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뱀생-23화 (23/103)

-23-

따뜻한 태양 아래 금발 머리가 흩날리고, 금빛 눈동자를 화사하게 빛내며 어린아이가 뛰어오고 있었다. 에이든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카사는 진작 다가오는 이가 누군지 알았는지 깍듯한 예를 취하고 있었다. 저번에 병에 시달렸던 얼굴색은 사라지고 활발하고 밝은 아이가 있었다. 그 뒤에는 저번에 우리 주인을 욕했던 유모도 허둥지둥 에이든을 따라오고 있었다. 여기는 황족들이 오는 곳이라고 했기에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바람을 헤치고 멀리서 뛰어온 에이든의 뺨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과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뒤에서 허둥지둥 쫓아온 유모는 내 모습을 보고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맞닥뜨리게 된 나의 모습에 심히 당황스러워했다. 난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어 내며 일어났다.

피크닉 장소로 애용된다고 하던 카사의 말을 증명해 주듯이 에이든도 기분 전환으로 호수로 피크닉을 온 것 같았다. 그녀 뒤에서 음식이나 깔개 등을 들고 오는 시중 인들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사자님이 어찌 이곳에…….”

유모가 넌지시 나에게 물었다. 이곳에 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투였다. 그녀의 눈은 미세하게 찡그려져 있었다. 황족들만이 오는 곳이라 했으니 그녀로서는 못마땅할 것이 눈에 훤했다. 거기에 기우제의 일등 공신인 내가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제르펠을 끌어내리고 에이든이 황제가 되기를 바라는 인물이니 당연한가……. 환한 에이든의 미소와 대조되는 그녀의 얼굴에 속으로 콧방귀를 꼈다.

너만 싫은가? 나도 싫네요. 저번에 그녀가 했던 말과 나에게 했던 짓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에이든은 미소를 그린 채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사자님. 맞으시죠?”

“어…….”

“영상구 봤어요. 그런 광경은 정말 처음이었어요!!”

에이든은 기우제 과정이 찍힌 영상구를 보았는지 하나하나 과정에 대한 감상문을 나에게 말했다. 격양되어서 말하고 있는 자신에 비해 내가 얼떨떨하게 듣고 있는 걸 눈치챘는지 말을 멈추었다. 에이든은 너무 신나서 혼자 떠들었다고 생각했는지 풀이 죽었다.

“제가 너무 떠들었나요…….”

에이든은 우물쭈물 내 눈치를 보았다. 난 뒤에 있는 유모를 슬쩍 보고는 상냥하게 에이든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를 골탕 먹일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제르펠과 에이든의 사이가 좋아지는 걸 막았으니 나와 사이가 좋아지는 것 역시 싫어할 거라는 결론 때문이었다.

“아니, 괜찮아. 좋게 봐줘서 고마운걸?”

“네! 저…….”

에이든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슈이렌 님이라…… 불러도 돼요?? 혹시 기억하실지는 모르지만, 뱀 모습이었을 때…… 만난 적이 있었어요. 제가 형님한테 데려다줬는데.”

“물론 기억하지. 그냥 형이라 불러. 주인님 동생인데.”

꼬마야. 말은 똑바로 하자. 산책하던 날 가로채 들고 간 거란다.

내 말에 눈에 띄게 동요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유모는 잘게 떨리는 눈동자를 미처 숨기지 못했다. 나에게 한 만행을 떠올리는 것이 아닐까? 그러게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지.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에이든을 보았다. 저 유모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에이든은 주인의 동생이라고 생각하니 모질게도 대할 수 없었다. 권력 다툼에 시달리는 몸이 약한 애라는 이미지가 내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주, 주인님요?”

“아…… 음……제르펠 말이야. 뱀일 때 그렇게 불러서. 익숙해졌거든.”

애칭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단어였다.

“그럼…… 슈이렌 형이라 불러도 돼요? 저는 그냥 에이든이라 불러 주세요!!”

“그래. 괜찮아.”

에이든은 내가 제르펠을 부르는 호칭에 잠시 당황한 것 같았지만 이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 호칭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기에 흔쾌히 허락했다. 에이든의 들썩이는 몸을 보면 얼마나 기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에이든이 귀여워 카사가 잔뜩 안고 있는 간식거리 중 하나를 집어서 에이든의 손에 쥐여 주었다. 순수한 호의였다. 왜 애들한테 군것질 하나 쥐여 주지 않는가.

“혹시 배 안 고파? 많이 받았는데 버리기는 아까워서. 과자 먹을래?”

에이든은 내가 준 쿠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댕그래져서 반짝반짝 빛내는 것이 딱 봐도 나에게 주셨어! 하는 눈빛이었다. 에이든이 헤실헤실 웃더니 감사하다며 쿠키를 받았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에이든이 쿠키를 먹으려고 하자. 유모가 뒤에서 튀어나오더니 에이든의 손에서 쿠키를 빼앗고는 말했다.

“저하! 검증되지 않은 음식을 함부로 섭취하시다니요. 물론 사자님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음심을 품은 사람들이 음식에 독을 넣는 경우는 허다하답니다. 사자님도 아랫것들이 주는 음식은 함부로 먹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유모는 시녀를 불러 바구니를 가져오게 하였고, 그 안에는 에이든을 위해 준비된 맛있는 다과들이 잔뜩 있었다. 그러고는 나를 힐끔 보더니 그 많은 다과 중 쿠키 하나를 집어서 나에게 건네었다.

“사자님도 드실 건가요?”

유모는 선심 쓰듯 나에게 내밀었지만, 내 몫이 있는데 굳이 그걸 먹고 싶지도 않았다. 더구나 의기양양해 보이는 저 꼴도 보기 싫었다. 유모의 행동은 여전히 나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바구니 속에는 쿠키뿐만 아니라 푸딩, 마카롱, 샌드위치 등 많은 다과가 존재했다. 그중 가장 하찮은 쿠키를 건네는 꼴이 보기 좋을 리가 없었다.

이거 봐라? 그 태도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다정하게 웃으며 건네는 다과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없는 노릇.

“괜찮아. 나는 내 거 있는데?”

내가 들고 있던 쿠키를 보란 듯이 먹었다. 에이든은 그녀가 빼앗아 간 쿠키를 먹고 싶어 했지만 단호한 그녀의 표정에 아쉬운 표정으로 자신의 몫을 먹었다.

어쩌다 보니 피크닉 멤버가 결성되었다.

뒤에 있던 시종들이 깔개를 깔고 에이든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 같이 앉게 된 것이다. 말없이 호수를 바라보며 간식거리를 먹고 있을 때 옆에서 에이든이 제르펠에 대해 말했다.

“형님은 대단하신 것 같아요. 처음부터 슈이렌 형이 사자님인 걸 알고 있었던 거죠?”

“글쎄?”

“첫 만남은 어땠나요?”

“음…… 주인이 내 목숨을 구해 주었지.”

술독에 빠져 죽는가 했더니 검에 썰릴 운명을 구해 줬으니.

오독오독 쿠키를 먹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석 달 전의 일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제르펠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둘씩 나오자 우리들은 그의 이야기로 열이 올랐다. 에이든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제르펠을 좋아하는 게 느껴졌고, 그를 칭찬하자 내가 뿌듯해졌다.

“주인은 멋지지. 일도 척척 해내고, 내 말도 잘 들어주고, 상냥하고, 손길도 장난 아니야. 쓰다듬어 주면 몸이 흐물흐물해진다니까. 이제 그건 프로의 손길이지. 아, 이번에 돈 씀씀이도 훌륭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손길요?”

에이든은 내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지 의문을 담고 물었다. 난 그의 찰랑거리는 금발을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내 손길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런 거 말이야. 너도 한번 주인한테 쓰다듬어 달라고 해.”

“그래 주실까요……?”

에이든은 확신이 없는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가정사가 복잡하기는 하지만 제르펠 성격상 에이든에게 모질게 굴 거라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당연하지. 동생이잖아? 그리고 이렇게 귀여운걸?”

에이든은 자신의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몸을 둥글게 말더니 볼을 빨갛게 물들였다. 열 살의 순수함이 엿보였다. 에이든은 배시시 웃더니 물었다.

“형님은 검술이 멋지다고 들었어요. 혹시 보셨나요?”

그러고 보니 그는 내 앞에서 절대 검을 뽑은 적이 없었다. 옆에 차고 있는 검은 본 적이 있지만, 그의 검 실력을 두 눈으로 본 적은 없었다.

“아직 못 봤는데?”

“저도 들은 이야기인데요. 형님 검술은…….”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누구에게 들었는지 각색되고 과장된 말이 많았다. 검을 한번 휘두르면 10명의 사람을 베어 버린다든가, 상대편의 전술이란 전술은 다 파악해 매복으로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승리했다든가. 무슨 검기도 아니고 한 번에 10명을 쓰러뜨리며, 전쟁에 사상자가 나오지 않을 리 없잖아?

에이든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며 들으면서 느낀 건 이 아이에게 제르펠은 영웅과 다름이 없구나. 듣는 순간 어디에 나오는 주인공이야, 라는 것이었다. 옆에서 계속 제르펠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찾아갈까? 오지 말라고 한 적은 없잖아? 전에는 제르펠의 집무실을 방문하는 것은 나의 일과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제르펠의 이야기를 상기 된 얼굴로 말하는 에이든을 보니 만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제르펠과 친해지고 싶어 했던 게 눈에 훤히 보였던 아이였다. 그때는 뱀이라 말해 주지 못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형제 사이는 좋을수록 좋지.

주인은 가족들이랑 다 안 친한 것 같단 말이지……

제르펠은 가족들 누구와도 좋은 관계가 아닌 것 같아 마음이 걸렸다. 저번에 본 어머니와도 썩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좋아. 가자.”

에이든의 이야기를 듣던 내가 갑자기 일어나자 다들 놀랐는지 나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난 에이든에게 손을 내밀고 말했다.

“주인 보러 같이 가자.”

“네? 아…… 저는 괜찮아요…….”

대답은 거절을 뜻했지만 눈은 솔직하게 내 손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나의 재촉에 살포시 내 손 위에 에이든의 손이 올라가고 맞잡으려는 순간이었다.

“에이든 님!”

모두가 그녀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렇게 큰소리를 낼 생각이 없었는지 그녀도 자신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손으로 입가를 막았다. 그것도 잠시 손을 내리고 에이든에게 말했다.

“곧 수업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지금 바쁘신 몸, 갑자기 찾아가시면 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 네가 왜 안 나서나 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