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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빡.
헉!! 잠깐 여긴 어디지?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풀이었다. 그것도 무지막지하게 커서 시야를 가득 채워 하늘조차 보이지 않았고 흙내음이 확 느껴졌다. 아무리 주위를 봐도 내 방은 아닌 건 확실했다.
아니……. 대체 여기 어디야? 주위가 녹색…… 풀? 풀인가? 근데 저리 크다고? 거기에 어찌나 추운지 몸이 덜덜 떨렸다.
누가 납치해서 나를 여기에 떨구고 간 건가 생각했다. 하지만 대체 나를 왜? 만약 그렇다면 분명 기억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길을 가는 도중 중간에 쓰러져서 잠들었다는 말인데…… 우리 집 근처에 이런 데가 있었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앞이 흐릿해지며 머리가 어지러웠다.
뭐지? 대체 무슨 일이야? 혼란스러워하는 내 머릿속에 한 기억이 떠올랐다.
난 분명히 회사에 출근하고 첫 월급 받은 기념으로 친구들과 술집에 가서 거하게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자주 가는 술집이라 주인아저씨가 단골 기념 서비스라며 자기가 직접 담그신 뱀술을 주셨다. 그 술을 친구들과 나누어 먹었던 기억은 선명했다. 술을 부어라, 마셔라 마셨는데 담금주가 어찌나 독했는지 내 주량을 넘었었고 과하게 취해 버렸다. 술기운에 비틀대며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초록색 불이 들어오는 걸 확인하고 길을 건너던 중 경적이 들렸지만, 술에 떡이 된 몸은 따라 주지 않았다.
차 운전사가 깜짝 놀라 운전대를 돌리는 모습과 그 차창에 비친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뒤에 느낀 건 몸이 뒤틀리는 고통이었고, 보인 건 보름달이 뜬 밤하늘이었다. 그 고통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난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말이었다.
맞다. 차에 치였지…….
분명히 차에 치였지만 의식이 있는 거로 봐서는 산 것 같았다. 하지만 사고는 아스팔트 위에서였지만 현재의 나는 흙내음이 느껴지는 땅바닥에 있었다. 하얀 천장으로 가득한 병원이 아닌……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다.
……움직이자.
아직 정확히 사태 파악이 되지는 않았지만 주위를 둘러보자는 생각에 몸을 움직이려고 했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당혹감에 절로 눈이 떨렸다. 이내 아, 사고로 인해 몸이 망가져서 안 움직이나 보다. 하며 자신을 타일렀다.
그렇다고 움직이지 않는 몸이 갑자기 움직이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가만히 있기에는 추위에 몸이 덜덜 떨렸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이 상태로 있으면 추워 죽을 것이다! 난 숨을 고르고 큰 소리로 사람을 불렀다.
‘사람 살려~!’
그때 쉬익~소리가 들렸지만, 정신이 없었던 난 그 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몇 번이나 소리쳤지만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에 움직일 수는 없고, 추위는 느껴졌다.
나보고 두 번 죽으라는 거야 뭐야!!
이제 막 취직해서 본가에서 벗어나, 자유를 외치며 자취를 시작한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닥치다니. 그것도 덤프트럭에 치인 것도 아니고 일반 승용차였는데? 집구석을 벗어나기 위해 아등바등 발버둥 쳐 겨우 마련한 보금자리에서 지낸 지 한 달. 이제는 아예 못 움직이는 신세가 되었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 듯했지만 꾹 참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난 끓어오는 화를 참지 않지 못하고 밖으로 표출했다.
‘이런 빌어먹을 세상!!!’
그때 다시 한번 쉬익~하는 소리가 울렸다.
응? 쉬익? 그러고 보니 아까도 내가 말할 때 비슷한 소리가 나지 않았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하.하.하. 그럴 리가 사람이 상식적으로 그런 소리를 낸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지. 암. 그렇고말고.
제발 내가 들은 소리가 아니기를 부정하며 다시 한번 말해 보았지만, 쉭 하는 소리는 여전했다.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야! 계속 들려오는 쉭~ 소리가 마치 나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순간 불길한 생각과 들었고 싸한 기운이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특이한 동물을 키우던 한 친구가 떠올랐다. 그래. 그건 친구 집에 놀러 갔던 날이었다. 옷 좀 빌려 입으려고 방에 들어갔더니 웬 서랍이 잔뜩 있었고 그게 알고 보니 뱀, 도마뱀 사육장이어서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얌마. 너는 무슨 애완동물을 파충류를 키워? 강아지, 고양이 많잖아?’
‘야, 너 지금 파충류 좋아하는 사람들 전부 적으로 돌린 거다! 보면 얼마나 귀엽고 예쁜데! 이 피부 봐봐. 보라고!’
말 한번 잘못했다가 눈을 부릅뜨고 나에게 한 마리씩 보라며 인사시켜 주었다. 어떤 매력이 있는지 특징은 무엇인지 2시간은 넘게 들은 기억이 있다. 도저히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보다 보니 귀엽네. 라는 말로 겨우 벗어났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설마…… 아니겠지?
아니기를 마음속 깊이 바라며 나는 다시 몸을 움직였다. 정확히 팔다리를 움직이려고 한 것이 아닌 몸통을 움직이자 꿈틀거리더니 앞으로 나아갔다. 속으로 설마설마했던 상황이 진짜였다. 반사적으로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렸다. 그러면서든 생각은 오로지 하나였다.
진짜 좆됐다.
왜지? 뱀술 먹어서? 내가 뱀을 죽여서 뱀술을 담근 것도 아닌데!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죽어서 뱀으로 환생을 한 것이다. 보지도 못한 신에게 가슴 깊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며 되물어보고 싶었다. 왜 나였냐고. 그것도 고스란히 사람이었던 기억을 가진 채로. 이게 무슨 수치사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