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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생-28화 (28/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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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어이가 없어서. 우리 주인보다 나은 게 하나 없으면서 날 꼬시려고 하다니. 기가 차서.”

대체 어디서 나온 용기야?

투덜거리며 제르펠의 집무실로 향했다. 이번 성과를 보여 주고, 방금 있었던 일을 말해 주기 위해서였다. 길을 비켜라! 집무실 문 앞에 선 나는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 앞에 서 있던 기사들은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카사는 문에 서 있던 기사 옆에 따라 섰다. 이안은 문 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주인아! 나 왔어.”

제르펠은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이안의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제르펠은 더는 서류를 볼 생각이 없는지 저 멀리 치워 버렸다. 이안은 흩어진 서류를 주섬주섬 모으기 시작했다.

“이리로.”

항상 생각하지만, 주인은 ‘이리로’라는 말을 좋아해. 나만 보면 이리 오래. 뭐, 싫지는 않지만. 난 제르펠 손짓대로 쪼르르 달려갔다. 난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전하,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이안은 눈치 좋게 조용히 들고 온 서류를 다시 챙겼다. 이안이 나간 문을 바라보고 제르펠을 향해 말했다. 당당하게 집무실을 찾아오긴 했지만, 당장 말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

“바빠? 나중에 방에서 말할까?”

“괜찮다. 뭐 하고 있었지?”

“여기 오기 전에 교황을 봤어.”

“뭐?”

제르펠의 한쪽 눈썹이 쭉 치켜세워졌다. 제르펠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치며 심기가 불편한 것을 숨기지 않았다.

“이상하군.”

그가 흘러가는 말투로 자신의 궁에 오지 못하도록 조치를 시켰다고 말했다. 제르펠은 혀를 찼다. 싸한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난 그의 생각을 정정해 주기 위해 말했다.

“궁으로 가는 길에 봤어. 내가 지나가는 걸 봤다고 인사를 하려고 했다던데,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고 말이야…….”

“카사가 막지 않더냐?”

이거 잘못 말했다가는 나중에 카사가 깨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사한테 깨지는 것만큼 짜증 나는 일이 없지. 나도 그랬다. 그를 막은 건 나였다.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말했다. 그리고 열분을 토해 냈다.

“신전에 오지 않겠냐고 말하잖아. 딱 봐도 쉽게 포기할 생각도 없는 것 같고, 난 주인이랑 같이 있을 건데! 따끔하게 말해 줬지!”

그는 만족스럽게 웃더니 이마에 살짝 입맞춤해 주었다.

“잘했다.”

“그, 그 정도야. 뭐.”

입맞춤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괜히 손으로 열심히 부채질했다. 이제 익숙해져야지 하면서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의 시선을 회피하고 열심히 얼굴의 열을 식히고 있을 때 제르펠이 나에게 말했다.

“그래서 그놈이 무어라 속삭이던?”

제르펠은 내게 항상 짓던 미소를 띠며 물었다. 하지만 그는 눈을 번뜩이며 내 반응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샅샅이 훑어보고 있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교황이 나에게 했던 제안을 그대로 말해 주었다.

“궁에서만 지내기 답답하지 않으냐는 둥, 기부금 많다고 자랑도 하더라고, 그까짓 기부금이 많아 봐야 주인이 더 돈 많은데 그치? 그리고 뭐? 돌아다녀? 아예 날 데려다 부려 먹으려는 속셈이 가득하더라고, 당장 거절했지!”

가슴을 내밀며 뿌듯하게 이야기했다. 보통 때면 잘했다며 쓰다듬는 타이밍이었지만 잠잠했다. 주인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자 제르펠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는 턱에 손을 괸 채 고민하고 있었다.

뭔가 말을 잘못했나 싶어 방금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너무 돈타령을 했나? 아니면 일하기 싫다고? 하지만 제르펠은 일하지 말라고 종용하기도 했다. 문제가 무엇인지 몰라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주인아?”

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살짝 고민스러운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마음과 손이 따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내가 몇 번의 손길을 받았는데, 이 정도는 파악하지! 2% 부족한 손길이었다.

“혹시 답답했나? 너무 내 생각만 한 것 같군.”

“어, 아니. 오히려 이대로가 좋아!”

혹시라도 내가 갑갑할까 걱정이 되었나 보다. 괜히 쫄았네.

그제야 제르펠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내가 좋아하던 손길로 돌아왔다. 헤실거리며 그의 손길을 받는 중 교황의 태도가 생각났다. 분명 그는 내가 사악한 자라고 했을 때 찔리는 게 있는 눈치였다. 교황의 눈동자가 이채를 띤 것을 분명 목격했다.

“주인아. 사실 저번에 수신님의 목소리를 들었거든.”

“기우제 때 말인가?”

“응. 그때 비가 안 내리는 이유가 사악한 자들이 자신의 힘을 빼앗아 가서 내릴 수가 없다고 했어.”

누군지 말해 주면 얼마나 좋아. 신이라고 해도 쓸모가 없어. 괜히 나만 머리 아프잖아. 왠지 한탄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난 제르펠의 팔을 잡아당겼고, 그의 귓가에 입을 갖다 대었다. 아무도 들으면 안 되는 비밀을 이야기하듯이 주위를 둘러보고, 작게 속삭였다.

“오늘 교황 속을 떠보니까 관계가 있는 것 같아. 표정이 잠깐 굳었어.”

내 말을 듣고 고심할 거라는 생각과 달리 제르펠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웃고 있었다. 내가 화난 얼굴로 바라보았다.

“슈이렌 미안하구나. 숨이 닿아 간지러워. 그만. 그래…… 그자가 말이지.”

내가 조언을 해 줬더니! 속삭였으니 숨이 닿아 간지러울 수도 있지만…… 왠지 근질근질한 귀를 박박 문질렸다.

“너에게 별탈이 없어서 다행이구나.”

“걱정하지 말라고! 나도 할 때는 하는 사람이야!”

난 주먹을 쥔 손으로 가슴을 탁 치면서 말했다. 제르펠은 살짝 미소 짓더니 가볍게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그렇구나.”

제르펠은 나를 기특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뿌듯함이 차올라왔다.

오늘 교황 말도 그렇고…… 딱히 지금 주인 기분도 나쁘지 않고 아까 물어보려던 걸 물어봐야겠다.

교황 일로 더욱 알아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자기가 뭔데 주인 사정을 나에게 알려 주려고 해? 주인의 처지에 대해 알고 있냐는 교황의 말에 강하게 반박하지 못했던 것도 기분이 상했다.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금색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주인아. 왜 황제랑 사이가 나빠? 황제는 주인 아버지잖아.”

제르펠은 갑작스러운 내 물음에 놀란 듯 눈이 살짝 커졌다. 가정사를 캐는 것 같아 기분이 찜찜했지만, 알아야 할 사실이었다. 제르펠의 눈은 깊게 가라앉았다.

긴장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막상 저질렀지만, 정말로 내가 들어도 될 이야기인지 확신은 없었다. 제르펠은 작은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그래…… 너도 알 필요가 있겠지. 말해 주마.”

그는 의자를 뒤로 빼더니 내 팔을 잡아당겨 나를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의자는 두 사람의 무게를 감당하게 되어 끼익하며 작은 소리를 내었다. 그는 내 머리 위에 턱을 올리더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 느껴지는 무게감이 내 마음을 갑갑하게 했다. 조용히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음……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어머니는 저번에 봤지?”

“예쁘셨어.”

“그래, 예쁘신 분이지. 우리 어머니는 흔히 말하는 후계자를 위해 데려온 황비였지. 에이든의 몸이 많이 약한 건 알지? 황후가 그랬다. 몸이 약해 임신이 불가능했지. 황제는 황후를 사랑했기에 절대 황비는 들이지 않았지만 시간이 흘러도 후계를 이을 아이가 태어나지 않자 보수파나 중립 귀족들의 재촉이 심해졌고, 어머니가 황비에 오르고 날 낳았다. 하지만…….”

“에이든이 태어났구나…….”

“그런 거지.”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이든은 무척이나 귀여운 아이지만 과연 제르펠에게는 어땠을까? 그의 표정을 보고 싶어도 내 머리를 꾹 누르는 제르펠의 턱 때문에 올려 볼 수가 없었다. 일부러 이 자세를 취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내가 알 수 있었던 건 빠르지도 느리게도 뛰지 않는 심장 박동 소리와 높낮이 없는 그의 목소리뿐이었다. 제르펠은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든의 몸이 약해 난 황태자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원치 않게 얻은 아들이 아닌 사랑스러운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싶어 했으니 내가 걸리적거렸지. 만약 내가 죽는다면 누구의 불만도 없이 에이든이 황태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자 나의 등을 떠밀었지. 어머니는 힘이 없었기에 거기에 동조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유감스럽게도 난 돌아왔고. 그래서 내가 있으면 곤란하다는 거지.”

“자기들 멋대로야…….”

칭얼거리며 제르펠에게 말했다. 작게 제르펠의 가슴이 울렁였다. 표정이 보이지 않아 어떤 의미의 웃음인지는 잘 모르겠다.

“전쟁터에서는?”

제르펠은 항상 그 관련된 이야기는 껄끄러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제야 그는 내 머리에서 턱을 떼었다. 사라진 무게감에 나는 위를 올려다보았고, 제르펠의 눈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제르펠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별로 좋은 이야기는 아니다. 너에게 전쟁의 참혹함을 알려 주고 싶지 않구나.”

“……그래?”

그 말을 끝으로 제르펠은 내 눈을 피했다. 언제는 나보고 피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가끔 주인을 보고 있으면 너무 담아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계속 쌓이다가는 결국 고름이 되어 터져 버린다.

나보다 어리면서 무얼 그리 많이 바리바리 짊어지고 있는지. 몸을 돌려 그의 얼굴을 잡아당겼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나의 돌발행동에 제르펠의 눈이 살짝 커졌다. 회피하고 있었던 그의 시선이 정확히 나에게로 향했다.

“주인아, 너무 혼자서 담아 두지도, 짊어지지 마. 이래 봬도 난 신의 사자야. 주인한테 많은 도움이 될걸? 이용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이용해. 난 언제나 주인 편이니까.”

그는 미동 없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숨을 쉬고 있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왜 말이 없어??

얼굴을 잡고 계속 있기에 민망했다.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아, 아무튼 그렇다는 거지. 혼자서 애쓰지 말라고…… 나도 주인한테 도움이 되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이거 봐봐. 이번에는 예전과는 다르다고.”

찻잔에 남은 차가 보였다. 분위기 전환용으로 오늘의 성과를 보여 주려고 했다. 성과라도 해도 잘 될지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찻잔에 남아 있던 차가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제르펠은 그제야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이게 내 성과지!”

작은 물방울이었지만 이리저리 모양도 바꾸어 보았다. 물방울을 길쭉하게 늘어뜨렸다. 좀…… 중간에 끊어지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뱀의 형상을 띠었다. 물 형상을 띄우는 뱀을 슬금슬금 제르펠에게 다가가도록 했다. 제르펠이 손가락으로 쿡 찌르니 흐물흐물해졌지만 다시 원상 복귀가 되었다.

순간 터지는 줄 알았네.

“어때? 이제 잘하지?”

잘난 체하기에는 미묘했지만 저번보다는 훨씬 나았다. 칭찬을 바라듯 한쪽 눈으로 힐끔힐끔 그를 쳐다보았다. 제르펠의 입가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고, 눈매는 둥그렇게 휘어졌다. 그러곤 상쾌한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그의 웃음소리에 눈만 껌뻑껌뻑했다. 작은 웃음소리는 종종 들어도 이렇게 큰 웃음소리는 처음이었다.

“그래, 그렇구나.”

방 안이 그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제르펠은 이제 진정이 되었는지 내 머리에 손을 턱 올리더니 쓰다듬어 주었다. 조금 전의 그의 태도는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웃었으니 됐지.

“이제 잘 다룰 수 있게 되었구나.”

“에헴.”

제르펠의 품 안에서 한참을 물방울 놀이를 하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본 그의 입꼬리는 계속 올라가 있었다. 그 모습에 나도 환하게 웃었다. 그의 복잡한 사정을 들고 난 내 생각은 더 확고하게 변했다. 황제든 황후든 가만히 두지 않을 거라고. 그들은 내 생각대로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권력으로 사람을 짓누르는 사람이었다.

창밖에는 노을이 아름답게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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