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유준과 사귀며 전남편인 한재우와 바람을 핀다? 의혹만으로도 연예계를 발칵 뒤집을 수 있는 추문인데 심지어 사진이 떴다.
어두운 밤이기도 했고 거리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찍은 사진이었지만 한재우와 윤사영, 두 사람이 키스하고 있는 걸 알아볼 만큼은 되었다. 여론이 들끓을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사영에게 불리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오래전부터 한재우와 관련된 안 좋은 소문이 떠돌던 사영이다. 비호감으로 굳어진 이미지가 바뀌기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영화가 흥행하면서 몰아치는 엄청난 기세에 잠시 숨을 죽이고 있던 이들이 이때다 싶어 수면 위로 올라와 과거 얘기를 들먹거리며 사영을 공격했다.
한재우에 대한 비판도 없는 건 아니었다. 그 꼴을 당하고 이혼했으면서 새 애인도 있는 사람과 다시 만나는 것 역시 봐줄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재우가 윤사영에게 얼마나 오랫동안 시달리고 학대당했는지 안다고 자신하는 이들로 인해 재우는 어느 정도 동정표를 살 수 있었다.
한재우가 이렇게 된 것도 결국 윤사영 때문이라고들 했다. 윤사영 같은 희대의 나쁜 새끼만 만나지 않았으면 한재우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는 거다.
스톡홀롬 신드롬이니 뭐니 그럴듯한 단어들이 한재우를 변호하는 데 쓰였다. 일단 해명을 들어 보자고 하는 사람들의 말은 전부 묻혔다.
늘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자극적인 스토리에 열광했고 공개된 사진을 내세우며 그들은 자신들의 말이 전부 다 명확한 근거를 가진 사실인 양 말했다.
유준은 이 일에서 완벽한 피해자의 포지션이었으나 대한민국 최고의 배우라는 명성에는 적잖이 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세상 잘난 척은 혼자 하던 남자가 윤사영한테 넘어간 것도 우스울 마당에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사영이 전남편과 바람을 폈다.
그간 유준의 승승장구에 열등감을 품고 있던 이들은 천하의 김유준도 사실 별 볼 일 없는 모양이라고, 고자라는 소문이 사실인 거 아니냐고 그를 비웃었다.
한재우는 피해자기 때문에 정상을 참작해야 한다고 떠드는 이들과 본인들의 말에 따르면 역시 피해자인 유준을 조롱하고 우습게 여기는 여론이 한데 들끓었다.
그 모순을 지적하는 사람들의 말 역시 심심치 않게 올라왔으나 온라인 세계에서 힘을 얻기는 역부족이었다.
각 배우들이 소속되어 있는 회사에서 대응이 바로 나오지 않자 논란은 더더욱 가속화되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이 사달을 만든 사영은, 제집에서 유준과 편안한 소파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는 중이었다.
***
“유준 씨까지 이런 소리 듣게 해서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은 그만 듣겠다고 한 것 같은데….”
“그래도요.”
“어차피 내가 돕기로 한 복수였잖아요. 알고 시작한 건데, 뭐.”
고개를 살짝 돌려 유준의 태연한 신색을 바라보던 사영은 아직 미안한 감정을 다 버리지 못한 얼굴로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유준의 말대로 애초에 제가 만들 진창에서 함께 굴러 달라고 유준을 끌어들이긴 했지만 이제는 상황이 너무나도 달라지지 않았나.
새로운 삶에서 유준을 그 무엇보다 아끼게 되어 버린 사영은 저 때문에 유준이 듣지 않아도 되었을 조롱을 듣는 게 속상했다.
끝까지 복수를 이어 갈 거라 다짐했다고 해서 유준에게 미안함이 없는 건 아니었다.
유준은 손을 뻗어 그런 사영의 머리카락을 슬슬 쓰다듬어 주었다. 지금 누구보다 마음이 복잡한 건 사영일 텐데도 제 마음을 염려해 주는 애정이 좋았다.
“정말로 나한테 미안하면… 이제 다시는 이런 위험한 방법은 쓰지 말아요.”
그렇다고 해서 유준이 사영에게 전혀 화를 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유준은 일이 벌어진 그날 새벽, 촬영이 끝나자마자 사영의 연락을 받아 자초지종을 먼저 들었다.
사영이 취한 건 고육지책이었다. 마지막 한 방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미끼로 내던진 셈이다. 복수를 돕는 조력자로서는 칭찬해 줄 만했다. 더 큰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나 사영의 ‘진짜’ 연인으로서의 유준은 그 방법을 결코 반길 수 없었다.
나중에 뒤집힐 여론이라고 하더라도 굳이 먹지 않아도 될 욕을 더 듣게 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번에도 역시 사영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대비책으로 우종을 불렀다곤 했으나 새벽에 혼자 한재우를 만나기로 한 건 확실히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유준을 배려한답시고 미리 연락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은 덤이었다.
게다가 그토록 사랑하는 연인이 다른 남자와 입을 맞췄다. 원해서 한 게 아니라는 말은 오히려 더 화가 났으면 났지 단 한 톨의 위안도 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 모습이 사진으로 찍혀 만천하에 공개되다니. 다른 사람이었으면 이별 사유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와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앞선 어떤 이유보다 연인이 다른 남자와 키스했다는 사실에 가장 크게 화를 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유준은 그 키스 자체로는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유준은 사영을 위로했다. 그가 받았을 상처를 걱정했다.
위험한 선택이긴 했으나 당시 사영이 어떤 심정으로 한재우를 대면했을지 유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준은 사영에게 한재우에 대한 미련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음을 확신했다. 그 입맞춤도 그저 한재우를 찌를 칼을 가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걸 알면서도 그 행위 자체를 꼬집고 비난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에요. 이게 끝나면… 더는 그 사람과 엮일 일 없을 거예요.”
사영은 제 머리를 쓰다듬는 유준의 손에 고개를 움직여 뺨을 살짝 기대며 말했다.
어떻게 이런 남자가 제 곁에 있는지, 어째서 나 같은 걸 사랑한다고 하는 건지 사영은 아직도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사영은 제발 자신을 받아 달라고 매달려 오는 한재우에게 억지로 붙들려 강제적인 행위를 당하고 난 뒤에도 차분하게 제 일을 했다.
적절한 순간에 나타나 한재우를 죽이겠다고 날뛰는 우종을 진정시켜 집으로 보내고, 촬영이 끝난 유준에게 피곤하겠지만 집으로 와 줄 수 있냐고 말할 때도 사영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러나 집으로 와 모든 설명을 들은 유준이 어떤 것보다 가장 먼저 사영을 안아 주고 고생했다고, 많이 힘들었겠다고 말해 주었을 때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그 품에 안겨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복수를 위해서라지만 재우와 키스까지 한 것을 두고 유준이 자신을 비난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비난을 기꺼이 들을 각오를 하고 벌인 일이지만 막상 유준을 마주하자 그가 화를 내는 것으로도 모자라 헤어지자고 하면 어쩌나 순간적으로 얼마나 겁이 났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다른 무엇보다 사영의 안위를 걱정하고, 사영의 다친 마음을 먼저 살피려 하는 유준의 마음 앞에서 사영이 어떻게 태연한 척 버틸 수가 있었겠느냔 말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영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주고, 이토록 우직하게 곁을 지켜 주는 유준이 있어 사영은 세간에서 떠드는 말들이 아프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았다.
혼자서 끝없는 지옥으로 빠져들었던 지난 생과는 달랐다. 사영에게는 이제 그때는 없었던 많은 온기가 존재했다.
곁에서 자신을 믿어 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는데도 이번에는 사영이 직접 말을 해 줄 때까지 섣불리 판단하지 않겠다고 기다려 주는 팬들이 있었으며, 사영의 손에는 제가 당한 모든 악업을 단숨에 되돌려줄 무기도 있었다.
“언제 공개할 겁니까?”
유준이 물었다. 목적어가 빠진 말이었지만 사영은 곧바로 말뜻을 알아차렸다.
그가 말한 건 사영이 가지고 있는, 한재우의 폭언을 그대로 담은 녹음본을 얘기하는 거였다.
한재우의 이 한 수로 사영은 복수의 마지막 단계를 더는 미룰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수작인 걸 알면서도 굳이 당해 준 건 다음 단계를 위해서였다.
사영은 대답하기 전에 말없이 유준에게로 은근히 몸을 기울였다. 유준은 어렵지 않게 그 의도를 파악하고 사영의 어깨를 감싸 안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사영은 익숙하게 두 팔로 유준의 허리를 감았다. 더는 낯설지도, 부끄럽지도 않은 행위였다. 사영은 제 등을 부드럽게 쓸어 주는 유준의 손길을 느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진심으로 반성하고 사과했으면… 달라졌을까요?”
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사영은 문득 궁금했다. 만약 재우가 마지막까지 이렇게 발악하지 않고 진심으로 참회하고, 무릎 꿇고 눈물로 사과를 해 왔다면. 그랬다면 제 마음이 달라졌을까, 하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영은 녹음본을 공개하는 일을 꺼렸다. 유준과 그 자신의 평화가 좋았던 이유도 있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이제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팬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탓이다.
이미 수없이 많은 힘겨움을 겪어 가며 자신을 응원해 주는 팬들이었다. 여기서 또 한재우와 관련해 일이 생기면 그게 진실을 밝히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팬들에게는 분명 큰 상처가 될 것이다.
앞으로는 좋은 연기로만 보답하겠다고 했는데 얼마 지나지도 않아 또 이런 소란을 겪게 만드는 것이 미안했다.
“글쎄요. 그건 모르겠지만… 벌어진 일도 아니고, 앞으로 벌어질 일도 아닌데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까?”
“아….”
하지만 유준의 대답은 순식간에 사영의 마음에 남아 있던 번민을 저 멀리 밀어 버렸다. 그의 말이 옳았다.
어차피 일은 벌어졌다. 한재우는 반성은커녕 마지막까지 윤사영을 불행하게 만들겠다고 추잡한 짓까지 벌였다. 이런 마당에 있지도 않은 가정을 하며 감정 소모할 이유가 없었다.
사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지금 고민할 건 그런 게 아니죠.”
“사영 씨가 나나 팬들 때문에 망설이는 건 알고 있어요.”
“…….”
“그래도, 진실이 밝혀지고 나면 앞으로 사영 씨 팬들도 더 편해질 거예요. 거짓 소문으로 매도당할 일은 없을 테니까요.”
“맞아요.”
유준의 말이 이어질수록 사영의 표정이 단단해졌다. 지금도 사영의 팬들은 쓰레기 같은 연예인을 실드 쳐 주는 정신 나간 집단 취급받곤 했다.
사영이 이 일을 깨끗하게 해명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사영의 팬들은 계속 그런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영은 다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애초에 물러설 생각은 없었으나 길게 보면 팬들을 위해서라도 오히려 이렇게 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잘될 거예요.”
유준이 말했다. 사영은 그 품에 안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정말로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긋지긋하게 얽혔던 악연의 마지막이었다.
한 사람의 마음을, 평생을 이용하고 쓰레기처럼 버린 한재우는 그에 걸맞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네. 그렇게 만들 거예요.”
다른 누구도 아닌 윤사영의 손에 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