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오늘 감독과 배우들은 먼저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관람하고 그 후에 무대 인사를 할 계획이었다. 다시 말해 사영은 이미 ‘서단우’를 만난 관객들과 인사를 나누게 될 거라는 말이었다.
윤사영의 서단우를 본 관객들이 그를 사랑하지 않는 일은 불가능했다. 유준은 그걸 알았다.
사영은 잠시 말없이 유준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밤새 마음에 차곡차곡 쌓였던 두려움이 유준이 전해 준 확신으로 인해 서서히 밀려났다.
제대로 해내지 못했으면 어쩌나, 기다렸던 분들이 실망하면 어쩌나, 내가 아니었다면 더 좋은 작품이 되었을 영화가 나 때문에 실패작이 되면 어쩌나.
사영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의심이 서서히 희망으로 바뀌었다. 관객들의 반응이, 감상이, 그들의 눈빛과 표정들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어느새 유준의 목소리만큼이나 단단해진 눈동자를 한 사영이 대답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럴 거예요. 그럼 나 메이크업 마무리만 좀 하고 다시 올게요. 따뜻한 것 좀 마시면서 쉬고 있어요.”
“네….”
얌전히 대답한 사영은 대기실 문 앞까지라도 유준을 배웅하기 위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유준은 그런 사영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다시 의자에 앉혔다.
“뭘 일어나요. 금방 다시 올 건데.”
“그래도….”
유준은 말을 덧붙이려던 사영에게 살랑살랑 손사래를 치더니 이내 저만치 물러나 있던 우종을 불러 말을 건넸다.
우종에게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 보니 죄다 사영을 위한 당부의 말뿐이었다.
이제는 하다 하다 물을 잘 챙겨 주라는 말까지 하는 유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사영은 그와 자신이 보낸 지난 몇 개월간을 되돌아보았다.
유준의 적극적인 허락하에 사영은 지금껏 이 우습지도 않은 가짜 연애를 마음껏 즐기는 중이었다. 정말 이기적이게도 말이다.
유준의 애정 표현을 받으며, 필요할 땐 유준에게 의지하고, 그가 퍼부어 주는 관심과 사랑 속에 사영은 차근차근 제 상처를 돌볼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어 유준을 지치게 만들겠다는 핑계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사영은 혹시나 유준이 이런 자신에게 정말로 질리고 지치게 되면 어쩌나 때때로 신경이 곤두서곤 했다.
밤이면 이제라도 유준이 윤사영이라는 인간의 민낯을 제대로 깨닫고 포기해 주길 바라다가도 다음날이 되면 변함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봐 주는 유준에게 안심했다. 그런 날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유준은 여전히 온 마음을 다해 사영을 사랑하고 있었다. 오히려 유준은 날이 갈수록 사영을 더욱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따 봐요.”
구구절절 우종에게 말을 덧붙이던 유준이 이제야 정말로 대기실을 나서며 사영에게 손을 흔들었다. 사영은 반사적으로 그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 정도라면 유준을 믿어 봐도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김유준이 말하는 사랑은 다를 수도 있지 않으냐며 말이다.
김유준이라면 설령 어느 날 사랑이 끝나더라도 지나간 시간을 웃으며 추억할 수 있을 만큼 따뜻한 이별을 선사해 줄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한다면 끝이 나는 그 순간까지 이토록 따스하고 열렬한 애정을 독식한대도 그다지 나쁜 일만은 아니리라.
“머리 좀 다시 정리할게요.”
그때, 사영의 개인 스타일리스트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사영은 점점 깊어지던 상념을 얼른 거두고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코앞에 닥친 시사회이고 무대 인사였다. 다른 생각에 정신을 팔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미 완성된 영화에는 당장 사영이 손쓸 수 있는 게 없다지만 무대 인사에서 좋은 인상을 남기는 건 영화를 위해 지금 사영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사영은 스타일리스트에게 머리를 맡긴 채 거울에 바친 제 모습을 바라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입술을 달싹이며 속으로 ‘안녕하세요, 배우 윤사영입니다.’라는 말을 읊조렸다.
지난밤 잠도 자지 않고 거울 앞에서 수십 번, 수백 번 연습한 한 마디였다.
배우 윤사영.
이렇게 자기 자신을 소개하게 되기까지 너무 많은 날을 돌아왔다.
‘안녕하세요. 서단우를 연기한, 배우 윤사영입니다.’
‘안녕하세요. 서단우 역을 맡은, 배우 윤사영입니다.’
기껏해야 몇 음절만이 다를 뿐인 문장을 두고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 모른다.
아주 사소한 차이라도 좋았다. 조금이라도 더 잘 보이고 싶었다. 단 한 톨의 실수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귀한 시간을 내어 저희 영화를 보러 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만약 이것이 꿈이라면. 죽기 전 길고 긴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거라면 부디 오랫동안 바라 왔던 이 순간만큼은 즐기고 깨어나길 바라며.
사영은 혹시라도 어딘가 실수로 부딪혀 깨 버리지 않기 위해 애쓰며 결정적 순간을 기다렸다.
배우 윤사영이 마침내 대중 앞에 다시 서게 된 순간이었다.
***
사영은 어두운 극장에 앉아 거대한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기적을 눈에 담았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때때로 숨 쉬는 걸 잊을 정도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용도,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연출이나 다른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영은 오로지 그 안에서 움직이는 ‘서단우’에게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서단우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들릴 때마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그 순간을 어떻게 연기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다가도 눈을 한번 깜빡이고 나면 그 대사를 뱉을 때 느낀 모든 감정이 생생하게 떠오르기를 반복했다.
아무것도 아닌 장면에서도 눈물이 났다. 정말로 연기를 다시 시작했다는 사실이, 그 결과물이 드디어 세상에 공개되었다는 사실이 이제야 실감이 들고 전율이 일었다.
무릎 위에서 꽉 움켜쥔 손이 연신 덜덜 떨렸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쳤다.
다시 연기를 시작하고, 영화를 찍어 완성된 결과물을 바로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급기야 숨이 막히고 앞이 어지러워진 사영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을 때. 그런 사영의 손을 잡아 주는 따스한 온기가 있었다. 유준이었다.
사영은 그 손이 마치 자신을 구원해 줄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꽉 잡았다. 떨리는 손도, 심장도 그대로였지만 유준과 손을 맞잡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호흡이 한결 편해졌다.
그 모진 고통을 겪었으면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은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차고도 넘친다. 그중 죽음 후 두 번째 기회를 얻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냔 말이다.
이 자리에 함께 있는 한재우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얻은 기회를 두 번 다시,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뿐이었다.
유준이 사영에게로 슬쩍 몸을 기울인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중이었지만 누군가는 배우들을 주시하고 있을 텐데 유준은 여전히 그런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영의 귓가에 거의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온 유준이 속삭였다.
“사영 씨밖에 안 보이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사영과 유준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똑바로 부딪혔다.
그저 사영을 위로해 주기 위한 말이라고 여겼는데 유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을 담은 것처럼 보였다.
사영은 다시 고개를 돌려 스크린을 보았다. 고문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꼿꼿한 서단우가 그곳에 있었다.
사영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간 많은 이들이 몇 번이나 말해 주었지만 사영 스스로는 단 한순간도 가진 적이 없던 확신이 몰아쳤다.
배우 윤사영의 복귀는 성공이었다.
***
영화 상영이 끝난 후 세 배우는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와 함께 무대 위로 올라갔다.
진행자가 차례대로 하는 소개를 들으며 사영은 제 이름이 불릴 때 잠시 어색한 적막이 흐르는 상상을 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관객들은 사영의 이름이 불릴 때 더 열렬히 환호했다. 그 탓에 다음 순서로 불린 한재우에게 쏟아진 호응이 상대적으로 작게 느껴졌을 정도였다.
조명 때문에 관객석이 선명하게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그 앞에 앉은 사영은 제게 쏟아지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사영은 격렬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들이 과연 영화를 어떻게 봤을지 궁금했고, 자신의 연기를 어떻게 느꼈는지 궁금했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진행자가 되어 관객들에게 질문을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 명 한 명 따로 자리를 마련해 자세한 감상을 듣고 싶었다.
낯선 의욕이 물밀듯 밀려와 몸에 열이 올랐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사영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어렸고, 사영은 몰랐지만 그 얼굴은 관객들에게 강렬한 자극을 주었다.
감독이 진행자와 가장 가까운 쪽에 앉았고, 세 배우의 자리는 윤사영, 김유준, 한재우 순서였다.
사영과 재우의 관계를 생각해 두 사람을 일부러 떨어트려 앉힌 건데 사영이 진행자와 더 가까운 쪽에 앉고 재우가 먼 쪽에 앉게 된 건 의외였다.
그 때문에 무대 인사가 진행되기 전 한재우와 주최 측 사이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는 걸 사영은 몰랐다.
주최 측에서는 한재우의 눈치도 아예 보지 않을 순 없었는데 유준이 나서서 그들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준 덕분이라는 것 역시 사영은 모르는 일이었다.
언제 숨도 제대로 못 쉴 만큼 긴장했냐는 듯 조금 시간이 흐르자 사영은 아주 자연스럽게 적응했다.
남들 앞에서는 늘 굳어 있기만 했던 표정이 편안하게 풀리고 유준이 흘리는 농담에 눈꼬리를 가득 접어 웃기도 했다.
옆에서 한재우의 목소리가 들려도 얼어붙지 않았다. 오히려 재우가 답변할 때면 고개를 들어 그의 말을 경청하기까지 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무대 인사는 내내 사영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이 자리에서 가장 인기 많은 배우인 유준조차 말을 시작하고 끝맺을 때마다 사영을 쳐다보며 시선을 나누었다.
유준처럼 친근한 모습을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재우 역시 행사가 진행되는 내내 사영을 신경 쓰고 있음을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시사회를 찾은 기자들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