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다시금 깊어지는 사영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유준이 다시 말을 꺼냈다.
“최은성 씨는… 혹시라도 이번 일 때문에 생계가 어려워지게 되면 밥벌이 정도는 할 수 있게 내가 알아서 챙겨 줄게요.”
“…네?”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사영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러나 유준은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마음에 걸리는 거잖아요.”
“아….”
“최은성도 뭐 좋은 놈은 아니지만 윤사영 씨가 그러길 원한다면 정상참작 정도는 해 줘도 괜찮아요. 전부 다 사영 씨 마음이니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복잡하고 어려운 사영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말이었다.
은성은 애매한 사람이었다. 과거 은성의 방관은, 시키는 대로 행했던 그의 행동은 분명 옳지 못한 일이었다. 사영에게는 그 역시 가해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을 정면에 내세우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사영은 나름의 선처를 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사영이 자꾸만 마음을 쓰게 되는 건 그가 마지막에 보여 준 모습 때문이었다.
만약 은성의 폭로가 오로지 한재우만을 향한 거였다면 사영도 더는 그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재우를 공격하며 자신은 그 뒤에 숨어 면죄부를 얻고자 하는 태도를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사영 역시 그에게 더 이상의 자비를 보여 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최은성이 쓴 글은 한재우의 악행을 증언하는 글임과 동시에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글이기도 했다.
한재우가 시켜서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를 내세우며 자신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비겁했는지, 아무 책임 없는 척 어떻게 한 사람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내몰았는지.
은성은 그것들을 어떠한 변명도 없이 상세하고도 담담하게 대중 앞에 털어놓았다. 은성을 향한 비판과 비난이 거세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매니저로서 자신이 담당했던 연예인의 사생활을 폭로했으니 다시 매니저 일을 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 행위의 정당성과는 상관없이 제 치부를 폭로하는 매니저를 두고 싶어 하는 연예인은 없을 테니 말이다.
한재우의 회사가 어떤 선택을 내릴지는 알 수 없지만 사영은 그 회사에 대한 기대감이 없었다.
물론 그 역시 자업자득이고 사영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으나 은성이 마지막으로 보인 최소한의 양심은 사영의 마음을 조금 어렵게 만들었다.
“…그래도 될까요.”
“아니, 당사자가 그러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해? 사영 씨가 겪은 일이고 용서도 사영 씨가 할 수 있는 선택이에요. 그렇게 하는 게 사영 씨 마음을 편하게 한다면 망설이지 말아요.”
누군가는 사영에게 바보 같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당해 놓고 누가 누굴 동정하는 거냐고. 답답하다고. 사영은 어쩌면 유준 역시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 사영은 깨달았다. 전적으로 누군가의 편이 되어 준다는 건 상대가 택할 수 있는 모든 선택지를 지지해 준다는 뜻임을 말이다.
다시 입가에 미소를 띤 사영이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말해 줘서. 저한테는 큰 의미가 있는 말이에요.”
“앞으로 사영 씨가 하고 싶은 건 뭐든 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게요.”
“정말 그럴 자신 있어요?”
“물론이죠.”
“그럼 일단… 유준 씨랑 키스하고 싶은데.”
방금 자신 있다고 말한 사람치고 유준의 눈동자가 쉽게 흔들렸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사영에게 잘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사영이 다가올 때면 천하의 유준이라도 얼어 버리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흔들리는 시선으로 장난기 가득한 표정의 사영을 한참이나 쳐다보던 유준은 이내 예의 그 당당한 얼굴을 되찾곤 사영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그런 건 허락 안 받아도 돼요.”
세상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사람들이 누굴 욕하고 누굴 지지하는지, 그런 건 이 순간 두 사람의 세계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이어진 건 온통 뜨거운 입술과 숨결뿐이었다.
***
한재우 어케될 거 같음?
재기 가능성 있다고 봄? 광고도 줄줄이 취소되고 지금 상황으로보면 글럿다 싶긴 한데 남연은 사고쳐도 또 금방 잘 돌아오기도 하고 그래서 모르겟네?
윤사영이야 앞으로 더 잘나갈 것 같긴한데... 김유준도 타격없고....
연기는 잘하니까 담작 잘 만나면 금방 회복하려나.... 그동안 해온 짓 생각하면 걍 꺼졌음 싶은데 몰겠당
└ 굵직한 광고 다 취소됐던데 이와중에 괜찮은 다음 작품을 잡을 수 있을까?
└└ 222 뭐 김유준처럼 대체 불가능한 배우도 아니고 뭐가 아쉬워서 좋은 작품을 걜 주겠음?
└ 또 모르지 인맥이 아주 대단하신 것 같은데 인맥빨로 잡을지도
└└ 근데 회사가 성명서 내는 거나 기사 나는 거 보면 약간 손절치는 분위기라서...
└└ 마자 나두 이거 느낌 사고 쳐도 회사나 언론에서 실드 치면 인맥빨로 비벼볼 수 있는 수준이라는 건데 지금 한재우 상태로는 걍 손절엔딩일 것 같은디?
└ 진짜 범죄 저지르고도 활동 잘하는 연예인도 있다지만 다시는 얘 방송에서 얼굴 안 봤으면 좋겠다 진짜 소름 끼치고 역겨움 무슨 너무 화나서 한대 때렸다 이래도 정떨어질 판에 몇 년을 교묘하게 사람 매장시키고 집에 거의 감금해 놓고 학대하고 ㄹㅇ 싸패 아니고 뭐임?
└ 일 터지기 전에 한재우 재계약 시즌 다가온다고 몸값 어쩌구 하는 기사 봤던 거 같은데 재계약 하려나...
└└ 재계약하면 회사도 한재우랑 공범이라고 떠벌리는 거지 뭐
└ 진짜 윤사영 존나 불쌍해서 앞으로 진짜 잘됐으면 좋겠다 자기 이용해서 뜬 새끼한테 가스라이팅 당하고 커리어고 뭐고 다 잃고 욕 먹은 거 생각하면 ㅅㅂ... 나였음 다 죽였다 윤사영이 대인배라 존나 속상함
└└ 내말이.. 입장문에 그동안 나 욕한 니들도 다 똑같은 새끼들이야 ㅅㅂ 하고 쌍욕 박아도 인정인데....
***
“…….”
늦은 새벽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온 재우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현관 앞에 서서 텅 빈 거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계절은 아직 가을인데, 새벽녘 희미한 어둠이 내려앉은 거실은 홀로 겨울을 맞이한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거실을 보는 재우의 눈동자는 공허했다. 어느새 그의 눈은 이곳이 아닌, 과거의 어느 날을 헤매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 보이는 곳이 온통 따뜻했다. 재우가 잠들지 않는 한 그의 집은 단 한 순간도 어둠에 잠긴 적이 없었다.
재우가 아무리 말없이 늦게 들어가도 사영은 늘 불을 밝힌 채 재우를 기다렸다가 따스한 인사로 그를 맞아 주곤 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였다.
“사영아.”
대답하는 이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재우는 소리 내어 이름을 불렀다. 어두운 공간은 그 목소리마저 잡아먹었는지 되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사영아….”
다시 불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이번에는 진심이었다.
내가 잘못했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너를 사랑하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고. 제발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이번에는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진심을 다해 말하고 싶었다.
“…….”
하지만 당연하게도 재우의 부름에 응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한참 전부터 그랬다. 한재우는 이제 사영에게 용서받는 건 물론이고 용서를 구하는 일조차 할 수 없었다.
일이 터진 후 재우는 몇 번이나 사영에게 연락했다. 수도 없이 전화했고 메시지도 여러 번 남겼다. 그러나 사영은 전화도 받지 않았고, 어떤 답장도 보내지 않았다.
재우는 비로소 제 연락을 기다렸을 윤사영의 무수한 밤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후….”
길게 내쉬는 숨결에는 술 냄새가 가득했다. 마실 때는 좀처럼 취하지 않아 짜증이 나더니 지금은 눈앞이 빙빙 돌았다.
혼자 술을 마시는 재우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폭로 글이 공개된 후로 은성 역시 연락이 되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필요하면 새 매니저를 붙여 주겠다는 말뿐이었다. 그게 벌써 며칠 전인데 아직도 재우를 찾아온 매니저는 없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만큼 어리숙하진 않았다. 어차피 예정되어 있던 스케줄은 줄줄이 취소되었고 계약 기간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여차하면 그대로 버리겠다는 뜻이다.
설설 기면서 온갖 장단을 다 맞춰 줄 땐 언제고 이제 와 저들은 아무것도 몰랐던 척, 정의의 사도인 척하는 게 우스웠다.
자신을 향해 비난을 퍼붓고 있는 대중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그들이 소문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욕하지 않았으면 될 일인데 말이다.
하지만 재우는 그런 걸 일일이 따지는 대신 혼자 술을 마셨다. 남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까지 해 가며 오른 자리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렸으나 화가 나진 않았다.
대신 공허했다. 두려웠다. 허물어진 명성보다 손에서 놓친 한 사람이 더 애달파 나중에는 오로지 그 한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다 가질 수 있었는데. 힘겹게 얻은 인기도, 명예도, 사랑까지도 전부 다 손에 쥘 수 있었는데.
비록 시작은 거짓이었더라도 진심을 주려 노력했다면, 사영을 무너트리는 게 아니라 그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면,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뒤늦은 후회에 사무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아무리 후회하고 또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두고 한재우는 좌절했다. 제 마음 하나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헛되게 날려 버린 기회가 아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재우의 발이 술기운에 꼬였다. 취한 몸은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거실 바닥에 볼품없이 나뒹굴었다.
“으윽…!”
넘어지면서 잘못 부딪혔는지 머리가 아팠다. 겨울의 추위가 몸을 파고드는 것 같아 재우는 넘어진 채 어깨를 떨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겨울도 아닌데, 마치 홀로 겨울을 맞이한 것만 같았다.
스스로 인지하지도 못한 새 흘러나온 눈물이 뺨을 타고 바닥으로 뚝, 뚝 흘러내렸다. 투명한 눈물은 밤의 색을 덧입어 얼핏 보면 마치 피를 흘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쓰러진 모양새가 꼭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사람의 죽음과 닮아 있었지만 한재우는 그걸 알 길이 없어서.
그 밤은 오로지 후회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