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필요 없어…?”
사영의 말투도 거슬렸다. 과거의 한재우라면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을 건방진 말투였다. 필요 없다고 말하는 건 언제나 한재우의 몫이었다.
사영을 되찾기 위해 먼저 자존심을 굽히고 고개를 숙이긴 했지만 사영이 대놓고 제게 기어오르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윤사영.”
“그냥 할 말만 하고 갈게요. 어차피 한재우 씨도 내 대답이 궁금할 테니까.”
여전히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가 재우를 자극했다. 단순한 불쾌함이 아니었다. 사영의 태도는 그간 애써 억눌러 놓았던 재우의 불안함을 다시 부추기고 있었다.
윤사영은 결국 나를 선택할 거라고. 자신이 먼저 손을 내민 이상 윤사영은 결코 자신을 거부할 수 없을 거라고.
김유준을 사랑한다고 말하던 사영의 모습이, 별거 아닌 객기라고 치부해 버렸던 날들의 기억이 날카롭게 일어났다.
“…네 대답이 뭔데.”
언제 느긋하고 여유롭게 말을 걸었냐는 듯 재우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도 사영은 주눅 들지 않았다.
지금 사영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한재우가 아니라, 윤사영 그 자신이었다.
“나는… 나는….”
이 말을 하기까지 걸어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난 생에는 죽는 날까지 자신이 한재우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사영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김유준을 통해 전해 주고 싶었던 대답을 사영은 결국 스스로 뱉을 수 있게 되었다.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고양감이 느껴졌다.
“나는 한재우 씨 마음을 받아 줄 생각이 없어요.”
“…뭐?”
“이미 말했듯이, 나는 더 이상 한재우 씨를 사랑하지 않아요.”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조차 그의 기분을 거스를까 조심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 같은 게 그를 사랑한다는 게 죄스러워 감추기 바빴다. 그런 날들을 지나 이제 사영은 한재우에게 당당히 말했다.
“…나한테 그런 짓을 해 놓고도, 내가 당신을 계속 사랑하길 바랐어요?”
“너… 너 내가….”
“나는 이미 한참 전에 당신을 내 마음에서 버렸어.”
피를 흘리며 홀로 죽어 가던 그 날, 그 밤에.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이전에. 사영의 사랑은 끝났다.
“윤사영 너 지금….”
한재우는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분명 사영의 말을 들었는데 머릿속에 제대로 입력이 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분명 윤사영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너를 아프게 했던 걸 후회한다고, 내도록 너를 그리워했다고, 사실은 전부터 너를 사랑했는데 그런 내 마음을 인정하는 게 힘들었다고.
누구라도 마음이 허물어질 수밖에 없을 만큼 절절하게 고백했다.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애원했다.
그날 이후 재우는 몇 번이나 그 순간을 복기해 보았다. 자신의 연기는 완벽했다. 한재우 스스로도 그게 진심인 것처럼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을 정도로 말이다.
그랬는데. 그렇게까지 했는데 돌아온 윤사영의 대답이 거절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건드리지 말아요.”
반사적으로 사영의 어깨를 쥐려고 뻗은 재우의 손을 사영이 거칠게 쳐내며 대답했다. 겁을 먹은 게 아니었다.
사영은 마치 한재우의 손길이 닿는 일 자체가 견딜 수 없이 싫은 것처럼 보였다.
내 손끝에라도 닿기를 갈구했으면서. 어떻게든 내 마음을 잡고 싶어서 아무 때나 다리를 벌려 받아 주었으면서. 이제 와 감히.
점점 더 차갑게 굳어지는 재우의 표정을 보며 사영은 현관 쪽으로 한 걸음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참고로 지금 집 앞에 매니저가 기다리고 있어요. 내가 나타나지 않으면 집으로 찾아올 거예요.”
“씨발, 윤사영 너 지금 뭐 하는 건데!”
결국 참지 못한 재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매니저를 집 앞에서 기다리게 했단다. 처음부터 이럴 심산으로 찾아온 것이다.
그건 같잖은 핑계로 시간을 벌어 놓고 그동안 자신을 차 버릴 계획을 짜고 있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이 김유준과 윤사영 둘을 참아 주고 있는 동안 말이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음을 뒤집어쓴 것처럼 전신이 차가워졌다가 불덩어리를 집어삼킨 것처럼 속이 탔다.
생각을 해야 하는데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온통 사영이 뱉은 거절의 말이 맴돌았다.
흥분한 재우의 앞에서도 사영은 차분했다. 표정만 보면 여전히 한재우에게 순종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을 만큼 얌전한 얼굴이었다. 그런 얼굴을 하고서 사영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왜요…?”
그와 동시에 사영에게서 향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한재우에게는 늘 너그러운 자연과 같았던 향이 오늘은 오로지 그를 밀어내고 거부하기 위한 차가운 기운을 선사했다.
한재우는 제가 가진 알파의 페로몬으로 늘 오메가인 사영을 억누르고 농락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오늘만큼은 사영의 향에 속수무책으로 위축되었다. 믿기 힘든 감각이었다.
“이제 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주면… 내가 기다렸다는 듯 다시 당신한테 돌아갈 줄 알았어요?”
“너… 너….”
“한재우 씨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었네요.”
어떻게 말을 하면 좋을까 수도 없이 생각했다. 밤마다 머릿속으로 이 순간을 그리고 또 그렸다.
미친놈처럼 화를 낼까. 드라마처럼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죄다 쓸어버릴까. 뺨을 한번 올려붙여 볼까. 아니면 그 얼굴에 침을 뱉을 기세로 비웃어 줄까.
어떻게 해야 죽어 버린 자신에게 위로가 될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러나 막상 한재우의 앞에 서자, 사영은 그 모든 것들이 다 부질없이 느껴졌다. 한재우가 너무 보잘것없어서 그랬다. 이미 한참 전부터 한재우는 사영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사영은 진심으로 한재우가 불쌍하다는 듯한 처연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한재우 씨의 사랑이 뭐라고….”
“유, 윤사영….”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서늘하고 딱딱한 사영의 향에 한재우의 몸이 굳었다.
“어떻게 너….”
“나한테 한재우 씨는 이제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나를 사랑하든 말든… 그런 건 이제 한재우 씨가 알아서 하세요.”
‘네가 날 사랑하는 게 뭐.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내가 그거까지 신경 써야 해?’
한재우에게서 들었던 많은 말들이 사영이 뱉은 말을 통해 하나둘 빠져나와 허공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정말… 다시 이렇게 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이혼하자고. 내가 너한테 원하는 건 그것뿐이니까.’
말을 하면 할수록 희열은 옅어지고 감정은 침착해졌다. 오늘을 준비하며 사영은 이 복수의 클라이맥스가 다가온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이 순간을 겪고 나니 이건 클라이맥스가 아닌 마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가장 치열하고도 짜릿한 순간은 사영이 진정으로 한재우를 마음속에서 밀어내고 극복했던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복수를 끝마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남은 건 말 그대로 한재우가 자신의 업보를 청산하는 일일 뿐, 사영에게 특별한 의미가 될 수 없었다.
“그럼 서로 더 할 말도 없을 테니… 가 볼게요.”
“사, 사영아…!”
처참하게 허물어진 한재우의 표정을 짧게 감상한 뒤 미련 없이 돌아서는 사영의 손목을 다급하게 붙든 건 절박하게 사영의 이름을 부르는 한재우였다.
고개를 돌리자 언제 야차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냐는 듯 당장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을 한 한재우가 있었다.
“자, 잠깐 내 말 좀 들어 봐…!”
생각할 틈도 없었다. 사영이 돌아서서 집을 나가려는 순간 재우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대로 사영이 나가면 그와 자신의 인연은 정말로 완전히 끊어질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자존심이 상할 새가 없었다. 그런 건 다음 문제였다. 일단은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을 기세로 돌아서는 사영을 붙드는 게 중요했다.
“…….”
사영은 대답도 없이 그저 걸음을 잠시 멈춘 채 재우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재우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처음이었다. 이토록 무감한 시선은. 늘 사랑이 가득 차 있던 예전의 윤사영은 물론이고 그 이후로 겁을 먹든 상처를 받았든 늘 감정이 넘치게 흐르던 눈동자와는 차원이 달랐다.
하물며 이혼 후에도 재우를 보는 사영의 눈에는 온갖 감정이 넘실거렸건만 지금 재우를 쳐다보는 사영의 시선에서는 증오의 감정조차도 없었다.
“사영아….”
재우는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지난번 촬영장 호텔에서 그랬던 것처럼 애타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사영이 어떤 반응이라도 보여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할 말이 남았어요?”
하지만 한재우의 바람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대답하는 사영의 음성에는 여전히 틈이 없었다.
‘재우 씨….’
‘짜증 나게 왜 자꾸 불러. 할 말 있으면 해.’
그 순간, 재우는 한 번도 진지하게 되새긴 적 없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간절하게 저를 부르던 사영을 무시하고 오히려 윽박지르던 날의 제 목소리였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찰나의 순간에도 셀 수도 없이 많은 기억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사영의 손목을 쥔 재우의 손이 거세게 떨렸다.
“…할 말이 있다고 해도 이제 나는 별로 재우 씨 얘기가 궁금하지 않아요.”
“내가… 내가 잘못했어, 사영아. 내가 잘못했다고 했잖아!”
“…….”
“내가 몰랐다고… 실수했다고… 그러니까 나한테 기회를, 기회를 줘야 하잖아, 너는!”
부탁인지 협박인지 모를 말들이 두서없이 튀어나왔다. 지난번과 비슷한 사과였지만 그 말을 뱉는 재우의 감정은 그때와 같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