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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이렌?”
딱 한 마디였다. 분명 웃는 낯이었지만 한순간에 온도가 확 내려가는 서리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 한마디가 어찌나 살벌하게 느껴지던지 옷을 벗으려고 한 손이 절로 움찔했다. 흠칫하는 사이 그가 고용인에게서 거칠게 줄자를 빼앗았다. 그의 기세에 이안이 서둘러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이 넓은 응접실에 나와 제르펠이 남았다.
그러자 그는 내 옷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뜨렸고, 줄자를 쭉 길게 빼더니 말했다. 그 모습이 줄자로 나를 포박할 사냥꾼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함부로 벗지 말아야지. 어제 그렇게 속상해 놓고.”
“안에 속옷…….”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다른 사람에게 앞에서 그렇게 벗으면 안 되지. 응?”
말투는 상냥했지만, 그 속에는 분명 경고가 담겨 있었다. 그의 눈치를 힐끗 보았다. 그가 다가오자 한걸음 뒤로 물러섰지만, 더는 안 된다며 감이 경고를 하고 있었다. 딱딱하게 경직한 채로 그의 앞에 똑바로 섰다.
갑자기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처리해 준다는 살벌한 말이. 이때부터 약간 감이 오기는 하였다.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반려동물한테 하는 태도가 아니지 않아?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긴장과 달리 그는 순수하게 옷의 치수만 재었다. 그 후 옷 사이즈를 알려 주고 고용인이 치수가 비슷한 옷을 가져와 착용해 보라고 말하며 시중을 들려고 했다. 이번에도 수발을 들려고 하는 사람들을 제르펠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저, 전하 저희가 하겠습니다.”
“되었다. 물러가라.”
그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직접 나의 수발을 들었다. 심지어 바짓단을 정리해 주기 위해 무릎을 꿇기까지 했다. 그 순간 이안을 제외한 모두가 헉, 하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이안 혼자만이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안은 그런 제르펠의 태도는 잘 알고 있었지만, 여기에 있는 자들은 외부인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옷을 정리해 주더니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예쁘구나.”
“으, 응.”
“이제 장신구만 고르면 되겠군.”
부드럽게 내 옆머리를 넘겨주며 그가 말했다. 자연스럽게 장신구를 고를 때 제르펠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방금 보인 태도는 과한 감이 없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았다. 그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는 것쯤은. 머리가 어지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옆에 있는 상인은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 건가 싶어 내 옆에서 안절부절못했다.
“마음에 드시는 게 없으신가요?”
“아, 아뇨. 보고 있어요.”
내 눈길을 끄는 장신구들은 많았지만 정작 시선은 제르펠의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슈이렌.”
지켜보고 있던 제르펠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내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하지만 그를 뒤돌아볼 때는 만면에 웃음을 띤 표정으로 다가갔다.
“나 불렀어?”
상인은 어느새 그의 곁으로 갔는지 어느 물건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 목걸이는 딱 보아도 나를 위해 준비한 선물인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붉은 보석이 찬란한 빛을 내는 게 예사롭지 않은 물건인 건 확실했다.
“이건……?”
“널 위해 준비한 선물이란다.”
“레드 다이아몬드로 만든 목걸이랍니다. 디자인은 마음에 드시는지요? 착용해 보세요.”
다이아? 결혼식 때나 겨우 1캐럿짜리 다이아 한번 가져 보나 했더니 그거와 크기조차 비교되지 않았다. 심지어 일반 다이아도 아니고, 레드 다이아라니…… 내가 실제로 구경하기도 힘든 보석인 것은 확실했다.
상인이 상업적인 미소와 말로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라며, 이런 광채를 띠는 보석은 드물다면서 자랑을 했다. 제르펠은 그 물건을 보고 흡족해했다. 나를 손짓으로 가까이 오라고 했다.
“이리로.”
기대감에 후다닥 달려갔다. 제르펠은 나를 돌려세우더니 뒤에서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원래 빨리 줄 예정이었지만 절차를 거친다고 오래 걸렸구나. 항상 끼고 다니렴.”
난 언제 불안했느냐는 듯이 감동한 눈빛으로 제르펠을 바라보았다. 그다음 말은 더욱 나를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나머지 장신구들도 구매하도록 하지. 슈이렌이 말이 없는 걸 보니 고르기가 힘든 것 같으니.”
다 꺼져. 주인이 최고야. 말도 멋지게 하네.
“주인아…… 고마워!”
그는 나의 표정과 눈빛을 파헤칠 듯이 바라보았지만, 보석들이 착착 보관되는 황홀한 자태를 보던 나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 감동한 나는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의 가슴이 만족스럽게 울렁거리는 것이 웃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의 품에 쏙 안긴 난 밝은 등에 목걸이를 비춰 보는데 정신이 팔렸었다.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런 장신구를 손에 쥐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밥 줘, 잘 곳 마련해 줘, 옷 사 줘, 거기에 보석까지…… 의식주는 완벽 그 자체였다. 다소의 실수를 했긴 했지만 충분히 다음에 만회하면 되었다. 지금까지의 행동이 너무 속물처럼 보일까 마른침을 삼키고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만 해도 식겁한 게 몇 번이야. 하지만 그의 부드러운 분위기와 웃음기를 머금은 눈동자가 똑바로 나를 향했다.
딱히 주인은 신경 안 쓰는 듯. 오히려 좋아하는데?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딱히 나를 내치거나 그럴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정해졌다. 열심히 아양이나 떨자. 사람으로서도 충분히 안락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속물인 거나 들키지 말자…… 누가 자기 등골 빼먹는 거 좋아하겠어.
내 목표는 언제나 하나였다. 사람이 되어서도 호의호식하게 해 줄 사람한테 들러붙어서 살자!
철저하게, 눈치채지 못하게, 성질 좀 죽이고, 귀여운 아이라고 인식시키자!
* * *
오늘 아침도 제르펠과 같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젯밤에 또 어영부영하는 사이 같이 잠들었다. 쭉 기지개를 핀 다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제 저지른 실수가 다시 생각이 나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오늘은 만회해야 했다.
옆에 자는 제르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사람이 되니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너무 많아졌다. 뱀이었을 때는 그저 기어 다니면서 행동으로 애교만 부리면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이번에야말로 완벽하게 연기를 하자고 다짐했다.
“너무 포커페이스란 말이지…….”
무표정이었던 제르펠은 어디로 갔는지 웃는 낯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기분 좋은 얼굴로 자는 제르펠의 볼을 꾹 찔렸다. 그러자 그의 눈이 번쩍 떠져서 놀라 그 상태로 굳어 버렸다. 자신의 볼을 찌르고 있는 내 손가락을 보고 웃더니 이불을 젖히고 일어났다.
“일찍 일어났구나. 심심했나?”
“응…… 그냥 일찍 눈이 떠졌어.”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자 그는 나를 스쳐 지나가 옷을 입었다. 그 모습을 침대에 앉아서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한동안 방 안에 있어야 한다는 그의 말이 생각났다. 어제는 쇼핑하기 위해서였지만 오늘은 어떨지 몰랐다.
“주인아…… 그런데 나 오늘도 방 안에 있어야 해?”
“정리되면 나가게 해 주마.”
따라다니겠다고 말해도 확고하게 거절하였다. 위험하니 절대 나가선 안 된다는 거였다.
“나 가만히 있어도 돼? 신의 사자라며 할 일 같은 거 있지 않아?”
내 말에 기이한 열기를 띤 제르펠이 음산하게 말했다.
“신전에 가고 싶은 건가?”
그의 반응에 깜짝 놀라서 손을 저었다.
“아니야! 내가 왜 거기에 가. 그냥 이렇게 편안하게 지내도 되나 싶어서…… 주인만 힘든 것 같아서…… 주인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를 노리고 있다며. 주인은 괜찮아?”
제르펠은 눈꼬리를 곱게 접으면서 웃었다.
“괜찮다. 조금만 더 참으렴. 곧 나가게 해 주마. 그러니 한동안 여기에 있자. 네가 이곳에 있어야 내 마음이 진정될 것 같구나.”
“……사람 몸도 불편하네. 뱀이었다면 주인의 목에 둘려져 있는 건데.”
“난 네가 사람이 되어서 기쁘다.”
“어?”
스쳐 지나가는 투로 이야기한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사람인 모습이 더 좋다는 건가? 제르펠은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원하는 게 있다면 카사에게 말을 하라고 했다. 결국, 방콕이었다. 방콕도 자의여야 기쁘지 타의에 의한 방콕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안이 책 몇 권을 들고 왔다.
“부탁하신 물건입니다.”
“아, 여기에 둬라. 슈이렌. 네가 혼자 방 안에서 심심할까 준비했다. 당분간 이걸로 참으렴.”
이안은 제르펠이 가르킨 탁자에 책을 내려 두고 떠났다. 그는 내가 심심해할 것을 대비해서 책을 준비했다. 전생에서도 책과는 연이 없던 나에게…… 하얀 건 종이고 검은 건 글자요 하는 걸 왜 준비한 거야? 그래도 그의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어 펼치기는 했다. 내 예상이 틀렸다. 검은 건 글이요 알록달록한 건 그림이었다. 어린이에게 줄 만한 동화책이었다.
내가 글을 모르는 줄 알았던지, 아니면 나이가 적다고 생각했는지 둘 중 하나였다. 그들의 생각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보자마자 얼굴이 찌푸려진 건 어쩔 수 없었다.
“애도 아니고…… 무슨 동화책이야…… 주려면 소설책이나 달라고.”
나도 모르게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뱀이었을 때 혼잣말하는 습관이 생겨 입 밖으로 말이 나간 것이다. 입 밖으로 나왔나……? 흠칫 놀라 제르펠을 보자. 그의 눈빛이 순간 번뜩하고 빛냈다. 그 순간 몸이 부르르 떨렸다. 어찌나 소름이 돋던지.
“흠…… 책을 알고 있나.”
그렇다. 나와 함께 있을 때 서류를 보았다면 보았지. 책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즉 난 책은 처음이라는 공식이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1차 멘붕이었다.
“아, 그게…… 그 내가 혼자 싸돌아다닐 때 있잖아. 그때 사람들이 책이라는 걸 들고 다니는 걸 봤지. 응. 그랬어.”
결국, 생각한 변명이 다른 사람이 들고 다니는 걸 보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전에 너무 당황스러워했던 것을 고려한다면 도저히 믿을 만한 말은 아니었다. 지금도 내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채 어색하게 목덜미를 긁적였다.
“신의 사자니 평범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나조차 저 말에 누가 속을까 생각했었다. 내 변명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나의 한심스러움을 한탄하고 있을 때 2차 공격이 내 가슴을 관통했다.
“혹시나 물어보지만 원래 사람이었나?”
“어?? 아니?”
나도 모르게 손을 사정없이 저었다. 그는 웃으며 바로 치고 들어왔다.
“지식은 있는 채인 건가…… 아니면 사람들의 지식을 얻은 건가…… 신의 사자니 소통을 위해서…… 라는 가능성이 있군.”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았지만 난 계속 웃었다. 웃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
“그럼, 나이가 몇이지?”
그는 의문을 가진 목소리로 물어봤지만, 연속적인 공격에 컥, 하고 속에서 피를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말했다.
“어…… 18살?”
본 나이에서 딱 십 년만 빼고 말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도 딱 그 정도 나이처럼 보였다.
“아직 성인 전인가…….”
그 말이 왜 이리 불길하게 들리는지, 무척이나 아쉽다는 투로 들렸다. 하지만 내 착각이라 생각했다. 그가 상냥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지만, 그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침에 다짐한 것이 무색하게 다 들통 난 것 같았다. 양심에 찔렸던 난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슈이렌.”
“응…….”
불려 놓고는 답이 없자 힐끔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눈이 찌푸려져 있었으며 심기가 불편한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의 사나운 기세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 행동을 바라보던 제르펠은 나에게 한걸음, 한걸음 다가왔다. 그 걸음은 나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고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내 쪽으로 다가올 때마다 침대가 푹 꺼지는 게 느껴졌다. 묘한 압박감에 다가오는 만큼 뒤로 물러섰다. 내가 슬그머니 눈을 돌리자 손을 뻗더니 내 턱을 잡고는 자신에게로 돌렸다.
어느새 그의 얼굴은 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고 그가 잡은 턱 때문에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네가 어디서 왔던, 무얼 했던, 지금의 나랑은 상관없어. 지금까지와 그랬듯이 내 곁에만 있다면 네가 원하는 건 내가 다 들어주지. 저번에 말했지. 나와 같이 있어 달라고, 지금의 너는 어떻지?”
그가 현재 말하는 말은 불과 기우제 하루 전. 내가 뱀이었을 때 했던 말이었다. 떨리는 입술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나, 나도 주인 곁이 좋지…….”
입가에 호선을 그린 그는 잘했다는 듯이 내 등을 쓸어 주었다.
“넌 하고 싶은 대로 내 곁에만 있으면 돼.”
경고처럼 들리는 그 말은 단순한 경고라고 단정 짓기가 어려웠다. 자신이 떠날까 봐 동공이 잘게 떨리며 마치 두려워하고 있는 듯한 그의 눈동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 말은 경고와 동시에 간절한 부탁과도 같았다.
마른침을 삼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몰랐을까, 나름 눈치는 빠르다고 자부하고 있었을 텐데. 지금까지 고민했던 게 무색했다.
그는 처음부터 나를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나는 그에게 특별한 존재인 것 같았다. 그는 사람을 믿지 못하고 어린 시절 애정을 받지 못했다. 주변 상황을 안다면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첫 만남이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의 경계심을 무너뜨린 걸 수도 있다. 그리고 난 그에게 끝없는 애정을 주었다. 처음에는 단지 빌붙기 위한 것이었지만 점차 서로에게 물들어 갔다. 제르펠에게는 내가 조건 없이 애정을 주는 유일한 상대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눈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나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눈빛, 그건 사람이 되어서도 바뀌지 않았다. 금빛 눈동자가 꿀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나 때문인지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선뜩할 정도로 빛났다. 부스럭하는 소리와 그가 쥔 침대 시트가 사정없이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눈동자는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스치듯 볼을 지나갔고,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나를 품에 안았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그를 안았다. 내 입은 말하기 위해 입술이 달싹이고 다물기를 반복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사람이 되었다고 걱정할 필요 없이, 주인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이거…… 설마.’
그의 행동을 봤을 때 평범한 애정이 아니었다. 다른 감정이 엿보였다. 내가 아는 감정과 비슷했지만, 설마 그렇겠냐며 생각을 지웠다. 그는 보지 못할 나의 눈은 혼란스러움에 사정없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