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은성은 그 일을 두고 사영이 자신을 용서했을 거라느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해 주었기에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준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럴 염치도 없었다.
하지만 의도가 어찌 되었든, 은성은 생각이 많아졌다. 오랜 시간 사영에게 자신이 해 왔던 일들을 매일 곱씹었다.
‘착각하지 마, 최은성. 내가 망하면 너라고 무사할 수 있을 것 같냐?’
한재우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끊임없이 맴돌았다. 방관이니 뭐니 하는 단어 역시 자기변명에 불과했다. 사영에게는 최은성 역시 한재우와 다를 바 없는 가해자였다.
그런데도 사영은 은성에게 계속 말했다. 당신은 그저 한재우가 시켜서 했음을 안다고. 당신에게 사정이 있었던 것을 알고 있다고. 당신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 역시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웃음이 흘러나왔다. 은성은 자신의 사정과 아픔에 매몰되어 윤사영의 고통을 모른 척해 왔는데 저보다 훨씬 더 아프고 힘들었을 사영은 오히려 은성을 이해했다.
그래서 은성은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달라야 하는 거 아닐까. 사영이 그렇게 말해 주었으니까, 한재우와 정말로 똑같은 사람이 되면 안 되는 거 아닐까.
‘그러니까 까불지 마. 너 같은 새끼가 빌붙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한재우는 말했다. 이 상황이 되고 나서도, 아니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너는 더더욱 나와 고락을 함께해야 한다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너를 받아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은성은 차창을 열었다. 밤바람이 은성의 뺨을 거칠게 때려 왔다. 그의 말대로 은성은 공범이다. 이대로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양 혼자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마지막은. 마지막 순간만은 한재우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야 하지 않을까.
은성 씨 역시 한재우에게 그런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던 사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 은성은 죄책감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도망치듯 사영을 외면했지만 그 눈동자에 어린 감정은 분명 걱정이었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도망만 치던 길에서 스스로 더 나은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마지막 갈림길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한재우와 다르다고. 나는 그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변명해 봤자 결국 한재우와 같은 사람이 될 뿐이었다.
조금이라도. 늦었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그와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으면 행동으로 증명해야 했다.
은성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와 무슨 짓을 한다 해도 과거를 되돌리거나 용서받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한 번쯤은 한재우의 이름을 핑계로 내세우는 대신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책임지고 싶었다.
이제야 은성은 그간 자신 역시 한재우를 이용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추악한 면을 한재우의 이름 뒤에 감추고 나는 그래도 저 사람보단 덜하다고 우스운 자위를 이어 왔다.
한심했다. 어떤 의미에서 자신은 한재우보다 더 한심하고 못된 사람이었다. 그걸 인정하자 이상하게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한재우 뒤에서 나와야 할 때였다.
***
“이건 좀 놀랐네.”
옆에서 중얼거리는 유준의 목소리를 듣고도 사영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사영의 눈동자는 연신 휴대폰 화면을 훑고 있었다.
사영은 유준을 집으로 초대해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하는 중이었다. 모처럼 휴일이 겹친 날이었다.
처음 집에서 함께 밥을 먹은 이후, 사영은 종종 그날처럼 유준을 초대해 직접 요리해 주곤 했다.
특히 한재우와 관련된 일이 터지고 나서는 밖에서 오래 머무는 게 조금 부담스러워 더 자주 서로의 집을 오가게 됐다.
주로 유준이 사영의 집으로 왔고, 그럴 때면 사영은 고집을 부려 직접 음식을 만들었다. 음식 대접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단 이만큼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된 자신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요리하는 건 손이 많이 가고 힘든 일이니 괜히 고생하지 말라고 말리던 유준도 사영의 속내를 눈치챈 뒤로는 거절하지 않았다. 대신 유준은 식사 시간 전에 와서 사영을 도왔다.
요리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던 유준이 온갖 요리 관련 영상을 섭렵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사영이 요리에 지겨워지면 자신이 그에게 맛있는 걸 해 주고 싶어 학원에 다닐까 진지하게 고민 중인 건 아직 사영에겐 비밀이었다.
사영에게 열 개를 받으면 만 개를 해 주고픈 유준의 마음이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오늘도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터졌다. 얼마나 놀라운 일이던지 사영의 회사 대표가 직접 사영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전달했을 정도였다.
그럴 만한 일이었다. 한재우의 매니저인 최은성이 인터넷에 이른바 ‘폭로글’을 공개한 것이다.
“절대로 한재우를 거스르지 못할 사람처럼 보였는데….”
유준의 말에 사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은성은 사영만큼이나 재우에게 얽매여 있던 사람이었다.
은성을 옥죄고 있는 압박이 조금이라도 흔들렸으면 해서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전한 적도 있었지만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사영 자신도 죽음을 겪은 후에야 겨우 벗어났는데 은성에게 극적인 변화를 바랄 순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저 공방이 격해졌을 때 한재우를 변호하기 위해 거짓말만이라도 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진실을 뒷받침해 줄 가장 강력한 증인이 되어 주다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때, 먼저 화면에서 눈을 뗀 유준이 말했다.
“결국 이것도 윤사영 씨가 해낸 거네요.”
“제가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사영이 고개를 돌려 유준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유준은 당연한 걸 묻냐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전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을 거잖아요, 이 사람.”
“네….”
“그러니까. 혼자서는 마지막까지 나서지 못했을 사람을 윤사영 씨가 여기까지 이끌어 준 거잖아.”
사영이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듣고 보니 유준의 말이 딱히 틀린 것 같지 않아서 기분이 묘했다.
정말 그 말이 맞는 말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말하는 사람이 김유준이라 근거도 없이 믿을 만하게 느껴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유준의 말은 어딘지 모르게 사영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느낌이라, 사영은 그냥 그 말을 믿기로 했다.
최은성의 고백으로 자신이 더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된 것도 좋은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사영은 은성이 드디어 한재우로부터 벗어날 준비가 되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사영의 시선이 다시금 은성이 올린 글을 훑었다. 무척이나 자세한 글이었다. 글이 너무 길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사영이 어쩔 수 없이 생략했던 이야기들도 전부 다 담겨 있었다.
이미 사영이 승기를 잡은 싸움이긴 했지만 한재우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을 매니저의 폭로로 인해 여론은 완전히 이쪽으로 넘어왔다.
연예인으로서의 생명은 실제로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와는 별개로 대중이 내리는 판결이 더 중요하게 좌우할 때가 많았다.
그런 면에서 한재우의 앞으로의 연예 활동은 쉽지 않을 것이다. 사영이 워낙에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기도 했고, 사영의 편에 김유준이 있다는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한재우는 자신이 완벽하게 모두를 속이고 있다고 자신만만했고, 사영 역시 그렇게 생각했으나 사람인 이상 매 순간 정말로 ‘완벽’할 수는 없었다.
‘한재우가 쎄했던 순간들’ 같은 제목의 글과 영상이 우후죽순 등장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 중에는 이때다 싶어서 관심을 끌어 부가적인 이득을 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이들도 많겠으나 사영은 상관없었다.
사영 역시 과거에 같은 일을 당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에게 관심도 없던 이들이 더 많은 조회수와 클릭을 유도하려 마치 윤사영의 사람됨을 잘 아는 듯 떠들어 댔다.
일이 이렇게 된 후에야 무분별하게 루머를 소비하고 한 사람을 매도한 언론과 대중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으나 사영은 그게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오진 못할 걸 알았다.
그런 흐름을 바꾸고자 노력한 것도 아니다. 사영이 원하는 건 그저 자신이 겪은 고통을 한재우 역시 당하길 바랄 뿐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기분이 어때요?”
그렇게 사영이 얼마나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을까. 유준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제야 어지러운 생각들에서 벗어난 사영이 고개를 돌려 유준을 바라보았다.
사영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조금 멍하기도 하고… 복수에 성공한다고 해서 기쁠 거라 예상하진 않았지만 생각보다도 더 담담한 것 같기도 하고….”
“뭐, 이게 뭐 기뻐할 일이 되기나 하겠어요? 한재우 그게 뭐라고.”
대수롭지 않은 듯 이어진 유준의 말에 사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목소리에 감춰진 염려가 고스란히 느껴진 탓이다. 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한재우가 뭐라고.”
“…….”
“제 안에서는 이미 다 끝난 일이라 새삼스럽게 기쁘거나 벅차오르거나… 그런 감정은 없는 것 같아요.”
“…좋은 일이네요.”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유준이 그제야 함께 웃었다. 말 그대로 한재우 따위는 이제 사영의 인생에서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
사영은 그저 시작한 일을 마무리 짓고 있을 뿐 복수는 더 이상 사영의 삶의 목적이 아니었다.
사영 스스로 그걸 깨닫고 인정한 게 너무 좋아서 유준은 제가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고 실실 웃었다. 알았다고 한들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순간 사영의 시선이 다시 휴대폰으로 향했다. 화면에는 여전히 최은성의 글이 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