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
어느덧 시간은 빠르게 흘러 감독과 배우들은 질문을 하나씩 남기고 있었다.
정 감독과 유준, 재우가 차례로 질문을 받아 능숙하게 답변을 이어 갔고 진행자는 마지막 차례로 사영에게 말을 건넸다.
“그럼 윤사영 씨에게 질문드릴게요. 극 중 서단우는 강무진과 강무성, 두 사람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진 중요한 인물이었는데요. 서단우라는 인물은 그를 연기한 윤사영 씨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캐릭터였나요?”
서단우. 그 이름이 들리자마자 사영의 눈빛이 조금 변했다. 꼭 물기에 젖은 것처럼 가라앉은 사영의 표정에 보는 이들 역시 덩달아 숨을 죽이고 사영의 답을 기다렸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사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서단우는… 저와는 너무나도 다른 인물이에요.”
어떤 이들은 단순히 묘사된 외형만을 보고 서단우가 윤사영과 닮은 점이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영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서단우는 윤사영과 완벽한 대척점에 있다고 해도 좋을 만큼 다른 인물이었다.
“그는… 저는 용기가 없어 걷지 못한 길을 당당히 걸었던 인물이기도 하죠. 서단우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사랑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으며, 어떤 시련에도 무너지지 않고 꿋꿋이 제 신념을 지켜내는 사람이에요.”
사영은 사랑을 몰랐다. 사랑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세기의 사랑을 하는 척하였으나 실상 사영이 했던 건 그저 자신의 삶을 망가트리는 일뿐이었다.
“저는 서단우처럼 살지 못했어요.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고 싶었던 것들을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 삶을 살았죠.”
사영의 대답이 이어질수록 영화관에는 낯선 침묵이 흘렀다. 유준은 경건해지기까지 한 심정으로 사영을, 그리고 눈앞의 관객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알지 못하는 사영의 삶이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보이진 않아도 관객들의 시선이 사영과 재우를 번갈아 바라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윤사영이란 사람에 대한 호감과 애정이 커지면 커질수록 의심도 함께 크기를 키울 것이다.
윤사영은 정말로 그런 사람이었나. 한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조종하며 상처 입히는 사람이었나. 윤사영은 정말, 한재우의 삶을 망가트렸나. 그랬나.
“포기하지 않는 법을, 다시 일어서는 법을, 사랑하는 사람과 나 자신을 지켜내는 법을… 과거의 저는 해내지 못했던 일들을 서단우를 연기하며 배울 수 있었습니다.”
사영은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한재우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위축되긴커녕 오히려 기묘한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서단우는 제게… 삶을 다시 살 수 있는 용기를 준 존재였습니다.”
사영의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관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유준은 대답을 마치고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영과 시선을 마주치며 응원의 의미로 눈을 찡긋했고 그 순간은 수십 장의 사진으로 남아 온갖 기사를 장식했다.
그렇게 영화 <하지>의 첫 번째 시사회와 무대 인사가 끝났다. 그날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윤사영이었다.
***
하지 이러다 진짜 천만 가는 거 아님??
흥행속도 무엇 ㄷㄷㄷㄷ 개봉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500만이 넘었어?? 미쳐따 도라따 진짜 개쩐다
근데 진짜 존나 잘만들긴 했어 배우들 연기도 미쳤고 연출은 말할 것도 없고...
정명철 저번 영화는 약간 내 취향 아니었는데 하지는 진짜 첨부터 끝까지 걍 갓벽ㅠㅠㅠㅠ
김유준이랑 한재우야 연기 잘하는 건 이미 알고 있었는데 윤사영 진짜 다시 봤따 윤사영 왜 캐스팅하냐고 ㅈㄹ한 과거의 내 뺨을 치고 싶음
요즘 눈만 감으면 서단우 생각나서 죽겠다 진짜ㅠㅠㅠㅠㅠㅠㅠ
└ 강무준이랑 서단우 때매 현생불가능 ㅠㅠㅠㅠㅠㅠ 뒷이야기 더달라 이걸로 만족 못한다ㅠㅠ
└ 윤사영 캐스팅 깠던 게 나일리가
└ 나일리가22222
└ 이 속도면 관객수 기록 세울 수도 있을듯?
└ 근데 한재우 연기 중간중간 좀 거슬리는데 있지 않아? 못했다는 건 아닌데 뭔가 한번씩 현대극연기 할 때가 있음
└└ 마자 나도 느낌 ㅋㅋㅋㅋ 갑자기 현대로 머리채 잡혀나오는 느낌 ㅋㅋㅋㅋㅋㅋ
└└ 또 꼬투리 잡네 사극 첨인데 그정도면 존나 잘했지
└└ 한재우만 첨이냐? 김유준 윤사영도 처음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연애질 하면서 편하게 연기한 애들이랑 한재우랑 같음?
└└ 아 저소리 또 왜 안나오나 했다 네네~ 한재우님은 불쌍한 피해자고 윤사영은 악독한 가해자 가스라이팅의 제왕 대마왕 상종 못할 독종이자 악마입니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ㅎㅈㅇ는 좋겠다 뭔 짓을 해도 ㅇㅅㅇ 핑계댈 수 있어서 ㅋ
***
영화 <하지>가 세우는 기록이 연일 연예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OTT 플랫폼의 범람으로 위축되었던 영화계는 오랜만에 나타난 대흥행작에 한껏 들뜬 모양새였다.
온갖 커뮤니티와 SNS는 온종일 <하지>와 배우들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찼고 스포츠를 즐기듯 흥행 추이를 중계하며 흥분했다.
영화의 흥행 이유를 분석하는 기사들이 계속 쏟아졌다. 그들 중 일부 언론이 ‘하지 신드롬’이란 거창한 단어를 사용한 이후 그 단어는 보편적인 표현이 되었다.
연달아 흥행작을 갱신한 김유준은 물론이고 상대적으로 임팩트가 덜하긴 했지만 첫 사극 영화를 그럴듯하게 소화해 낸 한재우 역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신인 배우 도율은 단숨에 영화계의 신성으로 떠올랐다. 원래 그는 순진하고 귀여운 인상 때문에 배우로서 한계가 있을 거란 평이 많았다.
그런 도율이 이번 영화에서 연기한 완벽한 살수의 모습은 배우로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었고 주연급 시나리오를 받게 된 도율은 연일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정명철 감독이 다시 한번 그 명성을 견고히 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개봉 전부터 해외에서까지 지대한 관심을 받았던 영화는 한국 흥행 소식을 등에 업고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그뿐만 아니라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 준 조연들, 카메오로 출연했던 배우들 역시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인기몰이를 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윤사영만큼 극적인 변화를 얻지는 못했다.
사영이 캐스팅되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 선택은 감독의 실수이며 영화를 망쳐 놓을 거라고 손가락을 놀리던 이들이 앞다투어 이 흥행의 일등 공신은 윤사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를 본 후 사영의 과거 작품을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OTT 플랫폼에서는 다급하게 <윤사영 전(傳)>을 기획하는 등 특수를 노렸다.
이제 윤사영을 검색하면 한재우와 관련된 추문 대신 그의 과거 사진과 영상, 작품에 관한 이야기들이 올라왔다. 나쁜 소문에 묻혀 있던 미담을 끌어올리는 이들도 있었다.
한재우와 연관된 이야기가 아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단순히 루머를 떠들어 대기보다는 루머가 과연 사실인지 따져 보는 이들이 늘었다.
윤사영은 잘못한 게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생겼고 일방적으로 사영을 가해자로 몰고 가던 이들은 점차 힘을 잃었다.
사영의 회사로는 차기작을 선점하려는 감독과 제작사의 연락이 쇄도했다. 광고 출연 제의가 쏟아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몸값은 단숨에 수십 배로 치솟았다.
어딜 가도 윤사영 이야기를 했다. 그의 연기, 외형, 겸손함과 차분함, 굳건함에 사람들은 애정을 느꼈다. 이윽고, 윤사영의 화려한 복귀였다.
***
“후….”
“형, 괜찮아요?”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의 사영에게 우종이 물었다. 우종의 목소리에는 염려 대신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방금 두 사람은 광고 촬영장 앞을 메운 팬들 사이를 지나온 참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사영은 진심으로 놀란 것 같았다. 차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짧은 시간 동안 얼굴을 보고 사랑한다고 말하기 위해 저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들이 손에는 사영의 이름과 응원 문구가 적힌 휴대폰 화면이나 작은 플랜카드 등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개봉한 지 한 달 여가 지났지만 사영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가 개봉 한 달이 채 되기도 전 관객 천만 명을 동원한 것부터가 그랬다.
물론 사영은 자신이 잘해서 영화가 흥행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수많은 이들이 노력한 결과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영 역시 영화를 만들어 낸 이들의 일부였고 그 결과물이 이 정도로 인정받고 사랑받는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꼈다.
혹시라도 자신이 영화에 폐를 끼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을 내도록 가지고 있던 사영에게 이 결과는 더더욱 큰 기쁨이 되었다.
영화뿐만 아니라 사영이 연기한 서단우 캐릭터에 대한 평 역시 좋지 않았던가. 평론가는 물론이고 일반 관객들 역시 서단우 캐릭터를 사랑해 준다는 게 신기하고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사영의 마음을 들뜨게 만든 건 높아진 인기나 몸값보다도 사영을 기다려 주었던 팬들의 인정이었다.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에 벅차올라 남몰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기다리고 기대한 보람이 있었다고, 오랜 공백이 무색하게 사영의 연기가 너무 좋았다고 말해 주는 팬들의 감상은 그 무엇보다 사영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
사영은 잠시 말없이 고개를 돌려 여전히 자리를 뜨지 않고 기다리는 팬들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예정된 일정만 없으면 당장 나가서 한 명 한 명 손을 잡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형, 우선은 들어가요.”
“어? 어어, 그래….”
그런 사영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는 우종이 그를 달래듯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예정된 촬영을 마치는 게 우선이니 말이다.
군말 없이 우종이 이끄는 대로 걸으면서도 자꾸만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바라보는 사영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이번 생에서는 저들을 실망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허무하게 포기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마지막 단 한 명의 팬이 남을 때까지 제게 허락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좋은 연기를 해낼 생각이었다.
팬 서비스를 위해 처음으로 만든 SNS에 오늘 밤에는 꼭 사진과 인사를 남겨야지, 하는 다짐을 하며 사영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촬영장으로 향했다. 행복한 나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