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후….”
결국 유준은 시무룩한 얼굴로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겠다고. 기다릴 수 있다고. 이런 가짜 애인 행세조차 나는 좋기만 하다고 호언장담을 해놓은 판에 이제 와 사영을 닦달할 수는 없었다.
“갑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집에 도착해서 연락할게요.”
“…네.”
위안이 되는 건 별 용무가 없어도 연락하겠다는 자신의 말을 사영이 자연스럽게 받아 준다는 점이었다.
의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정말이지 더더욱 기가 막힌 ‘밀당’이 아닐 수 없었다.
“…유준 씨.”
그렇게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등을 돌려 현관으로 가려는 유준의 발걸음을 잡은 건 낮게 가라앉은 사영의 목소리였다. 유준은 다시 몸을 돌려 사영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왜 불러요.”
“…궁금한 게 있어요.”
“네.”
운을 띄워놓고도 사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짧은 시간 동안 너무 극적인 감정들을 겪어서인지 정신이 멍한 기분이었다.
유준이 이렇게까지 절절하게 자신을 사랑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호기심이나 흥미에서 아주 조금 더 나아간 감정일 거라고 여겼다.
시간이 지나면 잦아지겠거니, 조금 더 나를 잘 알게 되면 가라앉겠거니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 유준이 보여 준 행동은 그런 사영의 기대를 보란 듯이 배반했다. 김유준은 너무나도 간절했다. 단순한 호감 정도로 오늘 유준이 보여 준 감정을 절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사영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만약에 내가….”
“…네.”
“만약 내가 아주 오랫동안…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거예요?”
유준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기분이 상해서가 아니고 그 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던 탓이다. 사영이 계속 말했다.
“내가 이대로 유준 씨와 가짜 연애를 이어 가고,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김유준 씨에게 안겨 울고… 그렇게 모든 걸 다 의지하면서도 결코 유준 씨의 마음을 받아 주지 않으면요.”
“…….”
“제대로 거절하지도 않고 애매한 가능성을 인질로 잡은 채 계속… 계속 김유준 씨의 진심을 이용하면. 그러겠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당신이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메마르고 망가져 포기할 때까지 오로지 내가 원하는 것만 이기적으로 취하면서 당신을 기다리게 한다면. 그런다면. 사영은 바로 그런 것을 묻고 있었다.
사영은 사랑 따위의 감정으로 이 관계를 닫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유준을 잃고 싶지도 않았다. 이래서야 한재우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 자조할 수 있을 정도로 계산적인 욕심이었다.
유준은 말이 없었다. 사영은 숨을 죽이고 그의 판결을 기다렸다. 차라리 이쯤에서 그가 자신에게 실망해 돌아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사영은 곧 자신을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거짓말이다. 이제는 유준이 떠나가는 걸 결코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을 거라는 걸 사영은 알고 있었다.
몇 번이나 서로의 숨결이 적막 속에 얽히고, 이윽고 유준이 입을 뗐다.
“내가….”
“…….”
“음… 내가 손해날 게 있나?”
“…네?”
사영은 너무 놀라 그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여 되물었다. 유준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가짜든 뭐든 공개까지 된 이상 연애는 나랑만 할 거고, ‘진짜’ 연인들이 흔히 하는 것들도 모두 다 나랑 할 거고.”
“그렇지만…!”
“날 거절하지 않았으니 나는 내가 원하는 만큼 계속 윤사영 씨 옆에 붙어 있다가 내가 마음 정리가 되면 복잡하게 헤어지고 뭐하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윤사영 씨랑 끝낼 수 있다는 건데….”
이어진 유준의 말에 뭐라 반박하려던 사영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유준의 마음이 끝나면 언제든 편하게 끝낼 수 있다니.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장 유준이 떠나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준은 예의 그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오히려 내게 너무 남는 장사 아니에요? 거절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그건… 저는….”
“물론 나는 시간 좀 끈다고 윤사영 씨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지만.”
얄미울 정도로 당당했다. 조금 전 울면서 미안하다고 하지 않아도 될 사과를 늘어놨던 남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사영이 아픈 것만 아니면. 사영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만 아니면 유준은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이 사영의 마음을 또다시 일렁이게 만들었다.
유준이 한 걸음, 사영의 앞으로 다가왔다. 흔한 연인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허리에 손을 감고 다른 손으론 사영의 뺨을 쓰다듬었다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겨주었다.
“그러니까 어디 한번 계속 시간 끌어봐요. 계속 고민해요.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기다려 줄 테니까.”
“도대체 유준 씨는….”
“그때가 되면 윤사영 씨 성격에 나를 불쌍하게 여겨주기라도 하겠지.”
말을 뱉으며 유준은 기분 좋은 실소를 터트렸다. 이보다 더 완벽한 관계의 역전이 있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상대의 동정과 연민에 호소하고 있는 사람은 사영이 아닌 유준이 되어 있었다.
“그럼 진짜 갑니다.”
유준은 제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는 사영의 이마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춘 뒤 몸을 물렸다.
이대로 여기서 자고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랬다간 밤새 끓어오르는 욕구를 어쩌지 못해 한숨도 자지 못할 게 뻔했다.
“사랑해요. 알겠지만, 나는 진심입니다.”
간지러운 고백을 한 번 더 토해 내며 유준은 몸을 돌렸다.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기다리겠다 장담했다고 해서 그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흔들리는 사영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분명 나날이 진해지고 있었다.
유준은 머지않아 사영의 사랑을 온전히 얻어 내고 말 것이다.
***
“흐음….”
재우는 테이블에 올려 둔 휴대폰을 노려보듯 바라보며 몇 번째인지 모를 침음을 흘렸다. 재우의 머릿속에서는 조금 전 사영과 나눈 통화 내용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사영은 재우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지난번 재우가 김유준에게 얼굴을 얻어맞으면서까지 토해 냈던 고백에 대한 답변이었다.
당신에게 받은 상처가 너무 크다고. 이제 와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그 모든 걸 없던 일로 하고 돌아가기엔 내가 당해온 날들이 짧지 않았다고. 그러니까 나에게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그렇게 말하는 사영의 목소리는 다 죽어 가는 사람처럼 연약하게 흔들렸다. 우는 것 같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재우는 실망했다. 자신이 지난날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랑을 고백하면 윤사영은 분명 버선발로 달려와 자신을 받아 줄 거라는 자신감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한참 만에 직접 자신을 만나러 온 것도 아니고 전화를 해 한다는 말이 생각해 보겠다니. 윤사영이 한재우를 두고 저울질을 해보겠다니.
재우는 여전히 그들 관계에서 자신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그 고백 한 번에 좋다고 달려왔다면 그것대로 찝찝했을 일이긴 했다.
그간 그토록 매몰차게 한재우를 거부하고 기어코 김유준과 대단한 연애까지 시작해놓고 말 한마디에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다니.
그건 결국 재우가 처음 예상한 대로 지금까지 윤사영이 보인 모든 행동이 자신을 속이기 위한 거짓이었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았다.
천하의 한재우가 윤사영에게 보란 듯이 놀아난 꼴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 우스운 꼴은 사양이었다.
사영이 부탁한 내용은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그건 바로 영화가 개봉할 때까지는 더 이상 자신들의 관계로 인한 소란이 없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사영은 이번 영화가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했다. 그는 간절하게 다시 연기하길 원했고 그러기 위해선 <하지>의 성공이 꼭 필요했다.
안 그래도 캐스팅 단계서부터 자신 때문에 말이 많았는데 여기서 더 영화에 민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다는 말이었다.
그 또한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어렵게 쫓아낸 사영이 다시 복귀한다는 건 여전히 내키지 않았지만 기호지세였다.
딱히 효과도 보지 못할 텐데 괜히 억지를 부려 사영과 멀어지느니 차라리 그를 도와 응어리진 마음을 푸는 게 목적을 이루기 위해 더 나은 선택이었다.
결국 재우는 네 말대로 다 해 주마, 하고 통화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간절한 척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가 목말라했을 고백을 몇 번이나 더 해 주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사랑해, 사영아.’
다시 그 말을 뱉었을 때 휴대폰 너머로 느껴지던 숨결의 흔들림을 떠올리며 재우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사영이 아직 제게 미련이 남아 있다는 걸 확인하자 숨을 옥죄어오던 초조함이 사라지고 여유가 돌아왔다.
그와 재결합하는 건 분명 재우의 평판을 깎는 일이 되겠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다. 재우는 윤사영을 다시 제 발아래 두기 위해 그 정도 희생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시 손에 쥐게 된다면 조금 더 상냥하게 대해 줄 생각이었다. 그가 다시 도망치지 않도록 애정을 줄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에야말로 영영 제게 발이 묶이도록 만들고야 말 거였다.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줄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재우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어느새 밝아져 있었다. 만약 영화가 개봉한 뒤에도 윤사영이 저를 선택하지 않고 망설인다면 그때 본때를 보여 줘도 늦지 않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재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벼운 발걸음으로 침실로 향했다.
다음날 재우는 회사를 통해 제 상처는 김유준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공식적으로 밝혔고 ‘김유준 폭행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