황위를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에이든에게 황위를 주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짓은 제르펠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황제는 애초에 제르펠을 마음에 들지 않아 했었다. 황후에 대한 황제의 사랑은 지극했지만 후계자가 없는 것은 큰일이었다. 결국, 귀족들의 주장으로 들인 황비에서 하룻밤 만에 생긴 아기가 제르펠이었고, 오로지 후계자로서 대했다. 그런데 에이든이 태어나자 황제는 어린 제르펠에게 대놓고 “넌 필요 없다”라고 매몰차게 말했다.

황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제르펠을 볼 때면 얼굴이 찌푸려지며 살기를 뿜기도 했다. 그에게 화풀이를 하기도 했다. 너와 네 어미 때문에 하나뿐인 국모도, 황위를 이을 후계자의 어머니도 아니게 되었다면서. 어머니는 언제나 멀리서 바라볼 뿐이었다. 심지어 틈틈이 독살의 위협도 있었다. 말이 후계자였지 그들의 노골적인 태도에 사람들은 제르펠을 멀리했다. 제르펠은 보란 듯이 어렵다는 수업도 꿋꿋이 해냈다. 장래성이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결국 에이든이 태어나자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랬던 그들이 순순히 그를 보내 주었을까? 제르펠은 그들의 이중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지금도 제르펠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상태였다.

자신은 살기 위해서 황제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썩어빠진 제국을 바꾸어야 했다. 죽어갔던 많은 목숨을 위해서라도.

제르펠도 에이든이 신경이 안 쓰이는 것은 아니었다. 에이든은 피해자인 걸 누가 모를까. 희생은 어디에나 존재했다.

에이든은 수업을 듣고 있지만 정치, 경제, 군주학 보다는 전술, 전략 쪽에 더 관심이 많다고 했다. 거기에 검술 연습까지. 제 뒤를 따라오려고 하는 게 느껴졌다. 뒤를 졸졸 따라오려고 하는 자세가 슈이렌을 떠오르게 했다.

“에이든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 거다. 거기에 슈이렌이 있으니 괜찮겠지.”

슈이렌은 에이든이 마음에 들었는지 눈치 보며 슬쩍 에이든의 말을 꺼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에이든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조금 거슬릴 때도 있었다.

“그럼. 다녀오마.”

“으……. 응.”

제르펠의 말에 무의식으로 슈이렌이 대답했다. 작게 미소를 지은 그는 편히 잘 수 있도록 커튼을 쳐주었다. 햇빛이 슈이렌을 보지 못하도록.

“오늘은 소란스러운 날이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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