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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생-19화 (19/103)

-19-

사람이 되었다.

한참 동안 나를 진정시켜 주던 제르펠은 이안이 사정사정해서 결국 집무를 보러 갔다. 나도 혼자서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제르펠의 등을 떠밀었다. 그가 나가자마자 침대에 주저앉아 머리를 부여잡았다.

“내가 지금 가만히 있게 생겼어? 썩을…….”

누가 들으면 뱀에서 사람이 됐으니 좋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전혀 아니었다. 이미 뱀생에 익숙해졌고 뱀 팔자가 상팔자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인제 와서 사람이라니…… 거기에 직책이 신의 사자였다.

신의 사자란 무엇인가? 나름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기도를 신에게 드리고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는 그런 직책이 아니었던가. 벌써 사자님, 비를 내려 주세요. 사자님, 저의 기도를 들어주세요. 사자님, 사자님,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앞날이 깜깜했다. 먹고 자고 싸고 잘 컸더니 이제는 밥값을 하라는 신의 계시 같았다.

이제는 징그럽게 사람이 돼서는 귀엽지도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뱀이 갑자기 사람이 된다? 나 같으면 부담스럽다…….

“혹시나 쫓겨나는 건 아니겠지? 신의 사자라서 괜찮나?”

다행히 주인의 태도는 변함없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처럼 방 안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며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거울이 보여 그 앞에 서서 지친 나를 바라보았다. 어지러웠던 머릿속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으로 가득 찼다. 거기에는 웬 아름다운 소년이 서 있었다.

“우와……. 대박…….”

징그러울 거라는 내 생각과 달리 탐스럽게 길게 허리까지 내려오는 은발 머리카락에 새빨간 붉은 눈을 가지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순백의 새하얀 피부와 매력적인 입술은 성스럽다는 말이 어울리는 외모였다. 옷까지 하얀색을 입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표정을 다양하게 지어 보았다. 예쁘게 웃어 보이자 세상이 환해진 듯 눈이 부셨다.

“내 얼굴에 내가 눈이 부실 줄이야……. 외모 보정은 확실하네.”

충분히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고도 남을 외모였다. 거울 앞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보았다.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고민했다.

“계속 주인한테 애교나 떨어? 내 고딩 때 꿈이 백수였긴 했지…….”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신감이 솟구쳤다.

이 정도 외모라면 한 사람을 사로잡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좋았어. 이번에도 함락시켜 주마!!

완벽한 플랜에 자화자찬하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면서 카사가 들어왔다. 맛있는 냄새가 풍기는가 했더니 식사를 들고 왔다. 배도 꼬르륵 신호를 보내왔다. 뚜껑이 열리자, 달랑 접시 하나가 있었다. 맛있는 냄새와는 다르게 수프뿐이었다. 내 고기 어디 간 거지? 내 식성을 모르는 그가 아니었기에 눈을 크게 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카사는 안 받고 뭐 하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얼떨결에 접시를 받았다. 그러자 그는 떠났다.

“고기는?”

나의 혼잣말이 방 안에서 울렸다. 홀로 남겨진 나는 서러워 수프만 열심히 떠다 먹었다. 수프로 누구 코에 붙이라는 거야! 간에 기별도 되지 않았다. 고기를 먹고 싶다는 마음과 겸사겸사 주인도 보러 가자는 생각에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다. 좋아. 아무도 없지?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살금살금 나오려고 하는 순간 나의 걸음을 막는 목소리가 있었다.

“어디 가십니까?”

카사였다. 그는 내내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는지 내가 나오자 바로 앞을 막았다. 당황스러웠던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일단 접시.”

다 먹은 접시를 주자 카사는 그걸 받았고 옆에 지나가는 시녀에게 건네주었다. 이제 들어가라는 말에 나는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그…… 고기는? 배고픈데…….”

“안 됩니다.”

세상이 무너진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눈 하나 꿈적하지 않고 말했다.

“소화 안 됩니다. 한동안 수프로 참으십시오.”

“……그럼 주인 보러!”

주인을 졸라서 고기를 달라고 할 계획이었다.

“안 됩니다.”

“왜?!”

무슨 말만 하면 안 됩니다. 안 됩니다. 단호박이세요? 카사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전하께서 지시하셨습니다.”

“방 안에만 있고, 수프만 주라고?”

“네.”

정신이 혼미해졌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힌 것이었다. 결국, 밖에 나가기 무섭게 난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고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침대로 다이빙하여 베개를 품에 안고 뒹굴었다.

“아니…… 밥도 제대로 안 줘? 진짜 사람 됐다고 내가 싫어진 거 아냐??? 주인이 그럴 리가 없는데…….”

잠시 침울해졌다. 갑자기 어떤 데자뷔가 떠올랐다. 이런 일이 저번에도 있었던 것 같았다. 홀로 방 안에 있고 감시자는 없고…….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어젖혔다. 하필 방은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 잡았는지 높이가 상당히 놀았고 거센 바람이 불었다. 대충 견적을 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무리였다. 뒤에서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로 고개를 휙 돌렸다. 카사가 떡하니 서 있었고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가만히 있어 주세요.”

대답할 때까지 쳐다보는 시선에 결국 대답을 했다. 결국, 난 창문 사이로 노을빛이 들어올 때까지 문 쪽을 바라보며 침대에 앉아 있었다. 철컥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문틈으로 보이는 흑발이 보이자 달려갔다.

“주인아!!”

“슈이렌.”

“아니 내 말 좀 들어 봐! 저 자식이 날 못 나가게 했다니까!”

“그렇구나. 카사, 그만 물러가도록. 수고했다.”

그는 내가 달려들자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지만, 방문을 지키고 있었던 카사에게도 수고의 한마디를 건네주었다. 날 못 나가게 한 카사에게 칭찬의 말을 했던 것이다. 카사의 말이 진짜였다. 주인이 시켰다는 게 진짜야?? 내 말을 들어준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그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내 표정을 보았는지 제르펠은 나를 이끌어 침대에 앉히고는 말했다.

“슈이렌. 한동안 방 안에 있어야 한다.”

“아니? 왜???”

“음…… 나를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를 노리고 있어. 미안하구나.”

제르펠은 웃음기를 머금은 표정으로 나에게 상냥하게 말했다. 그의 표정에 뭐라 말하지도 못하고 투덜거렸다.

“누가 우리 주인을 안 좋게 생각해? 이렇게 착한데. 대체 누구야? 내가 도와줄까!”

내 호기로운 말에 제르펠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눈꼬리가 고운 호선을 그렸다.

“마음은 고맙구나. 하지만, 넌 여기에 있으면 돼. 혹시 다치면 큰일이다.”

부드러운 미소와 달리 단칼에 거절해서 얼떨떨했지만 내 걱정을 하는 모습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쩔 수 없긴 한데…… 누구야?”

“음……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이 탐탁지 않은 자들이지.”

제르펠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그것보다 사람이 돼서 괜찮나?”

“어? 딱히? 어차피 나…….”

잠깐 이거 말해도 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주인은 날 처음부터 귀여운 뱀 새끼로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안에 있던 게 28년이나 묵은 사람이었다고 하면……. 그의 입장에서는 웬 아저씨가 자신에게 빌붙고 애교를 부린 꼴이었다. 나 같으면 당장 꺼지라고 했을 터였다. 얼굴이 찌푸려질 제르펠을 생각하면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혹시 모르니까!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오히려 주인이랑 이야기해서 좋은걸? 뱀일 때는 말도 못 했잖아…… 근데 이렇게 주인이랑 말이 통해서 좋고, 사람이 돼서 두 다리가 생겼으니까 주인한테 가는 것도 쉽겠다. 그치?”

난 제르펠에게 아부의 말을 끊임없이 해 주었다. 제르펠은 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 아부의 말은 필수지! 흡족해하는 제르펠을 보고 내 계획은 성공적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사람으로 사는 생활도 무난하게 흘러갈 것 같았다.

좋았어! 승리의 포즈를 하고 있던 나는 제르펠의 눈빛을 전혀 보지 못했다. 아마 그때 고개를 들어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빛을 보았다면 내게 이미 함락당한 지 오래라는 걸 빨리 알았을 것이다.

그는 내가 묻는 말에 일일이 대답해 주며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비는 3일 동안 꼬박 왔고 기우제는 성공 중의 성공이었다고 한다. 행렬 때 본 하얀 구처럼 보이는 게 영상구였는데 백성들과 귀족들 모두 그 행렬을 똑똑히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변하는 모습도.

“나도 볼래!”

난 힘을 받고 기절해 있었기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해졌다. 기대감에 눈이 반짝였다. 제르펠이 시선을 돌리더니 미소가 약간 흐려졌다.

“혹시 없어?”

“있긴 하지만…… 기다려라. 들고 오마.”

제르펠은 일어나더니 서랍 쪽으로 걸어갔다. 서랍이 열리고 자그마한 구슬 같은 것이 나왔다. 내가 보았던 하얀 구보다 훨씬 작은 크기였다. 이상하게도 제르펠의 기분은 가라앉아 있었다. 그 구슬을 마치 철천지원수를 바라보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이내 나에게 영상을 보여 주었다. 처음에는 흥미진진했지만…….

“아…….”

외마디 침음이 절로 나왔다. 영상 속의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이, 이게…… 전국으로??”

“그래, 다들 너에게 관심이 많단다. 신께서 사자를 내려 주는 일은 거의 없어서 상당히 잘 팔리고 있다더군…….”

그는 못마땅하게 혀를 차더니 말했다. 변신 보정을 기대한 내가 바보였다. 씨발. 이게 무슨 전국 망신이야. 나가 죽자……. 몰랐으면 부끄럽지도 않지 아주 수치사로 죽이려고 작정했나.

“그래도…… 폭우 때문에 잘 안 보이긴 하네…….”

안쓰러운 자기 위로였다. 제르펠도 그걸 알았는지 나도 충분히 영상구로 보았지만 상기시켜 주었다.

“망토로 감쌌으니 너의 나신을 본 자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위로에 안정되는 것도 잠시 속으로 눈물이 나오는 걸 참지는 못했다. 울상 지으며 다 보였다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쪽팔림에 이불을 가져다 이불 킥 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하지만 내 몸은 지나치게 솔직했는지 이미 이빨로 이불을 쥐어뜯고 있었다.

“쉬이. 이빨이 상한다. 음…… 너무 속상하지 말거라. 이번에는 어쩔 수 없다만 혹, 누군가가 본다면 말하도록. 다시는 보지 못하도록 처리해 주마.”

제르펠의 말에 화들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 말의 뜻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오죽하면 내가 잘못 들었나 라고 생각했다. 의미심장한 목소리도 한몫했다. 대체 어떻게 처리한다는 거지? 눈이 사정없이 떨렸다. 그의 기세에 더 속상해할 수도 없었다. 아니…… 진짜 그럴 것 같아서…… 눈빛이 진짜야.

얼떨떨하게 그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 제르펠의 눈에 실핏줄이 터진 게 보였다. 놀란 나는 그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아주 미세했지만, 그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완벽한 얼굴이! 나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그에게 물었다.

“뭐야? 눈 왜 이래?”

“아…… 한동안 잠을 안 잤더니 그런가 보군.”

그는 내가 걱정하는 투로 말하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만족스러워 보이기도 했고, 얼버무리기 위한 웃음으로도 보였다.

“잠을 왜 안 자?”

“네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니.”

말문이 막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럼 7일 동안? 난 입을 꾹 다물고 말없이 그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이불을 끌어 올려 가슴까지 덮어 주었다. 그의 가슴을 토닥여 줬다. 빨리 자라고 잔소리를 했다.

“눈에 실핏줄 터졌잖아. 잠은 꼭 자야지!”

나도 투덜거리면서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 가려고 했다. 멈칫했다. 이불을 살짝 든 채로 몸이 굳었다. 나 너무 태연하게 같이 자는 거 아니야? 뱀일 때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사람이 되니까 뭔가 부끄러웠다. 옆을 바라보니 이상한 표정으로 이불을 만지작거리는 제르펠이 보였다. 남이 베푼 친절이 어색해하는 것이 보였다. 찾아온 부끄러움에 그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확 감아 버렸다.

뱀일 때도 같이 잤는데 무슨. 남자끼리 무슨 내외해?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몸은 제르펠의 반대쪽으로 돌려 잠이 들었다. 괜스레 옆에 신경이 쓰였다. 불편한 마음에 이리저리 뒤척거렸다. 한참을 눈을 감고 잠을 청했을까 의식이 점점 멀어졌다.

* * *

제르펠은 등을 돌린 채로 색색거리며 자는 슈이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슈이렌 너는.”

사실 사람이 되면 자신을 떠나지 않을까 걱정했다. 생겨 버린 두 다리로. 세상에는 신기한 것이 많으니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할지도, 아니면 수신의 사자니 호수로 돌아갈 수도, 신의 부름을 받았다는 말하면서 신전으로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걱정과 다르게 슈이렌은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며 주인이라 부르면서 품에 안겨 왔고, 자신의 걱정도 해 주었다.

얼마나 기쁘던지. 사람이 되어서도 슈이렌은 변함없이 나를 똑바로 주시했다. 그 눈동자 속에는 나를 향한 애정이 가득했다. 웃음을 짓는 것도 애교를 부리는 것도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빨리 기우제를 치르지 않은 자신을 원망했다. 침대 사이로 흐트러져 있는 머리카락을 모아 끝에 살짝 입을 대었다. 귀찮게 슈이렌의 알현을 요청하는 자들이 넘쳐났다. 그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것이다. 교황이나 황제든 누구에게도. 처음부터 나에게 온 아이였다.

지금도 봐라.

“으음…… 주인아…….”

자신의 온기를 찾으며 안겨 오지 않는가.

뱀이었을 때의 습관은 여전한지 제르펠의 품을 찾아 들어왔다. 슈이렌은 목에 둘러 낮잠 자는 게 취미였고, 자는 도중에 온기를 찾아 얼굴을 비벼왔으니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안겨 오는 슈이렌을 마다하지 않고 안아 주었다.

이런 아이를 누가 탐내지 않을까. 자신의 마음조차 훔친 아이였다. 겨우 생긴 나만의 것. 내 안식처였다. 그 누구에게도 빼앗길 생각은 없었다.

철저하게, 눈치채지 못하게, 안락한 성을 만들자. 원하는 건 다 손에 쥘 수 있도록, 자신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자신의 곁에서 안주할 수 있도록, 내 것이 될 수 있도록.

오늘도 잠은 글렸군.

그리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서로에게 기대어 자는 자세는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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