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한재우가?”
- 네. 할 말이 있다고 잠깐… 잠깐 나오라고 할 거예요. 잠깐이면 된다고.
은성의 목소리는 지극히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마치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무슨 의도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차피 한재우가 찾아올 거라면 굳이 은성을 시켜, 그것도 이렇게 다급하게 그 사실을 알릴 이유가 뭐냔 말이다.
오히려 불시에 찾아와 사영을 당황하게 하는 편이 한재우에게는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사영의 추측을 아득하게 벗어나는 말이었다.
- 그러면… 나오지 마세요, 형.
순간 시공간이 멈추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오지 말라는 말도, 사영을 ‘형’이라고 부르는 은성도 당황스럽긴 매한가지였다.
한재우가 본성을 드러내기 전에는 은성과 사영 역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은성은 늘 자신을 친절하게 대해 주고 살뜰히 챙기는 사영을 형이라고 부르며 따랐다.
이제는 아득해진 먼 과거의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은성이 다시 그때의 호칭으로 사영을 부른 것이다.
그가 말한 내용은 더욱 기가 막혔다. 한재우가 얘기를 하자고 찾아올 텐데 나오지 말라니. 은성은 지금 분명 한재우의 말을 무시하라고 대놓고 말한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은성 씨.”
사영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으며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머릿속으로는 연신 그의 말 뒤에 무슨 의도가 담겨 있을지 파악하려 애썼다.
얼핏 듣기론 은성이 재우의 명령과 반대되는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이조차도 사실은 한재우가 시킨 일일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은성은 더 간절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 제가 미덥지 않으실 거 알아요. 아는데… 제발 저 한 번만 믿어 주세요. 형님은 지금 어떻게든 형을 망치고 싶어 해요. 곧 형님이 내려올 거고 그럼 저는 형님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어요.
“알았으니까 최대한 간단히, 한재우가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 말해 줘요.”
사영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은성이 하는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확신할 순 없지만 그 말을 믿을지 믿지 않을지는 듣고 나서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사영의 질문에 은성은 목소리를 덜덜 떨면서도 빠르게 한재우가 왜 사영을 찾아가려는지, 자신에게 무엇을 시켰는지 털어놓았다.
그는 정말로 한재우가 당장 나타날까 봐 두려운 것처럼 떨었다. 듣는 사람까지도 덩달아 불안해질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사람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사영이 알기로 은성은 한재우의 명령을 위해 이렇게까지 실감 나게 연기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사영이 그의 말을 믿을 만하다고 느낀 건 은성이 알려 준 한재우의 계획이 정말로 딱 한재우가 할 법한 일이었던 탓이다.
어쩜 이렇게 한 치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걸까 싶을 정도였다. 결국 그 무엇으로도 한재우를 바꿀 수는 없었던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러니까 형… 한재우 연락이 오면 무시하세요. 제발요.
한재우에 대한 상념이 더 깊어지려는 차에 은성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사영의 눈동자가 옅게 반짝였다.
이번 생에서도 한재우를 교화시킬 순 없었다. 그가 진정으로 반성하고 사영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한 뒤 스스로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은성은 변했다. 고작해야 사영에게 한재우를 피하라는 조언을 전해 주는 정도의 소극적인 행동에 불과하다고 해도 이번 생의 은성은 사영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 사실이 사영에게 작은 위안이 되었다.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위로인지는 사영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고마워요, 은성 씨.”
조금은 충동적으로 사영이 말했다. 자신이 지금 느낀 위안에 대한 대답을 해 주고 싶었다.
사영은 피해자이면서도 동시에 은성의 심정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 역시 오랫동안 한재우의 밑에서 심각한 학대를 당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은성은 심지어 재정적인 부분이 한재우와 연관되어 있으니 더더욱 그의 영향을 벗어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제게 했던 일을 전부 용서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사영은 적어도 지금 은성이 보여 준 작은 용기에 대해서는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은성은 말이 없었다. 사영이 전한 고맙다는 인사에 당황했을 수도 있고, 그 인사를 듣고 나니 이제야 제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실감 나 후회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사영에게는 별로 상관없었다. 사영은 이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를 고민해야 했다.
“은성 씨 얘기는 잘 들었어요. 이후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은성 씨는 한재우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 안, 안 나가실 거죠?
“내가 알아서 할게요. 신경 쓰지 말고 은성 씨는 그냥 평소대로 하세요.”
- …네, 알겠습… 끊을게요!
은성은 다시 기운 빠진 목소리로 대답하다 말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한재우가 나온 모양이다. 사영은 가만히 숨을 고르며 생각을 정리했다.
처음 은성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당연히 한재우가 시킨 말을 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용을 듣고 보니 그건 아닐 확률이 높았다.
최은성을 믿어서라기보다는 이 말을 사영에게 전해서 한재우가 얻을 이익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은성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해도 한재우가 얻을 효용성이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 한재우의 공작에 오랫동안 당해 온 사영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최은성의 말은 사실일 거라고. 이건 한재우가 최후의 수단으로 삼을 법한 수작이라고.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웃음이 나왔다. 너무 기가 막혀 화도 나지 않았다.
한재우의 이번 계획은 그 자신의 커리어에도 크게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크든 작든 한재우 역시 세간의 비난을 피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일을 계획한 건 오직 윤사영을 불행하게 만들고야 말겠다는 집착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똥물을 뒤집어쓰더라도 윤사영만큼은 똥통에 빠트리겠다는 거다.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면 김유준과 함께하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의지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노골적인 악의에 사영은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복수를 해야 한다면 재우가 마지막까지 나쁜 놈인 편이 좋았다.
사영의 시선이 거실에 걸어 놓은 시계로 향했다. 새벽이라 차도 안 밀릴 테니 한재우가 오기까지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사영은 휴대폰을 다시 쥐었다. 습관적으로 찾은 이름은 당연히 유준이었다. 하지만 통화 버튼을 누를 순 없었다. 유준이 아직 촬영 중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준은 광고 촬영 중이었다. 드라마 형식의 촬영이라고 했다. 안 그래도 일정이 길어져서 고생하고 있는 사람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유준이 올 수 있는 상황이라면 연락을 했겠지만 지금 유준이 상황을 안다고 해 봤자 그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사영은 유준이 한재우가 찾아온다는 말에 촬영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제게 달려올까 봐 오히려 겁이 났다.
사영은 유준이 자신의 본업과 관련해 책임감 없이 행동하는 걸 무엇보다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동시에, 사영은 최근 유준이 자신과 관련된 일에 있어서만큼은 얼마나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는지 수도 없이 보고 느꼈다. 한재우가 집으로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 그가 바로 달려오지 않고 촬영을 무사히 마치고 난 후에 올 거라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설령 유준이 당장 달려오지 않는다고 해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유준은 분명 이런 상황에서 사영을 혼자 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것이다. 어쩌면 걱정 때문에 촬영에 집중하기 힘들 수도 있었다. 사영은 정말로 그런 일을 바라지 않았다.
결국 사영은 유준에게 연락하는 대신 우종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성을 통해 한재우가 어떻게 행동할지 들었어도 돌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으니 대비는 해야 했다.
우종에게 간단한 설명을 하고 바로 집으로 와 달라 말하며 통화를 마친 후 사영은 눈을 감고 제게 다가올 순간을 침착하게 기다렸다.
사영은 위기일 수도 있는 이 상황을 기회로 만들 작정이었다.
***
야 윤사영 진짜 미친새기 아니냐????
양다리를 걸친 건지 아니면 김유준이랑 사귀는 중에 한재우를 다시 꼬신 건지 뭔지 어느쪽이어도 진짜 개쓰레기닼ㅋㅋㅋㅋㅋ
솔직히 윤사영 소문 워낙에 안 좋아서 좋아하진 않았거든
근데 이번에 영화 잘되면서 팬도 많아지고 옛날 얘기 다 루머네 뭐네 하면서 비판하는 사람들 몰아가고 그런 분위기 심해가지고 그냥 흐린눈하고 있었단 말이야?
이혼한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김유준이랑 사귀는 것도 그렇고 요란 떠는 것도 그렇고 나는 계속 어딘가 좀 쎄했는데 역시... 내 촉......
실제로 만나면 진짜 무슨 매력이 있긴 있나 보다 김유준 한재우쯤 되는 배우들이 저렇게 놀아나는 거 보면 ㅋㅋㅋㅋㅋㅋ 페로몬이 진짜 개쩌나?
한재우도 솔직히 실망인데 워낙에 옛날부터 가스라이팅 당했으니 그 영향도 있을 것 같아서 안쓰럽기도 하고 김유준은 불쌍한데 한심하고 윤사영은 진짜 소오름.....
└ 아직 어떻게 된 건지 확실히 아는 것도 아닌데 입장문 나올 때까지 기다려봐
└└ 존나 웃기네 ㅅㅂ 전남편이랑 키스하는 사진이 떴는데도 확실히 아는 거 아님 ㅇㅈㄹ.. 뭐 ㅅㅅ사진이라도 떠야되냐?
└└ 윤사영 팬들은 지금 다 이소리 하고 있더랔ㅋㅋㅋㅋㅋㅋㅋㅋ 직접 해명하는 거 듣겠다고 ㅋㅋㅋㅋ
└└ 냅둬 원래 탈덕은 지능순임 애초에 윤사영 어떤 사람인지 다 알고 있는데 덕질하고 있는 것만 봐도 걍 한심한 종자들임 얼굴만 빠는 애들
└ 진짜 개실망....
└└ 22222 하지 보고 호감됐는데 ㅋ....
└ 김유준이랑 얼마 전에 반지도 맞췄다며...
└ 근데 사진 보면 윤사영은 좀 거부하는 것 같지 않았음?
└└ 야너두? 조심스러워서 말 못했는데 약간... 팔 잡힌 거 보면....
└└ 또 이지랄이네 지네 배우 쓰레기인거 인정 못해서 어떻게든 한재우 방패로 쓰려고ㅗㅗ
└ 진짜 둘이 다시 만나는 거면 한재우한테도 진짜 실망이다....
└└ 네 다음 양비론
└ 저 사진은 누가 찍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