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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떡하니 벌린 채 눈앞에 있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머리가 어지럽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차원 이동에 뱀으로 환생했던 것이다. 애초에 차원 이동을 시켜 줄 거면 사람으로 해 달라며 소리쳤지만 나오는 건 쉭쉭거리는 소리뿐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뱀생이 뭐야?!
신에게 원망만 쌓이고 있었다. 이 정도면 말은 통한다는 거에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꼼짝없이 이세계에서 뱀으로 살게 되었다. 허탈함에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왠지 좌절하거나 걱정하면 나를 여기 보낸 자의 의도로 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졌다. 뱀생? 좋다 이거야! 일하는 것도 싫었는데 딱 좋지! 보기 좋게 잘 살아 줄 거라며 굳은 다짐을 했다.
난 눈앞에 있는 제르펠이라는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는 아이펠트 제국의 황태자인 것 같았다. 옷도 화려했고 말투도 차분하고 근엄했다. 거기에 똑똑히 태자전하라 부르는 소리도 들었다.
태자 전하란 무엇인가? 나중에 황제가 될 인물. 즉 권력과 돈의 상징이었다. 아직은 일인자는 아니어도 한 손에 뽑는 사람이라는 건 확실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이런 뱀생으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황태자에서 빌붙는다면 말은 달라진다. 떠오르는 계획에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일어난 일 호의호식하게 해 줄 황태자에게 빌붙어서 살겠다!
좋았어! 너로 정했다! 넌 앞으로 나의 주인……?
주인이라는 단어는 좀 부끄러웠지만 내 말이 그들에게 통하는 것도 아니었다. 호칭 문제로 더 골 때리기 싫었기에 간편하게 정해 버렸다. 정 없게 이름을 찍찍 부르는 것은 좀 아니지 않는가. 특히 나를 호의호식하게 해 줄 사람이었다. 나름의 애정을 담긴 호칭을 선물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자고로 개 팔자가 상팔자! 고양이 팔자가 상팔자! 뱀 팔자가 상팔자!
완벽한 계획에 무척이나 뿌듯해 있었지만 큰 문제가 있었다. 그가 나를 데려가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잠시 고민하던 난 몸을 최대한 몸을 쭉 내밀며 다가갔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는 내 움직임을 눈으로 쫓을 뿐이었다. 이게 아닌데…… 보통 애완동물이 하는 행동을 떠올렸다.
애교! 애교를 부리자!
생각이 난 것은 좋았지만 뱀의 애교가 무엇이 있을지 골똘하게 생각했다. 개나 고양이라면 배를 보일 텐데…… 난 하필 뱀이었다.
핥을까…….
그리 한참을 고민하고 있던 나에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리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는 손을 내민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 정신이 빠진 것도 잠시 머리를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우리 주인님이 나를 부르신다!
난 제르펠이 내민 손 쪽으로 슬슬 기어갔고 조심스레 머리를 갖다 대었다. 한번 슬쩍 눈치를 보았다. 표정의 변화가 없어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의문이었다.
살기 위해서라면 애교 정도야 쉬운 죽 먹기지.
결심한 난 곧 주인이 될 제르펠에게 적극적으로 어필을 했다. 손에 얼굴을 비비면서 혀를 내밀어 할짝거렸다. 그러자 뭔가 달달하면서도 시원한 맛?이 느껴졌다. 뱀은 혀로 냄새를 맡는다더니 조금 신기한 감각이었다. 손바닥은 굳은살이 잔뜩 박여 있었고, 투박했다. 옆에 차고 있는 검을 보고 검에 의한 굳은살이라는 걸 짐작했다.
거부하지는 않는데…….
힐끔 제르펠의 눈치를 보고 난 아예 손위로 슬금슬금 올라가 그의 손목을 내 몸으로 감았다. 내가 계속 혀를 날름거렸는데 그게 손에 닿아서 간지러웠는지 그는 낮게 쿡쿡 웃었다. 웃는다는 건 그래도 싫어하지는 않는 듯했다. 그는 미동도 없이 지그시 지켜볼 뿐이라 불안했다.
어떠냐? 귀엽지?…… 아닌가? 왜 반응이 없지?
뱀을 싫어하는 사람 중에는 반들반들한 촉감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실제로 친구 집에서 뱀을 처음 보았을 때 건들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내 완벽한 계획이 와르르 무너졌다. 또 손목이 두꺼운지 내 몸이 짧은 건지 매달리는 것이 힘이 들어 몸이 살짝 떨렸다. 전생에서도 키가 작은 것이 콤플렉스였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속으로 새끼라 그런 거라며 애써 마음을 달랬다.
“한낱 미물에 관심은 없었는데…… 나름 괜찮군.”
미. 물? 참 표현도 곱상하시군요.
충격적인 발언에 어안이 벙벙했다. 어처구니가 없어 쉭쉭거렸다. 거기에 미물? 그래…… 이제 뱀이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감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더구나 귀엽게 보이려고 자존심 따위 바닥으로 던지고 몸을 배배 꼬고, 혀를 할짝댔는데 돌아오는 말이라고는 괜찮군. 한마디였다. 내 모습은 본 적은 없지만 귀여울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다. 백사라며? 거기에 새끼면 뭐든지 다 귀엽지!
그런 나를 바라보던 제르펠은 조심히 한 손가락으로 머리를 툭툭 쳤다. 순간, 이 자식이 나를 친 건가 했지만 조심스레 머리를 쓱쓱 쓸어주는 것이 아무래도 쓰다듬는 것 같아 가만히 있었다. 사람이었을 때는 머리를 만지면 기분이 나빴지만 지금은 나름 괜찮았다.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슈이렌. 앞으로 너의 이름은 슈이렌이라고 하지.”
그 말을 듣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고는 속으로 이제 의식주는 보장이 되었다며 기뻐했다. 추위에 계속 떨고 있었던 몸이 따뜻한 온기에 닿자 잠이 쏟아졌고 살 곳을 마련했다는 안도감에 긴장의 끈을 놓았다. 그와 동시에 스르륵 잠이 들었다.
* * *
“능구렁이 같으니.”
눈앞의 아름다운 남자는 한 서신을 보고 있었고 그 서신을 건네준 자는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내 그는 피식 웃으며 서신을 던졌고 한 장의 종이는 나풀거리며 탁자 위에 떨어졌다.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탁자를 손가락으로 치기 시작했다.
“전하.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기우제가 성공한다면 분명 전하의 기반은 더욱더 단단해지게 될 것입니다.”
“해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하는 게 좋겠지. 하지만 실패하게 된다면…… 그래, 그자는 어디에 있지?”
“일단 응접실에 모셨습니다.”
“흠.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기다리게 만들어도 어찌할 도리가 없지? 안 그런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고 이안은 무슨 뜻이든 따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 행동은 긍정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네가 고생이 많군.”
“아닙니다. 전하를 보좌하는 것이 제 일이 아닙니까.”
이안은 고개를 숙인 채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르펠은 비웃음을 가득 담고 말했다.
“참으로 어리석어. 겨우 신을 믿고 나대는 자가. 대체 어디에 신이 있다는 걸 증명할 수가 있지?”
“그렇지만 무시는 할 수 없습니다. 신성력을 다룰 수 있는 자가 줄어 세력이 약해진 건 맞지만 반대로 그만큼 귀한 능력이 되었으니까요.”
제르펠은 몸을 돌려 서신을 보았고 거기에는 기우제를 지내야 한다고 소견을 올리는 교황의 말이 적혀 있었다.
확실히 신성력은 병이나 상처를 낫게 해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숫자가 줄어들고 세력이 줄어들었지만 교황은 오히려 그것을 빌미로 귀족들에게는 많은 기부금을 평민에게는 큰돈을 요구했다. 세상에는 알 수 없는 병들이 많으며 그런 병에는 신성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신전은 이용하기는 하지만 그 덕분에 민심이 더욱 멀어져갔다.
“이때다 싶어 발버둥을 치는군.”
“유례없는 가뭄이니까요. 벌써 백성들 사이에서 안 좋은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서신에는 제르펠이 기우제를 주최했으면 좋겠다며 콕 집어 적혀 있었다. 자신의 주최로 이루어지는 기우제였다. 제르펠은 기우제를 치른다 하더라도 비가 올 거라고 믿지는 않았다. 그랬기에 계속 미루던 것이었다. 민심이 흉흉한 시기에 기우제가 실패한다면 좋은 먹잇감이 되겠지. 그걸 고려한 서신이다. 의외인 점은 교황도 동참했다는 것. 제르펠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다만 의심이 되는 것은 실패했을 때 닥칠 후폭풍에도 신전이 빠질 수 없다는 점이다. 분명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이라 추측되었다. 황제 쪽에서 좋은 거래를 제시했겠지.
예로부터 아일펠트는 물이 풍족한 나라였다. 항상 농작물은 풍족하게 자랐고 거기에 바다와 인접하여 무역하기에도 무척 좋은 지형이었다. 백성들은 수신의 존재를 굳게 믿었고 그로 인해 옛날에 신전은 황실과 비슷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서로 공존을 하는 것이다. 서로 이득만 취한다면 나쁜 것 없는 관계였다.
제르펠은 혀를 찼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무조건 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신성력은 유용한 힘이었다.
“하지만 척을 지는 게 답은 아니지. 세력이 약해졌다고 한들 백성들은 수신의 존재를 믿고 있으니. 신성력은 이용 가치도 있고 애초에 신전을 없애는 건 위험부담이 커. 황제는?”
“전하를 믿는다고 하십니다.”
“그렇군. 실패한다면 나를 끌어내릴 계기가 생기는 것이니.”
그는 지금 아이펠트 제국의 황태자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장담은 할 수 없었다. 그것이 황궁이기에. 실제로 전쟁터에 내몰린 적이 있었다. 한때는 황제가 막무가내로 자신을 황태자의 자리에서 내쫓으려고 했지만, 그 대상이 아기였다. 심지어 몸도 약해 오늘내일하는 상태였다. 아무리 황제와 황후의 자식이라지만 죽을지도 모르는 아기를 황태자로 세운다면 주변 국가에서도 우습게 볼 수 있었다. 그 당시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기에 더욱 조심했다. 중립 입장과 보수적인 귀족들 덕분에 겨우 자리를 보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꼼수를 써 전쟁이 일어나자 황태자로서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며 자신을 떠밀었다. 본심을 죽기를 바랐을 터 하지만 오히려 그 덕에 이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으니 황제 입장에서는 눈꼴이 시릴 만도 했다.
“이제 내 아우님도 10살 정도인가.”
그는 자신의 동생을 떠올랐지만, 겁에 질려 피하던 동생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픽 웃었다.
“아무래도 내 아버지께서는 아우님이 오르길 바라는 모양이야.”
비록 단어가 빠졌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한 이안은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제르펠은 비웃음을 날렸다. 이미 황궁 내에서 소문이 쫙 퍼졌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와의 결실이니 무엇이든 안 주고 싶을까.
‘대부분의 일은 나에게 떠넘기면서 계속 날 끌어내리려고 하니. 어이가 없는 일이지. 자신이 후계자가 필요해 어머니를 황비의 자리에 앉혔지 않는가?’
잠시 생각하던 제르펠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겨울이지만 햇빛은 쨍쨍하고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궁에 도착하고 쫓기듯 서류를 정리하느라 통 휴식을 취한 적이 없었다. 평소에 산책을 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산책이 하고 싶어졌다.
“잠시 산책이나 하지. 손님에게는 내가 무척이나 늦을 예정이니 가든 기다리든 자신의 선택이라 말해 두거라.”
“네. 알겠습니다. 세드릭 님을 부르겠습니다.”
“두어라. 잠시 나갔다 오는 거다. 그 녀석은 시끄러워”
“다 충성심에 그러는 거지요. 게다가 지금은 조심해야 할 시기입니다. 며칠 전의 일을 잊으셨습니까.”
이안은 물러날 수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지막이 한숨을 쉰 제르펠은 알아서 하라고 이야기했다. 이안은 조용히 물러갔다. 앉아 있던 그는 일어났고 산책하러 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전하. 아직 세드릭 님이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잠시 기다리지요.”
방문을 열고 나오는 제르펠에게 집무실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말했다.
“정원으로 오라고 해라.”
“그럼 저라도…….”
“되었다. 오더라도 넌 짐이다.”
기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굴러온 시간이 그에게 뛰어난 검술 실력을 갖게 하였고, 그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자는 세드릭뿐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기사는 제르펠의 뒤를 따라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리며 세드릭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렸다.
정원은 겨울이란 계절이 무색하게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꽃이 너무 피어 있어 향기가 코 끝을 찔려 지독했다. 정원에 자주 오지도 않으니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중 화단에 자리를 잡고 있는 꽃을 보았다. 작은 꽃송이들이 여러 색채를 뽐내고 있었다. 익숙한 향기였다. 옛날 어머니의 정원에서 자주 보았던 꽃이었다. 어머니였나. 그는 가슴이 착잡해지는 걸 느꼈다.
그는 걸어가던 중 주위에서 뱀 하는 소리가 들렸다. 며칠 전에 있었던 사건이 생각났다. 이안이나 세드릭은 난리를 쳤지만 정작 그는 자신을 겨우 독으로 어찌해 보겠다는 생각이 웃길 따름이었다. 실제로 효과도 없었다.
제르펠은 소란스러운 곳으로 좀 더 다가갔고, 들어 보니 술이니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 그의 눈앞에 정원사가 자루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원사는 제르펠을 보고는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자루를 떨어뜨렸고 그 자루는 생물체가 있다는 걸 알리듯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제르펠을 찾는 세드릭의 목소리가 들렸고 손을 들어 그에게 신호를 주었다. 세드릭은 냉큼 옆으로 달려왔다.
그사이 자루에 있던 물체가 꿈틀거리며 나왔고 마치 공기를 마시듯이 고개를 하늘로 쭉 내밀더니 이내 휙휙 돌리면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새하얗고 작은 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