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꺼져.”
서슬 퍼런 한재우의 목소리에도 은성은 바로 나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이런 대형 사고를 쳐 놓고 연락조차 받지 않는 한재우 때문에 소속사 대표는 그야말로 돌아 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무슨 짓을 해서든 통화라도 할 수 있게 만들어 놓으라고 한참이나 호통을 들은 터였다.
이러나저러나 욕먹는 건 매한가지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재우가 소속사 대표의 연락까지 받지 않는다는 건 문제였다. 은성은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대표님이 꼭 전화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알았으니까 꺼지라고.”
“형님, 이번 일은 심상치가 않습니다….”
“시발, 내가 그걸 몰라? 꺼지라고, 이 새끼야!”
재차 말을 건네는 은성에게 재우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전 같으면 꺼지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알아서 벌벌 기며 나갔을 놈이 말을 덧붙이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확했다. 최은성은 지금 자신을 무시하고 있는 거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고 한재우를 하찮게 여기는 게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분노가 폭발한 한재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은성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겼다. 코앞에서 눈을 부라리며 재우가 말을 씹어 뱉었다.
“왜. 지금은 나한테 좀 개겨도 될 것 같아? 그래서 지금 이 지랄이야?”
“…….”
“착각하지 마, 최은성. 내가 망하면 너라고 무사할 수 있을 것 같냐?”
한재우의 음성은 협박이었다. 윤사영을 학대한 일에서 너라고 벗어날 수 있겠냐는 조소였다. 침묵과 방관,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핑계 아래 최은성은 어느새 공범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까불지 마. 너 같은 새끼가 빌붙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
“알아들었으면 가서 안 돌아가는 머리라도 굴려 봐, 멍청한 새끼야.”
“…쉬십시오, 형님.”
결국 은성은 늘 그랬던 것처럼 얌전히 대답했다. 재우의 얼굴에 다시 한번 노골적인 비웃음이 맺혔다.
멱살을 잡았던 손을 놓아주자 은성은 빠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려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웃은 것도 잠시, 재우의 얼굴은 다시 초조함으로 물들었다.
소파에 앉은 재우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최은성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지금 벌어지는 일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마지막 수는 그야말로 같이 죽자는 마음으로 벌인 일이었다. 저답지 않은 일이라는 건 알았다. 그만큼 심적으로 몰려 있어 시야가 좁아진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실행한 일은 아니었다. 한재우는 그 한 수가 적어도 윤사영에게 더 큰 타격을 줄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벌인 일이었다.
그런데 녹음본이 있었다니. 제 앞에서 벌벌 떨며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새끼가 뒤에서는 이 순간을 위해 녹음을 하고 있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씨발… 씨발….”
지금이야 웬만한 스케줄은 전부 취소하거나 연기해 두었지만 막 일이 터졌을 때는 중요한 일정을 그대로 소화해야 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재우는 그간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경멸의 시선을 고스란히 느껴야만 했다.
무명이었을 때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시선이었다. 무시하거나 조롱하는 이들은 있었을지언정 무명인 한재우에게 굳이 악의를 가질 사람은 없었다.
윤사영을 만난 후에는 더욱 그랬다. 처음에는 시기와 질투를 하는 이가 있었지만 그런 건 오히려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사영의 이미지를 망가트리기 시작하면서 재우는 늘 더없이 따뜻한 시선만을 받아 왔다. 경멸과 조소는 전부 윤사영의 몫이었다.
그게 얼마나 끔찍한 기분인지, 사람을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럽게 하는지 한재우는 알 기회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람들의 시선에 위축되는 윤사영을 한심하다고 비웃었다.
윤사영은 온실 속에 자란 탓에,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살아온 탓에, 그렇게 나약하고 한심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만한 경멸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버린 거라고 그를 조롱하기만 했다.
오랫동안 처절한 무명의 삶을 견뎌 온 자신은 절대 저렇게 무너지진 않을 거라고 자신하면서.
그런데 아니었다. 직접 겪어 보니 막연히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고작 며칠뿐이었는데도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았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는 게 싫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무서웠다. 주위 사람들이 전부 제 욕을 하는 것 같았다. 들리는 말이 없어도 그랬다.
온라인 상황은 더 심각했다. 평소 자신의 이름을 검색해 달라진 자신의 위상과 윤사영의 추락을 보는 걸 즐겼던 탓에 변화는 더욱 극적으로 느껴졌다.
어딜 가든 한재우를 욕했다. 사람들은 그동안 한재우에게 속았음에 분통을 터트렸다. 간간이 재우를 옹호하는 의견이 있긴 했지만 그런 말들은 영락없이 질타를 받았다.
사영을 찬양하고 그가 묵묵히 견뎌 온 시간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이런 일을 겪고서도 마지막까지 조용히 덮으려고 애썼던 사영의 사려 깊음에 모두가 감탄했다.
그런 사영에게 감사해하지는 못할망정 마지막까지 추잡한 수를 쓰다가 자승자박의 결과를 초래한 한재우를 모두가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
우습지도 않은 일이다. 재우는 그들 중 상당수가 공범임을 알았다. 재우가 퍼트리는 루머에 편승해 같이 윤사영을 욕하고, 조롱하고, 스포츠처럼 그 일을 즐겼을 이들이 이제 와 자신들은 깨끗한 것처럼 굴며 한재우를 심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왜… 도대체 왜….”
실핏줄이 터져 벌게진 눈을 한 한재우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몸을 흔들며 중얼거렸다. 도대체 일이 왜 여기까지 온 건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윤사영은 언제부터 이 일을 계획했을까. 촬영장에서 몰래 그에게 악담을 퍼부었을 때였을까. 아니면 <하지>에 참여하게 된 순간 이 일을 꾸몄을까.
아니면 병원에서 마주쳤을 때였나. 그때 너무 심하게 대해서 복수심을 품은 걸까. 그것도 아니면. 갑자기 이혼을 통보하던 그 순간부터 전부 다 계획된 일이었을까.
아무 의미도 없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시작이 언제였든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는데 말이다. 그걸 알면서도 한재우는 해답을 찾는 사람처럼 그 생각에 매몰됐다.
왜냐하면 한재우는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기회가 있었는지. 어느 시점에 멈췄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을 수도 있었던 건지. 윤사영의 마음을 되돌릴 기회가 혹시 정말로 있었던 건 아닌지.
재우는 그걸 알고 싶었다. 그게 더없이 중요한 일처럼 느껴졌다.
이제는 전부 다 끝났기 때문이다. 한재우는 더 이상 그 사실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정말로 끝이었다. 윤사영과 자신 사이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사영은 놀랍게도 홀가분해 보였다. 녹음한 음성을 공개하고, 잘못된 소문을 바로잡고, 사과를 요구하면서도 이 일에 매몰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재우는 온갖 기사를 통해 웃는 윤사영의 얼굴을 매일 보았다. 여유롭게 일상을 보내는 사영의 얼굴에서는 한 점의 그늘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는 행복해 보였다. 오래전에 한재우를 전부 다 극복한 사람 같았다. 바로 그 점이, 재우는 견딜 수가 없었다.
어렵게 쌓아 온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는 와중에 사영의 그 얼굴이 가장 아팠다.
“흑… 사영아… 사영아아….”
재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음처럼 사영의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다.
만약 계속 계산하며 연기하지 않고 진심으로 무릎 꿇고 울었다면, 돌아와 달라고 진정으로 매달렸다면, 이 마음에 한 톨의 거짓도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애원했다면 사영은 제게 기회를 주었을까.
상황이 이렇게까지 엉망이 되었는데도 헛된 가정을 멈출 수가 없었다.
평판, 커리어, 금전적인 부분, 무엇 하나 뼈아프지 않은 손해가 없는데도 윤사영을 영영 잃었다는 사실이 가장 가슴에 사무치는 슬픔이라는 걸 스스로 느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단 한 가지만 되돌릴 수 있다면 그게 윤사영의 마음이길 바라고 있다니.
전처럼 선심 쓰듯 내가 너를 다시 받아 줄게, 하는 마음은 당연히 아니었다. 간절했다. 그의 애정이, 온기가 그리웠다.
사영이 곁에서 자신을 안아 주고, 다독여 주고, 괜찮다고, 내가 있다고 말해 준다면 지금 겪는 이 지옥 같은 상황도 태연하게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놀랍게도 말이다.
“제발….”
하지만 그런 사영을 먼저 매몰차게 버린 건 한재우 자신이라. 몇 번쯤 있었을지도 모를 기회를 전부 던져 버린 것 또한 자신이 한 일이라.
재우는 제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밤 어떠한 위안도 없이 혼자서 울었다.
***
은성은 차를 운전해 어둠이 내려앉은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집은 지나친 지 오래였다. 가슴이 답답해 이렇게 달리기라도 하지 않으면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사영의 입장문은 은성도 읽어 보았다.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한재우가 해 왔던 악행을 나열한 입장문에서 은성은 자신을 향한 문장을 찾아볼 수 없었다.
사영이 원했다면 한재우의 매니저인 최은성이 얼마나 충실하게 재우의 손발이 되어 움직였는지 적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사영은 그러지 않았다.
의도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아마 자신이 그만한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라 그랬을 것이다. 한재우라는 대어를 잡아야 하는데 굳이 피라미에게 여론을 분산시킬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