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그래서, 문준성 그놈한테 웃어 줬어요, 안 웃어 줬어요.”
- 네?
휴대폰 너머에서 들리는 당황한 사영의 목소리가 귀여웠다. 그러나 유준은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유준은 빠르게 질문을 이어 갔다.
“문준성 그 새끼한테 연락처 줬어, 안 줬어.”
- 유준 씨, 지금 무슨 소리를…?
유준의 단어 선택이 거칠어지면 거칠어질수록 사영의 목소리가 더 크게 흔들렸다. 유준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문준성은 오늘 사영과 함께 광고 촬영을 한 배우였다.
“오늘 광고 촬영장에서 둘이 아주 좋아 죽었다면서요?”
- 누가 그런 말을 해요. 그런 일 없었어요.
“없긴. 벌써 둘이 절친 됐다고 소문이 쫙 났는데.”
- …정말요?
지금까지는 반쯤 농담으로 툴툴대던 유준의 표정이 본격적으로 와락 일그러졌다.
일종의 투정을 부리고 싶어서 아무렇게나 한 말인데 사영의 반응을 보니 촬영장 분위기가 제법 좋았던 모양이다.
“와, 너무하네. 바쁘다고 나한테는 얼굴도 안 보여 주더니.”
- 준성 씨랑은 그냥 같이 촬영 잘하려고 그런 거죠. 그리고….
사영은 잠시 말을 머뭇거렸다. 유준은 소파에 앉아 다리를 우아하게 꼬고 어디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는 주겠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 그리고 바빠서 저 안 만나 주는 건 유준 씨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러나 사영의 다음 말이 이어진 순간 유준의 가면은 완전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꼬았던 다리도 풀고 당장 뛰쳐나갈 것처럼 몸을 일으켜 세운 유준은 제 감정을 다스리려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
사영의 목소리에는 분명 그리움이 어려 있었다. 그도 자신을 못 봐 아쉬워하는 게 분명히 느껴졌다.
그걸 깨닫자마자 순식간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당장 사영을 보러 그의 집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잠깐 얼굴만 보고 올까. 집 앞에서 마주 보고 잘 자라는 인사만이라도 직접 하고 올까. 그런 욕망이 수도 없이 일어났다 사그라지길 반복했다.
영화 개봉 이후, 당연하게도 두 사람 모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개봉 초에는 함께하는 스케줄이 대다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개인 스케줄이 늘어났다.
특히나 사영은 그간 워낙 두문불출했던 터라 어떻게든 모셔 가려는 곳이 많았다.
아무리 몸값이 뛰고 있다고는 하지만 유준보다는 여러모로 덜 부담스러운 편인데다, 또 대중이 요즘 가장 궁금해하는 연예인이었던 탓이다.
그 탓에 유준과 사영은 며칠째 함께 밥을 먹거나 이른바 ‘데이트’를 하기는커녕 시간 맞춰 전화 통화를 하는 것도 힘겨운 실정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유준이 장난기를 버리고 묵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윤사영 씨도 나 보고 싶습니까?”
- …….
“대답 안 하면 보고 싶은 걸로 생각하죠.”
- …네.
한 번 더, 유준의 숨이 멈췄다.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도망갈 구석을 만들어 줬다. 그냥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으면 어련히 알아서 좋을 대로 생각했을 거다.
그런데도 사영은 침묵하는 대신 입을 열었다. 부정하는 게 아니라, 보고 싶었다는 마음을 직접 표현하기 위해 말이다.
결국 더 참지 못한 유준이 소파에서 완전히 일어서며 말했다.
“지금 갈게요.”
- 아….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요. 귀찮게 안 하고 얼굴만 보고 올 테니까.”
- 잠깐. 잠깐만요, 유준 씨.
사영은 유준을 멈춰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유준은 멈추지 않고 차 키를 찾은 뒤 현관으로 향했다. 유준이 막 신발을 신으려던 찰나, 사영이 말을 이었다.
- 얼굴만 보는 걸로는 부족할 거예요.
“…….”
- 그러니까 오늘 말고… 내일 혹시 밤늦게라도 시간 내줄 수 있어요? 할 말도 있고….
얼굴만 보는 걸로는 부족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해석하느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움이 너무 깊어서 그저 얼굴만 보는 걸로는 끝낼 수 없다는 말일까. 나와 더 진하고 깊은 행위를 나누고 싶단 뜻일까. 어울리지 않는 유치한 감정들이 쉼 없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유준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내일 밤, 시간 낼 수 있어요. 그런데 오늘도 잠깐 얼굴만 보면 안 됩니까?”
- 너무 늦었어요. 하루만 참아 봐요.
아이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가 어이가 없으면서도 싫지 않았다. 유준은 손안에서 차 키를 굴리며 고민에 빠졌다.
당장 달려가 사영을 보는 건 문제가 안 되지만 사영은 몇 시간 겨우 눈 붙이고 아침 일찍 또 스케줄을 가야 했다.
타인에 의해 강제로 끊겼던 커리어를 다시 이어 가는 사영에게 도움은 되지 못할망정 그의 컨디션을 망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결국 깊은 한숨과 함께 유준이 대답했다.
“내일은 꼭 나랑 만나는 겁니다.”
- 네. 저랑 만나요.
“혹시라도 문준성한테 연락이 와도 답장하지 말고.”
이쯤 되면 문준성은 그냥 보고 싶다는 표현을 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사영은 웃음을 터트렸다.
- …네. 답장 안 할게요.
순순히 대답하는 목소리에 또다시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윤사영을 아주 작고 작게 만들어서 입에 넣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마음인지 느끼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쩌면 윤사영 때문에 이상성욕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물론 딱히 고치고 싶진 않았다.
몸을 돌려 다시 터덜터덜 거실로 발걸음을 옮기며 유준이 속삭였다.
“그럼… 잘 자요. 오늘 수고했어요.”
- 유준 씨도 고생했어요. 잘 자요.
“내일 봐요.”
- 네. 내일 봐요.
마무리 인사는 지극히 평범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너무나도 특별했다. 끊기 싫어 몇 번이나 비슷한 인사를 반복하다가 겨우 전화를 끊은 유준이 녹초가 된 것처럼 소파로 무너졌다.
내일 무슨 옷을 입고 갈까. 꽃이라도 사는 게 좋지 않을까. 할 말이 있다고 했는데 내가 원하는 말일 가능성은 없겠지.
머릿속을 가득 채운 윤사영에 관한 생각 때문에 쉽게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밤이었지만 그게 나쁘지는 않았다. 좋은 밤이었다.
***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사영의 계획을 들은 유준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영은 섣불리 괜찮다고 말하는 대신 시선을 살짝 내린 채 생각을 정리했다.
“집 앞에서 우종이가 기다릴 거예요.”
“흐음….”
나쁘지 않은 준비였다. 바로 앞에서 우종이 기다린다는 걸 알면서도 허튼짓을 할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유준은 여전히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안전장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위험을 감수하는 건 반갑지 않았다.
“…꼭 해야 하는 일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준이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말 그대로 이 계획이 윤사영에게 꼭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을 위해 지금껏 달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같이 가는 것도 싫을 거고….”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사영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일이고 거기에 자신이 끼어들 틈은 없으리라는 걸 알면서도 유준은 괜히 말했다.
머리로는 모든 걸 이해하면서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 건 마냥 홀가분하지만은 않을, 어쩌면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그 순간을 사영이 혼자 겪는 게 걱정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내가 앞에서 기다리면…!”
“유준 씨.”
어떻게든 그 순간 사영과 가까이 있고 싶어 계속 덧붙이던 유준의 말을 막아선 건 따스한 미소를 머금은 사영의 목소리였다. 다시 입을 꾹 다문 유준을 향해 사영이 말했다.
“끝나면 곧바로 전화할게요.”
“…….”
“힘들었던 게 있다면 유준 씨한테 제일 먼저 말할게요.”
“하….”
유준은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막무가내로 내가 알아서 한다고 밀어냈으면 똑같이 억지를 부렸을 텐데 달래는 것처럼 다정하게 말을 해 오니 더 투정을 부릴 수가 없었다.
“힘들었건 아니건, 무조건 나한테 바로 전화해요.”
“네.”
“우리 집으로 와도 되고.”
“그건… 생각해 볼게요.”
당연히 거절할 거라 여기고 건넨 말에도 사영은 제법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그간 두 사람의 분위기는 대체적으로 봄날의 볕처럼 따스하고 부드러웠지만 오늘 사영은 유달리 애틋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유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사영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마 이번 일이 지나면 저도… 유준 씨에게 미뤄 왔던 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순간 유준의 눈이 쏟아질 것처럼 커졌다. 천하의 김유준이 이토록 경박한 반응을 보일 줄도 아는 남자라는 걸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사영은 다소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는 유준의 표정을 보며 미미한 죄책감을 느꼈다.
사랑을 고백하고 상대의 답을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게 유준이라고 한들 어디 쉬운 일이었을까. 심지어 그 상대가 사랑을 믿지도 않고, 사랑이 필요하지도 않다고 매번 말해 온 사람이라면 말이다.
아무리 유준이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다고, 나에게는 남는 장사라고 말을 했다지만 더 그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한재우와의 관계를 청산하듯, 이제는 유준과의 관계도 정리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