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외전)-12화 (186/193)

#외전 12

- 그게 저… 유준 씨.

“네. 듣고 있어요.”

사영은 유준이 말하는 ‘듣고 있다’는 말을 좋아했다. 사영이 직접 표현한 건 아니지만 유준은 알 수 있었다.

어떻게 해도 제 말이 상대에게 가닿지 않는 경험을 너무 오랫동안, 지독하게 해 왔기 때문일 거다. 그래서 유준은 그 말이 습관이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유준의 그 말에 용기를 얻은 사영이 입을 열었다.

- 유준 씨 피곤한 거 아는데… 괜히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은데 정말….

그때 이미 유준은 사영이 무슨 말을 해 올지 짐작했으나 굳이 대신 말하지 않았다.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사영이 제게 요구하는 순간이 좋았다.

- 혹시 유준 씨 괜찮으면… 촬영장으로 나 데리러 올 수 있어요?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사영은 보지 못했지만 유준의 얼굴 가득 흐뭇한 감정이 어렸다. 투정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냥 유준이 보고 싶은 거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 촬영이 끝나고 돌아오면 볼 수 있는 얼굴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그래도 견딜 수가 없어서 단 1초라도 빨리 보고 싶은 거다. 지금 유준이 그러한 것처럼.

“지금 갈게요.”

유준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드레스 룸으로 향하며 대답했다. 대답이 너무 빠르게 나와 버리자 오히려 당황한 사영이 변명하듯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 우, 우종이가 있긴 있어요. 있는데 그냥… 왜 그러냐면 유준 씨….

“우종이 있는 거 알아요. 왜 그런지 이유 설명 안 해도 됩니다. 그런 거 필요 없고 지금 내가 보고 싶은지 아닌지, 그것만 말해요.”

그 말을 할 때 유준은 이미 차 키를 손에 들고 있었다. 몇 초간의 정적 후, 사영이 조용히 말했다.

- …보고 싶어요. 빨리 와 줬으면 좋겠어요.

“마지막 신 찍고 대기실로 오면 내가 있을 거예요.”

유준은 현관문을 열었다. ‘운전 천천히 해요!’ 하고 덧붙이는 사영의 다급한 목소리에 웃음이 터졌다.

***

“유준 씨….”

촬영을 마치고 돌아와 대기실 문을 열자, 정말로 김유준이 있었다. 크리스마스도 아닌데 꼭 산타에게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유준이 멋들어지게 웃으며 두 팔을 벌려 왔기에 사영은 그대로 그 품에 가 포옥 안겨 들었다. 유준의 품에서는 짧디짧은 가을 냄새가 물씬 풍겼다.

“고생했어요.”

사영을 끌어안고 머리카락과 귓가에 연신 입술을 내리며 유준이 속삭였다. 뒤따라 들어온 우종이 대기실 문을 닫고 조용히 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유준이 왔으니 자신은 이대로 퇴근이었다. 유준은 그런 우종을 쳐다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슬쩍 눈짓을 보내왔다.

말이 없어도 우종은 그 시선을 어렵지 않게 읽어 낼 수 있었다. 오늘 촬영장에서 사영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묻는 것이다.

우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촬영장 분위기는 더없이 좋았고 감독을 비롯해 모든 배우와 스태프가 사영을 거의 추앙하다시피 사랑했다.

윤사영 덕분에 투자를 차고도 넘치게 받은 것도 모자라 황금 시간대로 편성이 바뀌고, 성적까지 잘 나오니 안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뛰어난 각본이긴 했지만 위험 부담이 따르는 장르였기에 사영과 해인을 제외하곤 주조연 중 인지도가 높은 배우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사영은 늘 겸손하고 모두에게 친절한 것뿐만이 아니라 나서서 촬영장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만약 누가 사영에게 콩알만큼이라도 안 좋은 태도를 보인다면 감독부터 길길이 날뛸 판이니 그런 일이 생길 수가 없었다.

우종에게 마지막 확인까지 마친 유준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러니까 사영이 이 새벽에 자신을 여기까지 부른 건, 그야말로 온전한 ‘투정’이라는 말이었다.

“그럼 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눈치 빠르게 서둘러 정리한 우종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퇴근하게 된 것보다 피곤했을 사영이 마음껏 어리광 부리고 위로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더 좋았다.

그제야 유준의 품에서 벗어난 사영이 멋쩍은 얼굴로 우종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생했어, 우종아. 조심해서 가.”

“네, 형. 내일 출발하기 전에 전화드릴게요.”

유준은 잘 부탁한다는 듯 문을 닫기 직전 제게 눈짓을 보내오는 우종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문이 닫힘과 동시에 사영의 허리를 바싹 당겨 안았다.

사영이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 유준은 일단 그의 입술을 가볍게 머금었다. 아랫입술을 사탕처럼 빨다가 혀끝으로 입술 사이를 간질이자 사영이 자연스럽게 입술을 벌렸다.

유준은 곧장 그 안으로 파고들지 않고 계속 겉을 할짝거리며 사영을 놀렸다. 유준의 혀를 물어 보려고 사영이 몇 번 입을 더 벌리며 다가왔지만 유준은 그때마다 얄밉게 고개를 물리며 피했다.

결국 사영의 주먹이 유준의 가슴을 퍽, 하고 때려 왔다. 아프진 않았으나 제법 힘이 실린 주먹이었다.

여전히 애매하게 닿아 있는 입술 사이로 푸스스, 유준의 웃음이 흘렀다.

더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들긴 했지만 애가 타는 건 놀리는 쪽인 유준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이윽고 유준은 사영의 입 안으로 제 혀를 깊이 밀어 넣었다.

“으음….”

사영의 목 안쪽에서 만족스러운 신음이 흘렀다. 온종일 이 숨결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유달리 힘에 부치는 날이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컷 소리가 날 때마다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특별히 몸이 안 좋은 건 아니었다. 다만 계속 이어진 강행군에 체력적으로 지쳤을 뿐이었다.

진득하게 혀를 비벼 오는 유준의 움직임에 등골이 짜릿해졌다. 더 깊이 혀를 섞고 싶단 충동에 사영이 유준의 목을 끌어안고 까치발을 들어 고개를 들었다.

눈을 감고서도 유준의 입매가 호선을 그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까부터 혼자 여유 있는 척하는 게 괜히 얄미워 사영이 유준의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입을 떼지도 않은 채 아야, 하고 엄살을 부린 유준이 그와 동시에 사영의 목덜미를 붙들고 강하게 당겨 본격적으로 그의 입 안을 마음껏 맛보기 시작했다.

사영의 혀를 당겨 진득하게 빨아 대다가 입천장을 문질러 주자 사영이 다시 앓는 소리를 냈다. 유준에게는 최음제나 다름없는 반응이었다.

유준의 두 손이 사영의 등과 허리를 쓸어내리다가 이내 동그랗게 올라붙은 엉덩이를 양손 가득 움켜쥐었다.

“아…!”

사영이 고개를 젖히며 젖은 신음을 터트렸다. 유준은 순순히 그 입술을 놓아 줬지만 고약한 손은 사영의 엉덩이 골 사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희롱하기 바빴다.

급기야 한차례 다리가 풀린 사영은 유준의 가슴팍에 이마를 기댄 채 색색거리며 말했다.

“이러려고 부른 건 아닌데요….”

유준은 엉덩이에서 손을 떼고 다시 사영의 등을 토닥여 주며 대답했다.

“그래요? 나는 이러려고 왔는데.”

“…유준 씨가 그런 말을 하면 농담 같지 않아서 무서워요.”

“농담 아닌데? 난 대기실에서 윤사영 씨 물고 빨고 발라 먹으려고 냉큼 달려온 건데?”

사영은 웃음을 터트렸다. 유준이 촬영장 대기실에서 정말 일을 치를 만큼 생각 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건 알았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대기실에서 유준에게 안기는 상상을 하고 몸이 달아오른 자신이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이 새는 줄 모른다더니 자신이 딱 그 짝이었다.

첫 정사 이후 유준처럼 아무 때나 페로몬을 흘려 대는 부작용은 없었지만 사영 역시 머릿속이 온통 섹스로 절여진 사람처럼 시도 때도 없이 ‘그 짓’을 하고 싶었다.

바쁘게 이어지는 드라마 촬영만 아니면 정말로 집에서 김유준을 감금해 놓고 매일 섹스해 달라고 애원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욕구가 거세된 채 살아왔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온갖 욕구에 시달리며 안달이 난 상태라니.

사영은 그게 어이가 없으면서도 또 마냥 좋기만 해서 고개를 들고 유준을 빤히 쳐다보았다. 유준은 당연히 사영이 무얼 원하는지 단박에 알아챘다.

고개를 숙여 사영의 입술에 쪽, 하고 간지러운 입맞춤을 남긴 유준이 손으로 사영의 이마를 덮었다가 부드럽게 쓸어 넘겨 주며 속삭였다.

“…오늘 많이 피곤했나 보다.”

사영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장에서 집까지 가는 그 시간도 참기가 힘들어서, 참기 싫어서 사영은 유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때는 정말로 간절해서 그랬던 건데, 막상 새벽 세 시에 여기 와 있는 유준을 보자니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더 참을걸.

“내가 너무 귀찮게 했죠….”

유준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리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사영은 표현하고 싶었다. 유준이 보여 주는 모든 애정과 호의를 별것 아닌 양 여기고 싶진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배려를 당연하게 여기는 건 사영이 가장 경계하는 일 중 하나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유준은 고개를 저었다.

“사영 씨 전화 받고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압니까?”

“…….”

“윤사영 씨가 나한테 어리광을 부리다니. 백 년에 한 번씩 있는 일이잖아요.”

“음… 매일 어리광 부리고 있는 것 같은데요….”

사영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진심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어리광이 심한 사람이라는 걸 사영도 유준과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 처음 알았다. 그러나 유준은 또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윤사영 씨는 지금 어리광 입문자예요.”

“풉….”

어리광 입문자라는 말이 재밌어서 사영은 웃음을 터트렸다.

멀리서 봤던 유준은 늘 차갑고 냉철한 이미지였다. 평소에도 농담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사람일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막상 친밀해진 유준은 너무나도 장난기 가득하고 재밌는 남자였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 그런 면이 도드라졌다.

그건 다시 말해, 이토록 우스꽝스럽고 실없는 농담을 하는 김유준은 오직 윤사영만 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영은 유준의 농담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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