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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펠은 정말 일이 다 끝난 건 아니었다. 아직 검토할 서류는 남아 있었다. 의자에 앉아 다시 펜과 서류를 집어 들었다.
“집무실에서 해도 되는데.”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니.”
이러니 내가 싫어할 수가 있나. 난 그의 목에 매달렸고, 아까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근데 연회는 뭐야? 공작이 그때 보자는데?”
“연회 말인가. 쓸데없이 너를 보여 달라는 이들이 주최한 거지. 쯧…… 귀족들에게 소개되는 장소라고 생각하면 된다. 아직 날짜가 확정되지 않아 한참 뒤의 일이다. 별일은 없을 거다. 내 옆에만 붙어 있으면 된다.”
“내가 갈 데가 어디 있다고, 다 모르는 사람들뿐일 거 아냐.”
제르펠은 연회라는 단어를 꺼내자 미간을 꾹꾹 누르고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행동이 제르펠에게는 연회를 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는 걸 보여 줬다. 그는 나를 숨기고 싶어 했지만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나를 보고 싶어 한 귀족들의 반발 정도가 아니었을까? 거기에 일단 직책이 신의 사자인 만큼 보여 주기 용으로 연회를 개최할 필요성도 있을 수도 있다. 나만 너무 편하게 잘 지내고 있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정말 내 도움은 필요 없어? 이번에 물을 다룰 수 있게 된 것 같아.”
그는 언제나 내 도움은 필요 없다고 했지만, 의지 정도는 해 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내 힘을 보여 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탁자 위에 있던 꽃병에서 꽃을 뽑아내고 물을 떠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물은 잠잠했다.
어라? 이상하네? 분명 꽃병에 물은 들어 있을 텐데……. 꽃병을 흔들어 보니 찰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분명히 이 안에 물이 있는 건 확실했다.
“이, 이상하다. 잠시만.”
제르펠은 괜찮다며 만류했지만 내가 할 수 있다며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혼자서 끙끙대며 꽃병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때 실을 잡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거다. 물이 서로 모여지고 흩어지며 둥실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인아! 이거 봐!!”
성공의 기쁨에 너무 방방 뛰었는지 긴장의 풀림과 동시에 내 머리 위로 물이 쏟아졌다. 동시에 정방에 정적이 흘렀다. 제르펠은 급한 대로 침대 시트를 가져와 내 머리 위로 덮어 주었다. 다행히 많은 물은 아니었기에 머리만 젖었고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체면이 말이 아니네……. 이 정도 물은 털어 내면 된다고 항의했지만 제르펠에게는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졸지에 목욕행이 결정되었다.
목욕하고 나온 내 몸에서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제르펠은 이미 수건을 들고 있는 채로 대기하고 있었고, 손짓에 따라 그의 다리 사이에 앉았다. 체면이 망가졌다는 생각에 말도 하지 않은 채 시무룩해 있었다. 내 표정을 본 제르펠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대단하구나. 조금만 더 연습하면 쉽게 다룰 수 있겠어.”
“……그런 떠먹여 주는 식의 칭찬은 필요 없거든…….”
창피했던 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꼭 성공하고 만다. 이미 상상 속에는 난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주인은 열심히 손뼉을 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문득, 오늘 나를 짜증 나게 했던 유모가 생각났다.
“주인아, 근데 에이든의 유모 누구야? 완전히 제가 제일 잘났다는 식으로 굴던데? 시종들도 함부로 못 하고.”
누군지 잠시 생각하던 제르펠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삐딱하게 말했다.
“아, 황후 쪽 측근이지.”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네. 아주 잘난 듯이 말하더라고, 에이든도 자기 유모라고 말도 못 하던데…….”
당당해 보이는 이유가 있었다. 황후가 뒤를 봐주고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한 거겠지. 심기 불편한 내 표정을 눈치챈 제르펠이 물었다.
“너에게 무슨 짓을 하더냐?”
서리가 가득 서린 목소리로 제르펠이 말했다. 그의 차가운 목소리는 주위를 얼어붙게 하였다. 하지만 그의 분노의 화살은 나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에이든이 너를 보러 가는 걸 계속 막잖아……. 걱정 마, 내가 혼쭐을 내줬으니까!”
물에 젖은 그녀의 모습이 생각나 뿌듯한 얼굴로 제르펠에게 말했다. 제르펠은 나를 칭찬하듯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는 비딱하게 웃으며 독설을 날렸다.
“자신이 진짜 에이든의 엄마라도 되는 줄 아는 사람이지.”
“……황후 쪽 사람이라 건드리기도 힘들겠다.”
황후라면 황제 다음의 권력자일 텐데 더러워서라도 내가 피하자고 마음먹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아쉬워 속마음이 새어 내왔다. 나의 말이 그의 심기에 거슬렸나 보다.
“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자였으니, 이번 기회에 치우도록 하마.”
“어??”
제르펠은 태연한 얼굴로 무서운 말을 했다. 그 정도는 가볍게 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오히려 내가 그를 말렸다.
“아니…… 황후 쪽 사람이라며?”
“건수가 없는 것도 아니니. 아무리 범 노릇을 해 봐야 여우는 범이 될 수 없지. 그리고 신의 사자를 함부로 대하다니…… 벌을 받아야지.”
제르펠은 내 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감동한 나는 얼른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진짜. 내가 에이든 때문에 참았다니까.”
그녀가 거슬렸기에 제르펠이 치워 준다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에이든은 유모에게 의지를 하는 것이 보였다.
“그럼 에이든은?”
에이든은 어찌하느냐는 물음에 그는 침묵을 지키고는 말했다.
“언제까지 새장 속의 새일 순 없지.”
힐끗 위로 올려다본 그의 눈빛은 오늘 보았던 호수처럼 잔잔하기만 했다. 내 모습을 보았던 것일까 고요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그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게 하나 없었다. 왜 황제와 대립하는지, 황비랑 사이가 좋지 않은지, 전쟁터에 간 이유가 무엇인지.
이런 생활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연회가 가장 대표적인 예였다. 신의 사자의 위치를 이용하려는 자들은 넘쳐날 것이다. 오늘 유모처럼 만만하게 보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가만히 당하고 있는 건 내 성질에 맞지 않았다. 최대한 가지고 있는 직책과 힘을 이용해서 그들에게 똑똑히 보여 줄 생각이었다. 함부로 대한다면 아주 주옥 될 것이라고. 우선 힘을 다룰 수 있게 되어야지…… 제르펠이 나를 도와주었던 것처럼 나도 힘이 되는 만큼 그를 도와줄 것이다.
힘을 주어 꽉 그를 끌어안았다. 무슨 일이라고도 묻지 않은 채 그렇게 한참 있었다. 가슴을 조여 오는 느낌에 그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바라는 게 있다면 그 누구도 상처 입지 않았으면 했다.
* * *
나의 일과는 밥 먹고, 주인 배웅하고, 호수에서 물을 다루는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벌써 며칠째 연습으로 감을 잡았다. 의식을 집중하고 있으면 푸른색으로 일렁이는 빛이 있다고 해야 하나? 그 빛이 강해지면 물을 다룰 수 있었다. 쪼금. 이러니 비를 내린 게 의심이 될 정도였다. 새파랗게 맑은 하늘이 야속했다.
“나 아니면 비도 못 내리는데…….”
실제로 그 일이 있었던 뒤, 비가 올 김새가 전혀 없었다. 혼자서 한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주인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 했다. 언제까지 주인의 짐만 될 수는 없지! 제르펠은 나를 너무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어 절대 말을 안 해 주지만, 나와 만나고 싶어 하는 귀족들에게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그 정도는 옆에서 보면 눈치로 대충 알 수 있었다. 좋았어! 좀 더 해 보는 거야!
벌떡 일어나자 동시에 호수에서 물이 솟아오르더니 떨어졌다. 어안이 벙벙해졌다. 호수는 언제 그랬다는 듯이 잔잔해졌다.
“야! 방금 봤어??”
“네. 대단하십니다.”
눈을 빛내며 카사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땡볕 아래가 싫었는지 나무 그늘에 서 있었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손뼉을 치고 있었다. 카사의 성의 없는 대답에 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 자식이……. 신의 사자에 대한 예의가 하나도 없잖아!
사실 주인한테 제발 저 자식 좀 치워 달라고, 하소연한 적이 있었지만 유능한 자라며 데리고 다니는 게 좋다고 만류했다. 대체 어디가?
오늘은 성과가 있어 가벼운 발걸음으로 제르펠의 궁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한참 동안 노력한 결과로 물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이야말로 성과를 보여 줘야지! 문득, 제르펠과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제르펠에게 검 실력을 보여 달라고 했지만 난처하게 말을 돌렸었다. 그 외에도 그는 전쟁에 관한 이야기만 했다 하면 은근슬쩍 말을 돌리기 일쑤였다.
뒤에서 있지만 없는 듯한 인기척을 내며 걷는 카사를 슬쩍 보았다. 주인이 실력을 인정할 정도면 같이 있던 시간이 길었을 텐데. 내 호위도 맡겼으니 적어도 신뢰하는 사람이지 않을까. 카사가 보는 주인은 대체 어떠한지 궁금해졌다.
걸음의 속도를 늦추어 카사 옆으로 슬쩍 다가갔다.
“주인 밑에 언제부터 있었어?”
카사는 옆으로 오는 나를 지그시 보았다. 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3년 전입니다.”
“어떻게 만났는데?”
“……전쟁터에서 만났습니다. 전하의 일개 부하였죠. 제 검술과 몸놀림을 보고 재능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전하의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전하는 제 능력을 인정해 주신 분으로 따라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럼…… 그곳에서 주인은 어땠어?”
카사는 나의 고민스러운 표정과 늦어지는 발걸음을 눈치챘다. 나를 곁눈 짓으로 흘겨보는 시선에 찔리는 마음에 눈을 슬쩍 피했다. 카사의 어딘가의 고정된 시야와 살짝 벌어졌다가 닫히는 입술이 망설임을 알려 주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르는 것처럼.
“살아남기에 열중했습니다. 전하뿐만 아니라 모두가 마찬가지였습니다. 궁금하시다면 전하께 물어보세요. 슈이렌 님이라면, 뭐든지 말씀해 드릴 겁니다.”
“주인이 곤란할까 봐…….”
“이렇게 물어보시면 오히려 제가 곤란합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을 잘라 버리더니 더는 할 말이 없다며 선을 그었다. 그래, 내가 가서 물어본다. 제3자의 입에서 듣는 것보다 본인 입에서 듣는 게 좋지.
결정했으면 오늘 물어봐야지.
질문 리스트를 머릿속으로 작성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 있던 카사가 내 앞을 막았다. 생각 중이었던 난 그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하고 등에 이마를 박았다. 이마를 문지르며 뭐 하는 거냐고 말했지만 카사는 앞의 인물에게 사납게 경고의 말을 뱉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우연히 가는 길에 만나게 되어 인사를 하려 합니다. 신의 종으로서 사자님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가는 것은 실례라 생각되었습니다.”
카사 등 뒤로 흘러나오는 위협적인 분위기에 상대방이 누군지 궁금증이 생겼다. 카사의 등에 가려 인물이 보이지 않았던 난 그의 옆으로 고개를 내밀어 누구인지 확인했다. 그곳에는 새하얀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중 맨 앞의 사람의 얼굴이 익숙했다.
저번에 기우제를 치르러 갈 때 한번 마주한 얼굴이었다. 교황이라고 했었지 아마.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교황은 과장된 몸동작으로 인사를 했다.
“신의 종인 율리안이라고 합니다. 미숙하지만 교황의 자리를 맡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자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늦게 인사드리는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