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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나를 깨웠다. 몸이 무겁다 싶어서 눈을 떴더니 나를 옴짝달싹도 못 하게 하는 팔뚝이 보였다. 시선을 돌리니 난 제르펠의 품에 꼭 안겨 있었다. 잠옷 사이로 보이는 그의 복근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헉, 내가 왜 여기에 있지? 깜짝 놀라 일어나려고 했지만, 팔심이 어찌나 센지 꼼짝을 하지 않았다.
“잘 잤어?”
내 버둥거림이 느껴졌는지 옆을 보니 제르펠이 눈을 뜬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햇빛을 반사하는 그의 금빛 눈동자와 손을 뻗어 머리를 쓸어주는 그의 손길, 다정한 표정에 정신을 가까스로 부여잡았다. 제르펠은 내 홀린 눈빛을 눈치챘는지 픽하며 바람 빠지는 소리가 잇새로 나왔다.
내가 주인을 함락하기 전에 주인이 나를 함락하겠네. 정신 차리자 정신!
내가 혼자 뺨을 때리며 정신을 차리고 있을 때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잠옷 벗고 이미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허둥지둥 이불을 치우고 일어나 같이 나가려고 했지만 생각해 보니 내 옷이 없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으로 밖으로 나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옆에 있던 제르펠의 옷을 슬쩍해 입어 보았지만, 소매는 내 손을 다 덮어 달랑거리고 있었다. 그 꼴로 제르펠을 바라보니 그는 입을 막고 웃었다.
“내 옷은 많이 큰 것 같구나. 오늘 디자이너를 불렀으니 같이 가자.”
“내 옷 사러 가? 같이 가는 거야?”
어제 방 안에 혼자 있는 게 얼마나 곤욕이었는지. 카사는 말이 안 통해 절대 밖으로 보내 주지 않았다. 오늘도 나를 방에 방치해 두고 가는 게 아닌가 싶어 옷깃을 꽉 잡고 물었다. 사람이 되고 처음 방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내 머리에 손을 얹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르펠이 탁자에 있던 종을 울리니 이안이 들어왔다.
“슈이렌이 입을 만한 옷을 준비해 오너라.”
이안은 눈대중으로 나를 스캔하더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방을 나섰다. 그리고 이안이 다시 돌아왔다. 그의 손 위에는 가지런히 개어져 있는 옷이 올려져 있었다. 제르펠은 그 옷을 가져다가 만져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이것이냐?”
“죄송합니다. 맞는 치수는 귀족들을 위해 준비해 둔 예비 옷밖에 없었습니다.”
“쯧.”
아무래도 옷의 재질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내가 보기에는 충분히 고급스러워 보였지만 그의 눈에는 마뜩잖았나 본지 이안에게 따졌다. 결국, 그는 혀를 찼고, 나에게 미안한 투로 말했다.
“가서 더 좋은 옷을 사 주마. 지금은 이걸 입도록 하자.”
나가기만 한다면 전혀 상관이 없었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장이랑 비슷하게 입으면 되겠지 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내가 옷을 들고 가만히 있자 손을 뻗어 옷을 가로채더니 하나하나 설명해 주면서 입혀 주었다.
“그냥 내가 하면 되는데…….”
이제 손도 발도 있는데 옷까지 입혀 주니 좀 머쓱해져서 말했다. 그렇게 입는 것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내가 좋아서 하는 거니 괜찮다.”
원래부터 내 관리는 항상 제르펠이 했기 때문에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피부에 닿는 옷은 부드러웠고 움직이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어디 불편한 데는 없느냐?”
“괜찮아.”
“옷을 보러 가기 전에 식사하러 갈까.”
“좋아!”
제르펠은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잡아 이끌었다.
* * *
전언 철퇴! 변함이 없기는 개뿔.
긴 식탁에는 음식들이 잔뜩 있었다. 고기만 빼고, 오늘도 난 딸랑 수프 하나였다.
“내 고기는?”
제르펠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가 갑자기 소화가 어려운 걸 주면 배탈이 난다고 하더군. 이틀 뒤에는 진수성찬을 준비하마. 한동안은 이걸로 참으렴.”
수저만 들고 수프 위에 둥둥 떠 있는 완두콩을 쳐다보기만 했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수프라니…… 심지어 주위에는 소화가 잘되는 샐러드뿐이었다. 고기 한 점 없는 샐러드.
내가 초식 동물인 줄 아나. 뱀으로 산 지 3달. 채소는 쳐다보지도 않고 고기만 주야장천 먹었다. 채소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먹지 않는 나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보는 게 보여 억지로라도 숟가락을 움직였다. 채소도 먹어야 건강에도 좋지. 이제 사람으로서 골고루 영양을 섭취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기계적으로 포크로 샐러드도 찍어 먹었다. 의외로 새콤달콤하고 아삭거리는 소리가 울리는 것이 신선하고 맛이 나쁘지 않았다.
잘 먹는 나의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제르펠의 눈이 미묘하게 가느다래졌다. 왜 그러지? 하며 쳐다보면서 입을 오물거렸는데 그의 웃음이 미묘했다. 아까의 웃음과 다름없음에도 불구하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그는 의심스러워하는 듯한 말과 함께 턱을 괴었다.
“잘 먹어서 다행이구나. 그런데…… 잘 쓰는구나.”
“응? 뭐를?”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내가 들고 있는 수저였다. 대체 이게 왜? 그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수저는 서툴지 않을까 생각했기에.”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 식사를 잘하는가와 더불어 혹시 수저의 사용법에 대해 모르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그럼 진작에 알려 주라고! 수저, 포크, 나이프가 있었고 난 당연하게 수저로는 수프를 떠먹었고, 포크로는 샐러드를 찍어 먹었다. 솔직히 28살이나 돼서 음식을 흘려 먹지도 않았기에 주위도 깨끗했다.
제르펠은 뱀이 갑자기 사람이 된 것 치곤 수저의 사용법도 잘 알고, 능숙하니 의심을 했다. 속으로 망했다를 외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항상 주인을 보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알지!”
목소리야 제발 떨리지 마라.
제 발이 저려 사정없이 떨리는 목소리를 느꼈다. 제르펠은 가느스름하게 눈을 뜨고 웃었다. 그 웃음에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거 같았지만 무시하고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어설프게 채소 한두 개 정도는 흘리면서.
* * *
제르펠은 자신의 눈치를 심하게 보고 있는 슈이렌을 관찰하고 있었다. 확실히 저번에 사람이 돼서 괜찮나? 라는 자신의 말에 슈이렌이 잠깐 어물쩍거렸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때 사람이 된 적이 없다고 확실하게 말하지 않았지.
그리고 자신에게 보이는 모습이 내숭일 거라고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처음 슈이렌이 일어났을 때 한 말은 똑똑히 기억하니까. 가장 처음 한 말이 욕이라니. 그 후로는 듣지 못했지만, 신경적이고 앙칼진 목소리로 수신에게 투덜거렸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 슈이렌이 오히려 자신을 보았을 때 귀여운 목소리로 조잘거렸을 때 얼마나 흡족했던지.
특별 취급받는 기분이었다. 이러니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왜 자신에게 숨기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런 슈이렌도 무척이나 귀여웠기에 지켜보는 중이었다. 하지만 눈을 피하는 태도는 그를 거슬리게 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가 어설프게 옆으로 피하면 그의 턱을 잡아 다시 돌리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게 여러 번이다.
모르는 척을 해 주는 게 좋을까, 아니면 속을 떠보는 게 좋을까, 우선 슈이렌이 무얼 원하고 좋아하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제르펠은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면서 고민에 빠졌다.
애초에 슈이렌은 알지 못했다. 뱀일 때부터 그의 행동은 특이했고, 이번 일로 제르펠은 마냥 순수한 모습은 아니라고 더욱 확신했을 뿐이다. 그의 반응을 일일이 지켜보며 수많은 덫을 깔고 있었을 뿐이었다. 슈이렌은 고개를 접시에 박고 먹고 있었기에 보지 못했다. 그를 보며 음산하게 입맛을 다시며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빛을.
* * *
난 탁자를 두드리며 고민하는 제르펠을 발견했다. 혹시나 들켰나 싶어 찔린 난 그의 생각을 방해하려고 했고, 그가 손도 대지 않은 수프를 발견했다.
“주인은 안 먹어? 배고프겠다. 먹어야 힘이 나지!”
나를 배려한 식탁인지 그의 앞에 똑같이 수프가 있었고, 고기는 보이지 않았다. 내 말을 들은 그는 그제야 자신도 먹기 시작했다. 한고비를 넘긴 나는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식사 때의 발언에 큰 충격을 받아 흐물흐물해진 상태로 일어났다. 디자이너를 만나러 제르펠과 같이 걸어가고 있었다. 이안이 도착했다며 열어 준 곳은 응접실이었다. 거기에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과 투박한 보석 반지를 손가락마다 착용하고 있는 남성이 있었다. 그들은 각 의상실과 보석점에서 온 사람이었다.
손뼉 소리와 함께 수많은 옷과 보석이 진열되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입을 떡 벌린 것도 무리도 아니었다. 기우제 때 꾸밀 때도 넋이 나간 채 화려한 장신구들을 살펴보기 바빴는데 지금 내 눈앞에 그 휘황찬란한 빛의 향연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흥분으로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꼭 잡고 제르펠을 바라보았다. 올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는지 그가 웃으며 말했다.
“슈이렌. 원하는 거만큼 골라 보렴.”
“진짜?? 얼마만큼??”
“원하는 만큼.”
멋져. 역시 우리 주인님!!
나는 잔뜩 신이 나서 옷감을 쓸어 보기도 하고 보석을 등에 비춰 보기도 하면서 마음껏 구경했다. 그래도 나는 양심이 있는 남자였다. 너무 많이 고르는 것도 흑심 있어 보였고 적게 고르는 것도 내숭 떠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우선 옷부터 고르자 싶어 10벌 정도만 골랐다.
“주인아! 저기 저거랑 이거랑 이거 사 줘.”
그의 옆으로 조르르 달려가 옷깃을 잡아당기면서 내가 고른 옷들을 가리켰다. 턱을 괴고 있던 손이 풀어지더니 나에게 뻗어왔다. 그는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했지만 난 자연스럽게 뱀이었을 때의 행동으로 거기에 얼굴을 가져다 비볐다. 어라. 잠깐만 이거 자세 이상하지 않음? 난 제르펠의 높이에 맞추기 위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그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흠칫 놀라 슬쩍 위를 보니 호선을 그리는 입술을 보였다. 그는 내 행동이 무척이나 즐거운지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모르겠다 싶어 아예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다.
자존심 따위 개나 주라지.
내가 고른 옷들을 척척 고용인들이 골라서 따로 챙겨 놓았다. 제르펠은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에 드니?”
“옷감이 부들부들해!”
그의 말에 내 목소리가 평소보다 격앙되어 말했다. 그는 나긋하게 눈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그의 눈에 흥분으로 빨개진 나의 볼이 보였다.
“뺨이 발개졌구나.”
그는 발개진 내 볼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때 뒤에서 의상실 고용인이 다가왔다. 옷 수선을 위해 치수를 잴 필요가 있어 겉옷을 벗으라는 것이었다.
빨리 시착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치수를 재는 게 처음도 아니고 말을 듣고 옷을 벗으려고 했다. 그런데 내 팔을 잡아당기는 힘과 함께 그의 무릎에 풀썩 앉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주인을 쳐다보았다. 옷을 벗는 나의 행동이 마음에 단단히 들지 않았는지 그의 황금빛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