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9 (완결)
“어…?”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온 사영은 미묘한 이질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유를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무리 평일이라지만 저녁 시간인데 안에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사영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유준을 바라보았다. 잘은 몰라도 유준이 무언가를 했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껏 뿌듯한 표정으로 눈을 마주치며 유준이 말했다.
“축하할 일이 많은데 둘이서는 파티를 못 했잖아요.”
“설마… 여기 빌렸어요?”
“설마는 무슨. 당연히 빌렸지.”
“와….”
사영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두 사람이 온 곳은 서울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었는데 여길 통으로 대관했다는 걸 이렇게 가볍게 말하다니.
사영도 결코 돈을 적게 버는 건 아니었지만 이럴 때 보이는 유준의 씀씀이에는 진심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두 분,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때, 조용히 다가온 직원이 능숙하게 두 사람을 안내했다. 창가에 마련된 자리로 간 사영은 유준이 직접 빼 주는 의자에 앉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매장 안에는 사영이 좋아하는 음악이 잔잔하게 흘렀다. 유준이 음악 하나하나에까지 신경을 썼다는 뜻이다.
천 년이 지나도 당신을 지키고, 보호하고, 사랑하겠다는 가사가 마음을 적셨다. 꼭 유준이 제게 불러 주는 노래 같았다. 사영 역시 같은 마음으로 이 노래를 불러 주고 싶기도 했다.
“조용하니 좋죠?”
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은 혼자 나가든, 유준과 함께 나가든 어딜 가나 사람이 몰려 좀처럼 여유롭고 조용하게 무언가를 즐기기가 어려웠다.
바쁜 것도 있지만 점점 더 집 데이트를 즐기게 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메뉴도 이미 다 정해져 있었는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바로 와인과 애피타이저가 나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사영이 좋아하는 종류였다.
유준이 와인 잔을 들어 올려 사영을 향해 기울이며 말했다.
“상 탄 거 축하해요.”
사영 역시 잔을 들어 가볍게 부딪치며 대답했다.
“유준 씨도 축하해요.”
그야말로 두 사람의 해였다. 내로라하는 영화제에서 두 사람은 상을 싹 쓸다시피 했다.
유준이 주연을 맡은 작품 두 개가 동시에 작품상 후보로 올랐고, 유준은 영화 <하지>로 국내 3대 영화제 대상을 전부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사영은 영화제 신인상을 독차지하다시피 했으며, 드라마 <수난>으로 종합 예술 시상식에서 드라마 부분 최우수 연기상을 타기도 했다.
연말·연초가 그야말로 상만 받다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쁜 일이었지만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영은 현재 차기작을 고르며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유준은 새 영화를 촬영 중이었기 때문에 둘이 느긋하게 보낼 시간이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사영은 늦게나마 유준과 조용히 시간을 나눌 수 있게 된 이 순간이 진심으로 반갑고 좋았다. 유준이 굳이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리기까지 한 마음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편안한 분위기에 사랑하는 사람, 맛있는 음식과 기분 좋은 음악까지. 그야말로 모든 게 완벽했다. 분위기에 취해서인지 이제 고작 와인 한 잔을 마셨을 뿐인데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 이번 촬영 끝나면… 같이 어디 멀리 여행 갈까요?”
유준은 주메뉴로 나온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잘라 사영에게 내밀며 물었다. 사영은 익숙하게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사영의 앞에도 멀끔한 스테이크가 있었지만 그런 건 서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식사 때마다 직접 사영의 입에 음식을 넣어 주는 건 유준이 가진 소소한 취미이자 즐거움이었고 그걸 받아먹는 건 사영의 행복이었다. 고기를 오물오물 씹으며 사영이 되물었다.
“여행이요?”
“응. 아무도 우리 못 알아보는 데로 가서 편안하게 둘이서만 푹 쉬다 오면 어떨까 해서.”
“와….”
“해외에 어디 넓고 조용한 별장 같은 거 빌려서 한 일주일 동안 섹스만 실컷 하다가 와도 좋고?”
“김유준 씨…!”
단둘이서만 조용히 시간을 보내자는 말에 반짝반짝한 눈이 되었던 사영이 이어진 말에 질겁하며 유준을 불렀다. 직원들은 전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이런 건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유준은 웃으며 스테이크를 또 한 조각 사영의 입에 넣어 주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어때요?”
“여행 좋아요. 사랑하는 사람이랑 한 번도 여행 가 본 적이 없어서…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사영의 눈동자에서 다시 별빛이 쏟아졌다. 상상만 해도 마음이 벅차올랐다. 유준과 손을 잡고 낯선 거리를 걷고 싶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나누고, 그 아래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싶었다.
아니, 어디라도 좋다. 풍경 따위가 없어도 괜찮았다. 유준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의 말대로 방에 틀어박혀 일주일 내내 섹스만 하고 온다고 해도 행복할 거다.
벅차오르는 기대감에 사영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너무 기대돼요. 꼭 가요. 유준 씨, 우리 꼭 가요.”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유준은 어떠한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사실은 한참 전부터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사소한 열망이었다.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유준이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영아.”
이름을 부른 것도 그렇고, 달라진 분위기에 사영이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유준에게 집중했다.
유준은 몇 번이나 입을 벌렸다가 다물기를 반복했다. 매사 당당하고 여유 넘치는 사람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긴장하나 싶었다.
그러나 사영은 무슨 일이냐고 유준을 채근하는 대신 기다렸다. 느리고 심지어 수도 없이 물러서기까지 했던 자신을 유준이 기다려 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한참 만에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사영의 손을 슬쩍 잡은 유준이 말했다.
“우리… 같이 살까?”
사영은 커다래진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유준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초조해진 유준이 사영의 손을 괜히 조몰락거리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지금, 지금도… 거의 같이 살다시피 하는데 그럴 바에는 그냥… 음, 같이 사는 게 여러모로 편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
“꼭 그러자는 건 아니고 부담스러우면 거절해도 됩니다. 내 말은 그냥… 오갈 때마다 물건 챙기고 뭐 이러는 것도 번잡스럽고… 안 그래? 그러니까 그냥 가볍게….”
사영이 대답이 없자 유준의 목소리가 점점 더 조그맣게 기어들어 갔다.
자신을 보며 웃는 사영의 얼굴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반쯤은 충동적으로 뱉긴 했는데 막상 해 놓고 나니 너무 섣불렀나 후회가 됐다.
사실 사영과 동거하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건 한참 전이었다. 말한 대로 지금도 거의 ‘살다시피’ 하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같이 살고 싶었다. 서로의 일상에 더 깊이 침투하길 원했다. 가능한 모든 시간을 곁에 있고 싶었다.
사영에게 김유준이 같이 살아도 좋을 남자라는 걸 알려 주고 싶었고, 이 사람이라면 결혼을 해도 괜찮을 거라는 믿음을 주고 싶었다. 유준이 원하는 모든 것이었다.
다만 서로 계속 함께 지내면서도 같이 살자는 말을 섣불리 꺼낼 수 없었던 건 사영이 경험한 결혼 생활이라는 게 얼마나 끔찍했는지 유준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부담스러워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유준은 행여나 자신의 욕심에 사영이 불안해할까 봐 두려웠다.
“그러니까 내 말은 사영아….”
말을 하면 할수록 너무 충동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준비해서, 조금 더 조심스럽게 접근했어야 했는데 분위기에 너무 취해 버린 게 문제였다.
이제라도 상황을 수습하려고 유준이 말을 번복하려던 순간, 사영이 붙들려 있던 손을 움직여 유준의 손을 꽉 마주 잡았다.
그 움직임에 유준이 입을 꾹 다물었다. 순간적으로 가슴속에서 자그마한 희망이 피어올랐다. 제 손을 잡아 오는 사영의 손이 따뜻했다.
이윽고, 사영이 입을 열었다.
“나를 속이지 않을 거잖아요.”
유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나를 아프게 하거나, 혼자 외롭게 하지 않을 거잖아요, 유준 씨는.”
어느 날의 고백이 떠올랐다. 거짓말하지 말아 달라고, 혼자 외롭게 하지 말아 달라고, 나에게 윽박지르거나 욕하지 말아 달라고.
사영의 사랑을 구걸하는 유준에게 사영이 내건 조건은 고작 그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사영은 이제 애원이 아닌 확신을 말하고 있었다. 김유준은 절대로 자신을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유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사영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고, 유준은 두 사람이 함께한 모든 순간에 이미 수도 없이 답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사영은 유준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말했다.
“…좋아요.”
“뭐…?”
먼저 물어 놓고 유준은 사영의 답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라 되물었다. 사영은 사랑스럽게 달아오른 얼굴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좋아요. 같이 사는 거… 나도 하고 싶어요. 유준 씨랑 같이 살고 싶어요.”
“아….”
유준이 무너지듯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온몸의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다.
거절했어도 아무런 문제는 없었을 테지만 사영이 기꺼이 자신을 믿어 주었다는 게 가슴을 벅차오르게 했다.
그렇게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고 있던 유준이 이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준 씨…?”
그러곤 성큼성큼 걸어 놀란 사영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청혼한 것도 아니고, 이쯤 되니 스스로 생각해도 유난이다 싶긴 했으나 참을 수가 없었다.
“고마워요.”
“그, 그게….”
“날 믿어 줘서. 고마워, 사영아.”
같이 살고 안 살고, 그런 건 부차적인 문제였다. 중요한 건 사영이 오랫동안 이어진 끔찍한 고통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믿어 주었다는 사실이었다.
유준이 사영의 인생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는 게 유준을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유준은 당황한 사영에게 손을 뻗어 뺨을 감싸 그대로 당겨 입을 맞췄다. 입술이 포개지는 순간까지도 사영은 당황했지만 이후에 머뭇거림은 없었다.
이제는 제 것만큼이나 익숙한 살이 얽혀 들고 숨결과 타액, 온기가 자극적이고도 안정적인 방식으로 서로에게 스며드는 순간 두 사람은 확신했다.
결코 순간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영원이라고 칭해도 좋을 만큼 기나긴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이렇게 서로의 가장 가까운 이해자로, 구원자로, 사랑하는 연인으로 함께일 거다.
애틋하게 입을 맞춘 두 사람의 뒤로 보이는 늦겨울의 밤하늘에 눈송이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어느 회귀자가 간절하게 꿈꾸었고, 그 회귀자를 사랑하는 사람이 마침내 선물해 준.
이제로부터 영영 춥지 않을 겨울이었다.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 외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