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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주인과 보내는 한가한 오후였다. 드디어 내일은 기우제였다. 그동안 주인이 얼마나 바빴던가…… 이제 내일이면 드디어 끝이었다. 대부분의 준비는 끝났고 이제 마지막 검토만 남아 있었다. 제르펠은 서류를 검토했고 난 그의 목에 둘려져 있었다.
창가 사이로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과 그의 온기가 느껴졌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면서 세드릭이 곤란한 표정으로 제르펠에게 말했다.
“황비마마께서 오셨습니다.”
그 말에 제르펠의 목울대가 울렁이는 걸 느꼈다. 평화로웠던 하루가 갑자기 깨지는 소리가 났다. 제르펠의 반응에 나도 고개를 들었다. 황비? 그는 조용히 서류를 내려놓았고 한 여인이 들어왔다. 보고 바로 알았다. 그녀가 제르펠의 어머니라는 것을. 모자지간이라는 걸 알려 주는 흑발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처음 보는 그의 어머니의 방문이었다. 붙어 있던 지가 석 달이 넘어가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황후의 아들은 아닌 게 판명이 된 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석 달이 넘어가는데 한 번쯤은 찾아오지 않나? 혹시 돌아가셨나? 라고도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녀는 황비라고 하기에는 수수한 옷차림이었다. 장신구도 겨우 머리에 꽂은 장신구뿐이었고 그 장신구마저 오래된 것인지 빛바래 있었다. 황비는 따르는 시녀도 없이 혼자서 집무실에 찾아왔다. 황태자의 어머니라고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행색이었다. 제르펠에게 인사의 말도 없이 그녀는 우아한 걸음으로 소파에 앉았다.
난 확실했다. 이거 100% 복잡한 사연 있다. 주인의 상태도 좀 이상하고…….
결국, 제르펠과 나 그리고 그의 어머니만 집무실에 남겨졌다. 잠시 이안이 들어와 그녀에게 차 한 잔을 내어준 것이 다였다. 제르펠은 소파로 갈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아 있었고 황비도 말없이 소파에 앉아 차만 홀짝이고 있었다. 그 고요함에 내가 오히려 몸이 근질거렸다. 차가 반쯤 남았을까 찻잔의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던 황비가 말했다.
“강녕하셨습니까.”
그 말은 도저히 아들에게 건네는 말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건조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반응에 제르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들의 태연한 반응에 오히려 나만 눈을 굴리며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입니까? 어머님.”
“……단지 얼굴이라도 볼까 해서 왔습니다.”
“그렇습니까.”
제르펠의 말에 황비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저 말을 듣자면 제르펠의 어머니는 안부를 전하러 온 것이었다. 하지만 잠깐의 침묵이 안부가 찾아온 목적의 전부임이 아님을 알게 해 주었다. 그 뒤로 또다시 침묵이었다. 제르펠은 태연하게 서류를 보고 있었지만 동공이 움직이지 않아 서류를 읽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나는 가라앉은 분위기에 몸을 움찔거렸다. 긴장감으로 입이 쫙 마르는 느낌에 혀만 날름거렸다.
내 낮잠 시간…….
이 분위기에 잠을 자기는 힘들었다. 이왕 이리 된 거 주인의 어머님이나 보자며 얼굴을 쭉 내밀었지만, 그는 나를 푹 숙이게 하였다. 손을 치우기 위해 머리로 밀기도 했지만 꼼짝을 안 했다. 저리 비키라며 이리저리 꿈틀거렸지만 아무리 움직여도 제르펠의 손바닥 안이었다. 그녀는 그런 모습을 지켜보더니 아주 작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 순간 제르펠의 손이 움찔하며 살짝 떨렸다. 아마 집무실이 고요하지 않았으면 들리지 않을 웃음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자 공중에서 그가 손에 힘을 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손등으로 보이는 핏줄이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지 보여 주었다. 저러다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남을 게 분명했다. 머리로 그의 손을 툭 쳤다.
왜 그래??
난 걱정스럽게 그를 쳐다보았다. 평소의 주인이 아니었다. 흔들리는 그의 동공이 말해 주었다. 제르펠과 시선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그제야 손의 힘이 풀렸다. 난 그 사이를 파고들어 얼굴을 비볐다. 자세히 모르지만 지금 주인은 불안해 보이기도 했고, 슬퍼 보이기도 했다. 주인의 어머니지만 마음에 안 들었다. 제르펠이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건 분명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웃더니 다시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는 말했다.
“신의 사자님은 귀여운 분이시네요.”
그 말과 동시에 그녀의 눈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주인의 눈매가 누굴 닮았는지 알 수 있었다. 주인이 나를 다정하게 볼 때의 눈빛과 똑같았다. 그녀는 다시 차로 시선을 돌리더니 입술 자국이 묻은 곳을 닦으며 말했다.
“이제 드디어 내일이네요. 전하의 소식은 황궁 내에서 전해 듣고 있었습니다. 많은 귀족을 처단하셨다고 하더군요. 폐하께서도 확실한 증거 탓에 전하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겠죠. 거기에 베르트 공작까지 전하의 편을 들어주었다 들었습니다. 정말…… 훌륭하게 자라셨습니다.”
그녀는 긴말을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목이 탔는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입이 벙긋거리는 것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듯했다. 오랜 침묵에 제르펠이 먼저 말을 건넸다. 심신의 안정을 찾는 것처럼 끊임없이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말씀을 하시러 오신 겁니까?”
그녀는 다 마셔 버린 차를 바라보다 살짝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전 전하를 전쟁터에 보낸 걸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상황이 온다면 같은 선택을 할 테지요.”
“걱정하지 마시기를. 그때는 제가 어려 어머님의 뜻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그때의 결정을 이해합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황비의 심정을 대변해 주었다. 둘의 심각한 분위기에 괜히 나 또한 위축되었다. 전쟁터에 보냈다고? 당연히 황제나 황후가 보낸 줄 알았다. 거기에 황비도 동참했다는 뜻일까? 주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이유가 있었다.
“그렇습니까…….”
그녀의 입이 벙긋거리자 제르펠이 먼저 말했다.
“더는 기대는 일은 없습니다.”
그를 위로하듯 머리를 그의 목에 파묻었다. 무엇보다 그 말을 하는 제르펠이 다시 손을 꾹 움켜쥐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는 일어났다.
집무실 문 앞에서 문을 열고 나가려 손을 뻗던 그녀는 뒤돌아보았고, 제르펠에게 살포시 치맛단을 잡고는 허리를 숙였다. 그녀는 허리를 숙이되 절대 과하지 않게 숙였다. 그런 태도가 의도를 더욱 짐작하지 못하게 했다. 선을 확실하게 그은 말과는 사뭇 달랐다. 아들이 아닌 황태자로서 공손한 예를 표한 것도 아니었고, 아들이기에 한 가벼운 인사도 아니었다.
“기우제가 성공하기를 마음속 깊이 빌고 있겠습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였지만, 말이 끝나자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제르펠은 기운이란 기운은 다 빠진 듯 의자에 푹 기대었다. 이안은 밖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녀가 나가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오려고 했다. 하지만 제르펠의 모습에 잠시 시간을 주는 게 좋을 거로 생각했는지 비어 있던 찻잔만을 치우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는 한참 동안 팔로 얼굴을 가리며 의자에 기댄 자세 그대로 있었다. 그렇게 기운 없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난 지금 말을 할 수도 없는 뱀이었다. 나는 그의 목을 감싸면서 꼬리로 그의 머리를 토닥였다. 그러자 그는 팔을 치웠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나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부담스러웠던 나는 눈을 돌려 피했지만, 일정하게 움직이는 꼬리는 변함이 없었다.
원래 사는 게 그런 거야. 힘내라고.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던 그가 일어났다. 창문 앞에 서더니 태양을 향해 손을 뻗더니 손을 움켜쥐었다.
“기우제 따위 성공해 보일 것이다.”
나에게는 동시에 태양을 잡아 보겠다는 말로 들렸다. 그는 먼 곳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결심이 깃들어 있었지만 내 눈에는 그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그는 나와 얼굴을 맞대더니 말했다.
“같이 살아남자. 죽지 않고…… ”
당연한 소리! 죽을 생각 1도 없어! 너가 살아야 나도 산다고! 그니까 죽으면 안 돼. 죽으면 누가 날 책임져? 너도 절대 죽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일단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내가 할 일은 하나였다. 난 열심히 그의 볼에 얼굴을 비비기도 하고 혀를 날름거리며 볼을 핥아 주기도 하였다. 그를 즐겁게 하려고 오두방정을 다 떨었다. 그러자 그는 풀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나도 미소가 지어졌다.
어휴. 이제 좀 괜찮니?
그는 온기를 갈구하듯 나의 몸을 두 손으로 잡더니 자신의 얼굴을 파묻었다. 목도리처럼 둘려져 있으니 진짜 목도리 취급이었다. 평소와는 입장이 반대로 된 듯 내 비늘에 얼굴을 기대 비비기도 했다. 좀 귀찮은 마음에 피하려다가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에 어리광을 받아 주었다.
“슈이렌 넌 계속 나랑 같이 있어 주렴.”
하지만 비늘에 느껴지는 뜨거운 숨과 입술의 움직임이 나를 오싹하게 했다. 따뜻한 온기라면 이미 충분히 익숙해졌을 텐데 그의 숨을 쉴 때마다 닿는 뜨거운 온기는 또 색다른 느낌이었다. 닿은 부위가 뜨거웠다. 기분이 오묘해졌다.
얌마! 그만해!! 어디에다가 입술을 비벼?
방금의 기분을 떨쳐 내듯이 온몸을 흔들었다. 입술이 닿은 부위가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제르펠의 목 주변을 빙빙 돌며 비늘을 비비며 기분을 떨쳐 내려고 했다. 그런 나의 몸짓이 귀여운지 제르펠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 자식이 너 때문인지도 모르고. 뭐, 기분 풀렸으니 됐지.
불만스러웠지만 즐거워 보이는 그의 모습에 오늘도 반려동물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 같아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