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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생-13화 (13/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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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인이 이상하다.

저번의 산책 이후로 제르펠의 태도가 묘하게 바뀌었다. 항상 내가 그의 옷깃이나 다리에 매달리면 데려가고는 했는데 이제는 나를 항상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이상하게 웃음을 짓는 일이 많았다. 이게 다 내 노력의 결과지 하며 뿌듯해하다가도 너무 귀찮기도 했다.

한번은 떨어지라고 몸을 바둥거려도, 위협을 하며 쉭쉭 소리를 내어도 귀엽다며 쿡쿡 웃기도 했다. 어이가 없어 멍하니 보게 되었다. 게다가 눈에만 보이면 비늘을 만지작 몸을 만지작 꼬리를 만지작 아주 귀찮아 죽겠어.

오늘도 제르펠은 나를 챙기고 회의실에 갔다. 아무리 매달려도 회의 갈 때는 나를 두고 가던 인간이 맞나 싶기도 했다. 하필 그 시간은 낮잠을 자는 시간이었다. 난 쿠션 위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다 썼다.

혼자 가! 난 낮잠 잘 거야!

제르펠은 나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힘을 주어 당기자 내가 온갖 힘을 다해 쿠션을 물고 있었던 게 무색하게 툭 하고 떨어졌다. 눈을 똥그랗게 뜨고 반항했지만 벌써 회의실이 내 눈앞에 있었다. 도착한 회의실에는 귀족들이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황제가 있나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황제로 보이는 인물은 없었었다. 아무래도 귀족들만 모여서 하는 회의인 것 같았다. 제르펠이 도착하자 논의를 시작했고 그들은 최신 정세에 관해 이야기했다. 결국 빼지도 못하고 갑갑한 회의실에서 정치 이야기나 듣게 되었다.

나는 주인의 무릎에 살포시 얹혀 있었다. 살짝 위로 고개를 내밀면 순식간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가만히 무릎 위에 있는 게 상책이었다. 내가 빼꼼 거리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물었다.

“전하……. 그런데 그 뱀은?”

“슈이렌이라고 한다.”

“네? 아…… 네…….”

귀족들이 묻는 바를 모를 리가 없을 테지만 그는 내 이름만 말했다. 어리둥절한 귀족들을 무시하고 논의를 이어 갔다. 보지 않아도 이곳에 왜 뱀이…… 라는 물음이 숨겨져 있을 게 뻔했다.

진짜 벗어나고 싶다…… 내가 왜 아저씨들의 관심을 받으면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그냥 조용히 밑으로 빠져나가자고 생각했지만 빠져나갈 낌새가 보이면 그는 다시 나를 무릎 위에 올려 두었다. 그간 너무 나태하게 지내서 나를 운동시키려는 고도의 작전인가 싶기도 했다. 내가 계속 빠져나가는 시도를 하자 제르펠이 따끔하게 말했다.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았으니 얌전히 있으렴.”

너가 말하는 상처가 설마 이제 쥐꼬리만큼도 남지 않은 상처를 말하는 거니? 내 자유가 침해되는 것 같아 눈물이 나왔지만 제르펠이 나를 좋아해서 이러는 거라며 자신을 토닥거렸다. 한숨이 나오는 걸 꾹 참았다.

그들은 제르펠을 중심으로 두고 말하는 거겠지만, 그의 무릎 위에 내가 있으니 중심이 나인 것 같았다.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심적인 부담감이 상당했다. 하지만 어느새 나는 잊히고 그들은 기우제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벌써 기우제를 한다고 소문이 다 퍼진 것 같습니다. 근 반년째로 이례적인 가뭄이었으니 관심이 남다릅니다.”

“전쟁 자금이라는 명목으로 세금을 떼어 내고 거기에 기근까지…… 백성들의 삶이 말이 아니었으니까요. 관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전하께서 전쟁을 종결시켰기에 사태가 더 심각해지지는 않았습니다만, 내년에는 비가 꼭 와야 합니다.”

그들은 알게 모르게 제르펠에게 아첨을 했지만, 변함없는 그의 반응에 괜히 헛기침하며 본론으로 돌아왔다. 오히려 내가 그 말에 뿌듯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장하다. 장해. 기우제에 대해 제르펠은 정작 아무 표정의 변화가 없었지만 귀족들은 근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것보다 조사는 어찌 되었지?”

제르펠 뒤에 서 있던 이안이 서류 뭉치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한 장씩 훑어보았다. 그 서류는 부당하게 세금을 높게 잡아 자신의 재산을 축적한 귀족들의 목록이었다. 그게 어찌나 길던지 한 장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딱 봐도 그 명단의 전부를 처리한다면 이 제국 귀족의 1/3은 날아갈 게 분명했다.

쭉 들어 보니 역시나 제르펠이 궁에 돌아온 지가 별로 안 되어 보였다. 에이든을 보고 황후랑은 대립하고 있다는 걸 확신했는데, 황제랑도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았다.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사실이란 걸 알게 되자 마음이 답답했다. 좋아. 이미 한배를 탄 거 도와줘야지! 그의 반려동물이 된 난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 동시에 그가 잘돼야 나도 잘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도울 일이 있다면 성심껏 해야지!

슬쩍 몸을 빼 탁자 위로 쓱 올라갔다. 말하던 이들의 시선이 집중된 건 분명 착각일 것이라 믿었다. 그들은 부족해진 식량 문제로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비가 온다고 하더라도 작물이 자라는 동안의 식량이 부족한 것이다. 지도를 본 나는 제국이 바다와 인접해 무역하기 편한 나라라는 것을 알았다. 무역이 활발한지 지도에 자세한 루트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때 이안이 뒤에서 헛기침하더니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나에게 시선을 뺏겼던 사람들도 아차 싶었는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이안은 좋은 방안이 있다며 의견을 제시했다.

“전하. 식량을 다른 나라에서 사들이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쟁 때 영지민들에게 과한 세금을 부친 귀족들이 많으니 그들에게서 충당하도록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충분할 듯한가?”

“네. 저번 회의 때 보니 귀족들의 장식품이 화려한 것이 많더군요.”

음……. 잘 모르겠지만 해결된 듯하다…… 생각해 보니 내가 조언을 해 줄 처지가 아니었다. 말도 못 하는데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 주인도 내가 무릎에 뒹구니까 이렇게 좋아하잖아. 이게 내 역할이지 암. 빼꼼 내민 고개를 다시 제르펠의 무릎에 기대었다.

그런데 아까만 해도 차분하게 앉아 있던 몇 귀족들이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난 제르펠의 무릎에 있었다. 눈높이에 딱 맞았기에 고개를 돌리자 잘 보였다. 난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방법은 마련해 두었습니까? 증거는 확실하지만 현 귀족들은 백성들의 삶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세금으로 황제파를 이기는 것은 힘듭니다. 폐하께서도…… 눈감아 준 일이니까요…….”

“맞습니다. 그렇다면 찬성 수로 이겨야 하는데…… 회의 때 과반수의 귀족이 전하의 편을 들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저희가 그들보단 수가 밀려서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세금의 건은 넘어가심이…….”

어떤 귀족은 불안하게 눈을 떨며 제르펠의 의도를 떠보았다. 제르펠은 천천히 리듬을 타듯 나를 툭툭 두드렸다. 무언가를 가늠하듯. 사태가 안 좋은 건가……? 내가 그를 올려다보자 피식 웃음을 지은 그는 손으로 턱을 바쳤다.

“설마 내가 아무 생각 없을 줄 아는 것이냐? 세금에 관해서는 여기 있는 귀족들도 청렴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

서늘한 제르펠의 시선과 마주한 귀족들은 헛기침했다.

“한꺼번에 많은 귀족을 숙청할 수도 없지. 마음 같아서는 싹 갈아엎고 싶지만…… 그들도 이 제국의 일부가 아닌가?”

그의 날카로운 말에 침을 삼킨 한 귀족이 손수건으로 이마 옆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그, 그건 맞습니다. 귀족들의 반발도 상당하리라 생각됩니다.”

“세금은 보여 주기용이다. 이것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목은 조일 수 있지. 그다음으로 군자금은 어떨까? 여기에 아는 자는 알 것이다. 군자금이 공중으로 사라졌다는 것을. 이건 제국의 위신과도 관련된 사항이지. 알다시피 전쟁은 제국의 위신을 많이 떨어뜨렸다. 모두가 주목한 전쟁이었지. 그런 전쟁의 군자금 관리가 허술했다는 것은 다른 나라의 비웃음거리지. 암암리에 전쟁을 일으킨 황제라 하고 있지 않으냐. 죽어야 할 자는 죽지 않고 돌아왔으니 전쟁에 대해서라면 치가 떨리겠지.”

“하지만 증거가…….”

“그에 관해서도 조사는 완료되었습니다.”

이안이 자신 있게 나오자 주변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가능하다는 파와 불가능하다는 파로 나누어졌다.

“성공할 가능성이 있습니까?”

귀족은 조심스럽게 염려를 표했다. 제르펠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묵살당할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황제다. 나에게 모욕당한다고 생각할 터이지. 무엇보다 너희들의 발언도 중요하지 않느냐? 다수의 말을 무시하기는 힘들 테지. 그가 우리 편이 된다면 내 말을 쉽게 무시할 수는 없을 터.”

“그자는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리둥절한 귀족들을 보며 이안이 슬쩍 나섰다.

“사별의 슬픔으로 영지로 들어가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저희와 뜻을 함께한다면 중립 귀족들은 대다수가 저희의 편을 들 것이라 확실할 수 있습니다.”

“그, 그분을 말이 십니까? 그렇다면 저희에게 큰 힘이 될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 그래서 그에게는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것이다. 그 제안은…… 다들 알겠지? 반론은 받지 않는다.”

제르펠의 말이 끝나자 헉!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귀족들은 제르펠이 말하는 누군가를 짐작했고, 동시에 제안도 알고 있는지 어수선해졌다. 제르펠이 무시무시한 기백을 뿜으며 귀족들을 주시하자 귀족들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반대하는 자는 없었다.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계획에 핵심이 될 인물 같았다. 어딘가 가라앉은 분위기로 회의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 시종이 들어와서는 조용히 이안에게 귓속말을 하였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인 뒤 그를 물러서게 했다. 이안은 곧바로 제르펠에게 시종의 말을 전달하였다.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했던 나는 뒹굴던 걸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들리지는 않았다. 갑자기 그는 나를 품에 안아서 일어났다. 방금까지 열정적으로 논의하던 귀족들은 제르펠의 돌발 행동에 말을 잃어버렸다.

“저, 전하?”

“어느 정도 안건이 마무리된 듯하니 그만 해산하지.”

얼떨떨한 상황에 한 귀족이 제르펠을 불러 보았다. 그 소리에 잠시 멈추던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해산하자는 말과 함께 다시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귀족들은 허둥지둥 일어나 제르펠을 배웅했다. 남은 귀족들의 표정에서 황당함이 보였지만 그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영문을 모르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회의실에 나오자 집무실로 가는 듯했다. 아까와 같은 풍경이 보였기 때문이다. 회의 중에서 일어났으니 중요한 볼일이 생긴 것 같았다. 난 집무실로 간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가만히 그의 무릎 위에서 정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고난이었다.

따뜻한 햇볕과 함께 즐거운 낮잠을 잘 수 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회의실에 끌려간 뒤로 낮잠은 포기하고 있었는데 기회가 온 것이다. 오늘은 바람도 선선하고 햇빛도 딱 좋은 날이었다. 이런 날에는 낮잠이 필수라고 필수!

역시 도착한 곳은 집무실이 맞았다. 나는 좋아라 창문가를 꼬리로 가리키며 올려 달라고 제르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는 나의 자리를 만들어 주고 살포시 올려 주었다.

아싸! 낮잠!

“그는 어디 있지? 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는 주위를 보더니 이안에게 물었다.

“이제 오고 있을 겁니다.”

“그렇군. 슈이렌. 너의 시종을 붙여 주마. 원하는 게 있으면 다 요구하면 된단다.”

이제 와서 시종을 붙여 준다는 말에 어리둥절했다. 제르펠 만큼 좋은 집사가 없는데 다른 시종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원하는 걸 어찌나 잘 아는지 척척 해결해 주어서 편했다. 제르펠이 붙여 준다는 시종은 내 말을 알아듣기나 할지가 의문이었다.

근데 시종은 갑자기 왜?? 주인이 들어주면 되잖아.

그의 말에 필요 없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웃으며 큰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더니 손가락으로 조심히 쓸어주었다.

“그렇다고 나보다 좋아하면 안 된다.”

그는 섭섭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정하게 속삭였지만, 어쩐지 목소리가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무슨 일인데? 그의 답을 재촉하듯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이야기했다.

“일이 바빠. 너랑 잘 놀아 주지 못할 것 같구나. 하루빨리 치워 버리든가 해야지…….”

그는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일?? 아까 회의에서 이야기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백성들의 식량 문제와 귀족들을 쳐내는 것도 다 절차나 과정이 필요할 테니 일이 바빠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참을성도 중요하지. 주인이 돈 벌어 온다는데 응원해야지.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고 꼬리를 쭉 뻗었지만, 나의 계획은 꼬리의 짧음으로써 무산되었다. 꼬리가 짧아 슬픈 짐승이여…… 하지만 제르펠이 눈치 좋게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었다. 그제야 꼬리가 그의 머리 위로 안착했다. 꼬리로 그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거리가 가까운 만큼 그의 눈매가 부드럽게 풀어지는 게 잘 보였다.

그러자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내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내 이마에 짧게 입맞춤을 하더니 그 부위를 손가락으로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당황한 나는 눈만 껌뻑였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방금 뭐야!

깜짝 놀란 나는 펄쩍 뛰며 꼬리로 손을 탁 쳤다. 그러고는 머리를 푹 바닥에 박고 몸으로 감쌌다. 그는 단순히 반려동물에게 하는 뽀뽀일 테지만, 이마에 입맞춤을 받아 본 적이 없는 나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상쾌한 그의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어쩐지 고개를 들기가 어려웠다.

왜 갑자기 뽀뽀하고 난리야…… 깜짝 놀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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