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외전)-18화 (192/193)

#외전 18

설령 유준이 후에 알게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유준이라면 사영이 왜 말하지 않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챌 거다. 한재우는 이제 두 사람 사이에 오해를 일으킬 존재조차 되지 못했다.

“5분 뒤 생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자리에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방송 시작을 알리는 안내 메시지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사영은 저도 모르게 유준의 손을 꽉 움켜쥐며 숨을 들이켰다.

오래전 이 자리에 앉아 수상이고 뭐고 신인상 후보에 들었다는 사실에 감격해 시작부터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던, 어리고 순진한 자신이 떠올랐다.

사영은 진심으로, 그 모든 시련을 끝끝내 이겨 내고 다시 이 자리에 앉은 자신이 조금 자랑스러웠다. 이제는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수상 소감 안 잊어버리게 잘 기억해 놔요.”

물론 유준은 여전히 사영의 수상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장난스럽게 말하면서도 유준은 떨리는 사영의 손을 든든하게 잡아 주었고 마침내, 모두가 기다리던 올해의 연기 대상이 시작되었다.

***

“올해의 연기 대상은….”

유준은 잠시 뜸을 들였다. 이미 몇 번의 시간 끌기가 진행된 이후였다. 분위기는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고 남은 건 영광의 이름을 부르는 일뿐이었다.

이미 대상의 주인공을 아는 유준은 괜히 목이 막혀 잠시 마른침을 삼켰다. 유준은 본인이 대상을 받을 때도 울지 않았던 사람인데 이 순간엔 진심으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무수히 많은 날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일부는 김유준 자신의 기억이고, 일부는 유준에게는 없는 가슴 아픈 기억이었다. 그런 날을 지나 마침내 여기에 다다랐다.

이제는 발표해도 된다는 스태프의 사인이 떨어졌고, 유준은 기꺼이 영광스러운 마음으로 애틋한 이름을 불렀다.

“대상, 윤사영! 축하드립니다!”

그와 동시에 장내는 그야말로 찢어질 듯한 환호성으로 가득했다. 대부분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그게 기쁨을 반감시킬 순 없었다.

관객석을 가득 메운 이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사영과 경쟁 관계로 후보에 올랐던 이들마저 진심으로 축하를 보냈다.

단순히 사영이 불행한 삶을 살고 그 시련을 이겨 낸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윤사영이 정말로 좋은 연기를 했고, 그 연기가 정당한 대가를 받았다는 데에서 오는 만족이 더 컸다.

<수난>에서 사영의 연기를 본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이 결과를 부정할 수 없었다. 이건 동정도 그 무엇도 아닌, 사영이 연기로 얻어 낸 상이었다.

그러나 정작 대상에 호명된 사영은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염없이 흔들리는 눈동자가 커다란 스크린에 선명하게 비쳤다.

사영은 진심으로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는 중이었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런 사영을 바라보던 유준이 무대에서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윤사영 씨, 안 나오실 겁니까?”

그제야 사영이 화들짝 놀라 얼결에 몸을 일으켰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어 주고 싶어 유준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내려가서 에스코트해 주길 기다리고 계시나요?”

안 그래도 환호성으로 가득하던 공간에 숫제 비명과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사영은 그제야 천천히 무대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사영이 입 모양으로 ‘아, 아니요’ 하고 다급하게 대답하는 게 스크린에 그대로 보인 바람에 곁의 배우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사영은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사람들이 왜 웃는지도 몰랐다.

“천천히 조심해서 오세요.”

계단을 내려오는 사영의 모습이 누가 봐도 위태위태했기에 금세 초조해진 목소리로 유준이 말했다.

그러더니 더 두고 볼 수 없었는지 무대에서 빠른 걸음으로 내려가 직접 사영을 에스코트해 올라왔다.

“네, 김유준 배우가 윤사영 배우를 직접 에스코트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멋지고 부러운 모습이네요.”

사회자가 능숙하게 상황을 설명하며 진행을 이어 갔다. 사영이 무대로 다 올라올 때까지 박수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사영을 무대 중앙에 세운 유준이 트로피와 꽃다발을 건넸다. 사영이 너무 떨어 트로피조차 제대로 들고 있기가 버거워 보이는 바람에 유준이 꽃다발은 도로 받아 들어야 했다.

“네, 윤사영 씨 지금 너무 떨고 계시는데요…. 일단 수상 소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사회자의 말에 사영의 얼굴이 더 파리하게 질렸다. 유준은 그런 사영에게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살짝 두들겨 주며 ‘옆에 있을게요. 편안하게 해요’ 하고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사영은 그제야 겨우 몸을 돌려 마이크 앞에 설 수 있었다.

그 앞에서도 사영은 몇 번이나 심호흡했다. 감정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벌써 잔뜩 젖은 뺨을 타고 연신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흑…!”

한참 만에 큰맘 먹고 입을 뗀 사영이 마이크에 대고 한 첫마디는 울음이었다.

“관객 여러분, 우리 윤사영 씨를 위해 응원의 박수 한번 부탁드릴게요.”

사회자가 유도하자 관객들이 손뼉을 치며 사영을 향해 울지 말라고 소리쳐 주었다.

눈에 맺힌 눈물에 강한 조명이 반사되어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사영은 자신을 향한 따스한 애정의 기운이 이 공간에 가득하다는 게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울먹임을 다시 한번 꾹꾹 삼킨 사영이 천천히 수상 소감을 시작했다.

“너무 과분한 상을 제게 주셔서… 제가… 제가 이 상을 받아도 되는지… 너무 감사합니다. 함께 후보에 올랐던 배우분들께 영광을, 돌리고 싶어요.”

사영은 말은 아주 느리고, 중간중간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 그 공백은 사영의 진심을 더 깊이 담아 냈다. 고개를 잠깐 숙이고 터져 나오는 울먹임을 또 한차례 쏟아 낸 사영이 소감을 이어갔다.

“아주 오래전에 제가… 바로 이 자리에서 신인상을, 탔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그렇게 오래 연기에서 멀어지게 될 줄은 몰랐어요. 다시… 다시 연기를 할 수만 있다면… 한 장면이라도, 단 1초라도 좋으니 다시… 다시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다면, 하고 바라 왔는데 이렇게 좋은 작품을, 만나, 여러분 앞에 서고….”

영화 <하지> 오디션장에 섰던 날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반드시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불가능해 보이던 자리였다.

사영은 아주 오랜만에 이 순간이 그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보는 환상의 끝은 아닐까 생각했다.

“여러분이 주셨던 믿음과 애정을, 저버렸던 저를 다시 믿어… 믿어 주시고, 기회를… 기회를 주시고… 어둠 속에 버려져 있던 제 손을 잡아, 응원해 주셨던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사영은 마이크에서 한 걸음 물러서 허리를 아주 깊이 숙였다. 관객석에서는 또다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사영의 팬들은 아까부터 사영을 따라 엉엉 울고 있었고, 선후배 동료 중에도 눈물을 글썽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허리를 굽힌 채 조금 시간을 들였던 사영이 다시 똑바로 서 마이크 앞에 섰다.

다행히 시간적 여유가 조금 있는지 앞에서 스태프가 소감을 마음껏 말해도 좋다는 사인을 보냈다. 물론 사영은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소감이 이어졌다. 기회를 주었던 감독을 비롯한 관계자들, 하나뿐인 가족인 어머니, 묵묵히 사영을 믿고 지지해 주었던 회사와 매니저인 우종, 팬들까지.

사영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최선을 다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지나쳐온 모든 이들의 이름을 다 부를 순 없었지만 그러지 못하더라도 모두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절대로 혼자서는 올 수 없는 자리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영의 입에서 한 사람뿐만 아니라 어쩌면 모두가 기다려 왔을, 이 찬란한 순간의 마지막을 알리는 첫머리가 노래와도 같은 너울이 되어 흘러나왔다.

머릿속에 많은 말들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고백의 문장들은 많겠지만 그 어떤 말도 사영이 가진 사랑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영은 이 세상에서 오로지 김유준만이 들을 수 있는 말을 건네기로 했다.

“길고 길었던 제 삶의 유일한… 유일한 이해자이자 구원자였던 김유준 씨에게 온 마음을 다한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이상입니다. 모두 진심으로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사영이 다시 한번 허리를 굽혀 인사하자 거대한 환호의 물결이 회장을 가득 채웠다.

사회자의 마무리 멘트가 시작되었고 사영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그 자리에는 마찬가지로 젖은 눈을 한 유준이 서 있었다.

유준은 두 팔을 벌렸다. 카메라가 여전히 무대 위를 비추고 있었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사영은 그대로 유준의 품에 포옥 안겨 울음을 터트렸다.

유준은 그런 사영의 등을 도닥여 주며 뺨에, 머리카락 위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다가 괜히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왕이면 사랑한다고 말해 주지. 감사가 뭡니까? 정 없게.”

그제야 사영은 유준의 품에서 작게 웃음을 터트릴 수 있었다. 유준은 사영을 조심스럽게 떼어 내 얼굴을 닦아 주며 말했다.

“일단 내려가요. 조심하고.”

사영은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유준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나란히 무대를 내려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카메라와 많은 이들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갔다.

웅장한 음악과 꽃가루가 사방을 가득 채우고, 그렇게 역대급 시청률과 화제성을 끌어낸 시상식이 화려한 막을 내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