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74화 (174/193)

#174

가히 ‘윤사영 신드롬’이라고 불러도 이상할 게 없었다. 제2의 전성기라는 말은 지금의 인기를 설명하기에 부족해 보였다.

오래전 이미 한차례 신드롬을 만들어 낸 적이 있는 배우가 또다시 같은 현상을 불러일으킨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대중은 그동안 한재우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한 시간을 보상받고 싶어 하는 것처럼 윤사영을 갈구했다.

영화, 예능, 광고 등 모든 분야에서 어떻게든 사영을 모시고 싶어 안달이 났다. 윤사영이 잠깐이라도 등장하면 시청률이 치솟았다. 몸값이 천정부지로 뛴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시간을 보상받고 싶은 건 사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잠을 줄여 가며 최대한 많은 일을 하려고 애썼다.

건강을 생각해 스케줄을 조금 줄이는 게 어떻겠냐고 유준과 우종이 번갈아 걱정스레 말했지만 사영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멍청하게 허비한 시간이 아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었고 팬들에게 더 많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급기야 상황을 오해한 팬들이 내 배우를 혹사시키지 말라며 회사를 상대로 한바탕 살벌한 성토를 벌이고 나서야 사영은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달리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래도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하고 싶었던 사영은 오늘도 새벽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기쁘고 행복하다고 해서 몸이 피로를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다. 처음에야 감정에 취해 자지 않고 먹지 않아도 멀쩡했지만 이어지는 강행군에는 장사가 없었다.

녹초가 된 몸으로 터덜터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사영은 생각지도 못한 풍경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무슨….”

일단 집 안이 환했다. 분명 불을 끄고 나왔는데 거실이며 주방에 전부 불이 켜져 있었다.

코끝에서는 허기를 자극하는 맛있는 냄새가 느껴졌다. 주방 쪽에선 인기척이 있었다.

“설마….”

본능적으로 떠오르는 얼굴에 재빨리 주방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사영의 앞에 기대했던 반가운 이가 나타났다.

“유준 씨!”

“어서 와요, 사영 씨. 오늘 고생했어요.”

어디서 구했는지 깜찍한 앞치마까지 제대로 갖춰 입은 김유준이었다.

사영은 얼떨떨한 얼굴로 유준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곰돌이가 그려진 노란 앞치마를 두른 유준은 여전히 잘생겼고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귀여웠다.

팬들 말대로, 유준은 귀여운 것도 잘 어울렸다.

앞치마 좀 사다 놓으라는 말에 정민이 냉큼 곰돌이 앞치마를 사 왔을 땐 어이가 없었는데 사영이 환하게 웃음을 터트리자 유준은 갑자기 정민에게 보너스를 주고 싶어졌다.

부끄러움도 잊고 사영에게 성큼성큼 다가간 유준이 미소를 머금은 입술에 몇 번이나 쪽쪽 입을 맞췄다. 스스럼없이 그의 입맞춤을 받아들이며 사영이 말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오늘 저녁도, 못, 먹었다면서요. 고생한 애인, 을, 위해, 특별 서비스.”

대화를 나누며 계속 입술을 부딪치느라고 말이 끊겼다. 말이 끊기는 사이사이마다 사랑이 차오르는 것 같아 사영은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하루의 피로가 전부 다 가시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우종이가 집에 가서 밥 먹으라고 그러더니….”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평소라면 저녁을 거른 사영을 위해 일이 끝나자마자 뭐라도 얼른 먹였을 우종이 오늘은 왠지 뭘 사 오지도 않고, 먹잔 소리도 안 하고 얼른 집에 가서 식사하시라는 말만 했다.

우종이도 피곤해서 얼른 가서 쉬고 싶은가 보다, 막연히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유준이 미리 연락을 한 모양이다.

“정말 생각도 못 했어요.”

“그랬어요? 일단 얼른 가서 씻고 나와요. 배고프겠다.”

“응. 그럴게요. 얼른 씻고 나올게요.”

사영은 발을 동동 구르며 대답했다. 당장 유준이 해 준 음식을 먹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그동안 안 해서 그렇지, 하면 누구보다 잘 해낼 거라고 장담하던 대로 유준의 요리 실력은 일취월장하는 중이었다.

“고마워요, 유준 씨.”

씻으러 가기 전, 사영은 한층 진중해진 목소리로 유준에게 말했다.

유준도 오늘 저녁까지 일이 있었다. 그런데도 제게 요리를 해 주겠다고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었다.

“유준 씨 아니었으면 오늘 정말로 지친 하루가 됐을 거예요.”

사영은 표현을 숨기지 않았다. 사랑에 크게 상처받았던 사람은 위축되기 마련인데 사영은 그러지 않았다.

그 자신이 되돌아오지 않는 애정을 쏟아 본 적이 있었던 사람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혹시나 유준이 이 관계가 일방적이라고 느낄까 봐 더 신경 쓰고 있을 수도 있었다. 사영은 그런 사람이었다.

괜히 코끝이 찡해진 유준이 애써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애인 하나는 정말 잘 뒀죠?”

사영의 얼굴에 한 번 더 햇살 같은 미소가 어렸다.

“네. 정말이요.”

피로는 어느새 저만치 사라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

“정말 괜찮다니까.”

유준은 아까부터 제 손을, 엄밀히 말하자면 밴드를 붙여 놓은 손가락 끝을 연신 조심스럽게 매만지는 사영에게 말했다.

아직 칼질이 서툰 면이 있어 요리하다가 조금 베였는데 사영은 그게 내도록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아까는 아이를 혼내는 것처럼 ‘앞으로는 요리하지 말아요!’하고 외쳐 웃음을 터트리게 만들기도 했다.

유준은 사영이 무언가를 걱정하는 게 싫었지만 이런 걱정이라면 매일 해도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이 조금 들었다.

“그래도 속상해요….”

“앞으로는 진짜, 정말 조심할게요.”

“네에….”

시무룩한 목소리까지도 어쩜 이렇게 빠짐없이 귀여운지 모를 일이다.

이미 유준의 품에 안겨 있다시피 한 사영의 몸을 조금 더 당겨 안은 유준은 문득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해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성공 가도를 달리는 중에도 요즘처럼 삶이 완벽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가진 걸 전부 다 잃는다고 해도 지금처럼 품에 윤사영을 안고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천하의 김유준이 이런 생각을 하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한데도 마냥 좋았다. 이게 병이라면 영영 고치고 싶지 않았다.

“…사영 씨.”

그러다 문득 유준은 궁금했다. 자신이 이렇게 행복한 만큼, 사영도 행복할까.

유준은 사영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런데 사영이 정말 그만큼 행복한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유준은 사영에게 물었다.

“사영 씨는 지금… 행복합니까?”

“…….”

“그냥 적당히 행복한 거 말고… 정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한 기분을 윤사영 씨도 느끼는지 궁금한데.”

사영의 앞에서도 늘 자신만만한 유준이었지만 막상 질문을 하고 보니 가슴이 불안하게 떨렸다. 함께하는 순간순간에 사영이 행복해하는 걸 느껴 왔는데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사랑이라는 게 으레 그런 모양이라고. 누군가를 자신보다 더 사랑한다는 건 언제나 이렇게 두려움을 동반하는 모양이라고 짐작할 뿐.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그때, 사영의 목소리가 고요한 새벽의 공기를 타고 흘렀다.

“한재우 때문에 유준 씨를 끝끝내 밀어냈다면….”

“…….”

“더 이상 상처받기 싫다는 이유로 유준 씨를 사랑하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우리가 지금처럼 연인으로 남아 있지 못했다면.”

사영이 고개를 들어 유준을 쳐다보았다. 겁이 나 애먼 허공을 이리저리 떠돌던 유준의 시선 역시 사영에게로 향했다.

눈동자에 서로의 모습이 아로새겨지는 감각은 언제 느껴도 짜릿하고 황홀했다. 사영이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 느끼는 이 가슴 벅찬 기쁨을, 희열을, 행복을 모른 채로 살아갔겠지.”

“아….”

“영영 사랑은 차가운 아스팔트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사랑을 고작 그런 불행으로 착각하면서….”

사영에게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만으로는 회복할 수 없는 부서진 마음이 있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당했기에 오로지 사랑으로만 치유할 수 있는 마음 말이다.

내버려 두었어도 살아갔겠지만, 웃을 수도 있었겠지만 망가진 영혼의 조각은 내내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저는 이제 사랑이 두렵지 않아요, 유준 씨. 언젠가 우리에게 이별이 예정되어 있더라도, 그때 내가 또다시 상처받게 될 거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이제 사영에게는 아픔을 각오해도 좋을 만큼 소중한 사람이 있었다. 나를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 믿기에 사랑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애틋한 감정이었다.

“유준 씨와 사랑하지 않는 삶이 이별로 인한 상처를 입는 삶보다 더 고통스러울 테니까요.”

유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결코 우는 법이 없던 남자는 오로지 한 사람 앞에서만 하염없이 연약해졌다.

볼썽사납게 울먹임이 넘어올 것 같아 몇 번이나 침을 삼킨 유준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별은 누구 맘대로 이별입니까?”

삐죽거리는 표정에 사영은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웃는 사영의 눈가도 촉촉했다.

“이별 못 해요?”

“당연히 못 하지.”

“유준 씨가 나한테 가진 애정이 식어도요?”

“헛된 꿈 꾸지 말고요.”

웃음이 터졌다. 이렇게 웃으면서 사랑을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줄은 정말로 몰랐다. 사영은 떨리는 손을 들어 유준의 뺨을 감쌌다.

이 사람이 있어서 사영은 길고 긴 터널을,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겨울을 벗어날 수 있었다.

“사랑해요, 유준 씨.”

갑작스러운 고백에도 유준은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돌려 사영의 손바닥에 경건하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계속 저를 사랑해 주세요.”

사영은 아직 유준의 가진 사랑의 크기를 몰랐다. 유준은 그렇다고 생각했다.

먼 훗날 나란히 나이를 먹고, 백발이 되어, 끝끝내 누군가의 숨이 먼저 멈추는 그 순간이 되어서야 사영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했음을, 김유준이 그렇게 윤사영을 사랑했음을 깨닫게 되겠지.

그래서 유준은 지금은 사영이 다 알 수도 없을 사랑을 입에 담는 대신 깊고 깊은 마음을 담아 입을 맞췄다. 오래도록 행복할 두 사람의 사랑이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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