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55화 (155/193)

#155

“왜… 왜 유준 씨가 사과를 해요….”

사영의 목소리가 마찬가지로 덜덜 떨렸다. 이미 흉터가 되어 버렸다고 생각했던 상처들이 다시 벌어지는 기분이었다.

사영은 깨달았다. 제가 입었던 상처는 사실 한 번도 아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저 아문 척 덮었을 뿐 언제나 피를 흘리고 있었음을.

“도대체 왜 유준 씨가….”

“사영 씨가 혼자 이런 걸 겪어서는 안 됐는데… 내가… 내가 알았어야 했는데….”

“…….”

“미안해. 미안해요. 윤사영 씨를 내도록 혼자 두어서. 이제야… 이렇게 늦게야 알아서….”

누구도 사영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한재우도, 뒤에서 비겁하게 그를 돕던 인사들도, 사영에게 죽으라며 악플을 쏟아 내던 그 많은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죽는 날까지 사영에게 진심으로 사과한 이가 없었다.

그런데 김유준이. 제게 사과해야 할 이유가 없는 그 사람이 이토록 진심으로 사영에게 사과를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대충 덮어 두었던 상처가 터지고 피고름이 흘러나왔다. 사영은 제가 이제야 정말로 치유될 준비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눈앞의 이 남자로 인해 사영의 상처는 비로소 정말 아물어 흉터로 남을 기회가 생겼다.

“유준 씨….”

사영의 손이 처절함에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유준의 주먹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손끝을 타고 죄책감으로 물든 유준의 감정이 적나라하게 전해졌다.

김유준의 사랑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이 남자가 얼마나 절박하게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사영이 말을 이었다.

“이리 와요.”

예상치 못한 말에 유준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사영을 쳐다보았다. 눈을 한번 깜빡이고 나서야 선명해진 시야로 사영의 얼굴이 보였다. 사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리 와서 나를 안아 주고, 이제부터 나를 지켜 주겠다고… 그렇게 약속해 줘요.”

유준은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사영에게 다가갔다. 제 손을 잡아준 사영의 손에 혹시라도 떨어질까 유준은 움직이는 와중에도 그의 손을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윤사영을 굴복시키고 싶었던 날이 있었다. 부탁하는 주제에 담담하게 구는 게 짜증 나고 화가 나서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빌라고 요구한 적도 있다.

언제 그런 날이 있었냐는 듯 지금은 너무나도 아득해진 기억이었다.

이 순간 유준은 진심으로 그의 앞에 굴종하고 싶었다. 무릎을 꿇고 자신을 사랑해 달라 애원하고 싶었다. 눈물로 발을 적셔 죄를 청하고 사영에게 용서받는 것으로 구원을 얻고 싶었다.

이것이 과연 사랑일까. 사랑이라는 감정이 이렇게까지 절대적이어도 되는 걸까. 이것은 차라리 신앙이라 하는 것이 옳은 거 아닐까.

사영에게 다가가는 유준의 감정이 이리저리 날뛰었다. 사랑은 본래 이토록 지독한 존재라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감정이 무엇으로 정의되든 간에 유준은 멈추거나 도망칠 생각이 없다는 거였다.

어느새 사영의 앞에 다가간 유준이 손에 힘을 주어 사영을 일어나게 했다. 그리고 그가 명령한 대로 마른 몸을 품에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눈물로 젖은 뺨을 사영의 머리카락에 부비고 그의 눈가와 뺨에 입을 맞췄다. 그것은 애정 표현이라기보단 차라리 경배에 가까웠다.

“이제부터는 내가 지켜 줄 겁니다.”

유준이 말했다. 어느새 울먹임이 사라진 단단한 음성이었다. 사영은 유준의 품에 고개를 파묻고 두 팔로 그의 허리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같은 실수는 절대로 반복하지 않아.”

유준은 이미 윤사영을 한 번 잃었다. 지금의 유준이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게 없던 일이 되진 않았다.

거만한 태도로 어쭙잖은 충고나 했을 다른 시간 선의 김유준은 훗날 분명히 후회했을 거라고 유준은 확신했다. 그 멍청한 짓을 반복할 순 없었다.

“약속해요.”

“…네. 그거면 됐어요. 그러니까 이제 내게 미안해하지 말아요.”

사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하게 들렸지만 유준은 제 품이 젖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는 이제 정말로… 괜찮아요.”

이윽고, 서로의 구원이었다.

***

두 사람은 그 후로도 한참이 지나서야 제대로 된 상의를 할 수 있었다.

첫 번째로 서로 감정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고, 두 번째로 감정이 진정되고 나서는 민망한 마음에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 만에 감정을 어느 정도 갈무리한 두 사람은 다시 녹음본을 앞에 두고 앉아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언제 사영의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냐는 듯 표정을 지운 유준이 짐짓 냉철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영화가 개봉할 때까지 더 큰 소란은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는 나도 동의를 하긴 하는데….”

“네….”

“그때까지 한재우가 과연 얌전히 있겠습니까?”

지금만 봐도 유준의 폭행설을 누구보다 잘 이용해 먹고 있는 한재우다. 그런 사람이 더 꼬투리 잡지 않고 남은 기간 동안 가만히 있어 줄 거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난번 사영을 찾아와 개짓거리한 것만 봐도 지금 한재우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유준은 그를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게 불안했다.

“가만히 있게 만들어봐야죠.”

하지만 사영은 준비한 바가 있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유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뭔진 몰라도 사영이 내세울 계획이 자신에게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영이 한재우와 엮이는 일이라면 무슨 대단한 계획이든 전부 반대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루빨리 한재우를 진창에 처박아 다시는 사영 앞에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게 뭐든 윤사영 씨 스스로를 위험하게 만드는 계획이라면 반대입니다.”

“…….”

사영은 잠시 말을 멈췄다. 사과도, 지금의 이 반응도 전부 사영은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었다.

한번 말랑해진 마음이 다시 한번 일렁였다. 사영은 또다시 주책맞게 눈물을 쏟지 않기 위해 애쓰며 겨우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조심할게요.”

“좋아요. 그것만 지켜 주면 뭐든 나는 윤사영 씨 뜻대로 할 겁니다.”

“네….”

얌전히 대답하는 사영의 모습에 유준이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태연하게 굴고 있지만 발갛게 물들어있는 뺨은 감추지 못하는 사영이 귀여워 속이 탔다.

“영화 빨리 개봉했으면 좋겠다. 그렇죠?”

식탁에 턱을 괴고 사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유준이 물었다. 갑자기 튀어버린 주제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 주제가 사영에게 워낙에 중요한 사안이다 보니 금세 주의를 빼앗겼다.

사영이 두 손을 모은 채 꼼지락거리며 대답했다.

“빨리 개봉했으면 싶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솔직히 진짜 내가 영화를 찍었나 실감이 안 날 때도 많아요.”

“좀 더 신나서 기다려도 될 것 같은데. 영화 개봉하면 진짜로 윤사영 씨 세상 될 테니까요.”

“제 세상이요?”

“온 세상이 전부 윤사영 씨 얘기를 하고, 윤사영 씨를 사랑하게 될 테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사영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듣는 사람이 없는 걸 알면서도 괜히 민망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유준은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한다는 듯 당당했다.

“누차 말했잖아요. 이번 영화는 잘 될 거고, 이 영화로 가장 큰 사랑을 받을 사람은 윤사영 씨가 될 거라고.”

“유준 씨가 주인공이잖아요.”

“주인공보다 더 사랑받는 캐릭터 본 적 없어요?”

“정말… 괜히 비행기 태우지 말아요.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요. 그냥… 믿고 기대해 주신 분들이 실망만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윤사영 씨도 참 자기 객관화가 안 되네요.”

타박하는 문장을 뱉은 것치곤 무척이나 장난스럽고 즐거운 목소리로 유준이 대꾸했다.

“뭐, 그래서 나중에 더 즐겁긴 하겠지만.”

이어진 유준의 말까지도 사영으로서는 전부 이해할 수 없는 말투성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의기양양한 표정인 유준의 표정에 괜히 마음이 더 들뜬 사영이 서둘러 말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다시 얘기에 집중해요.”

“알았어요.”

이제는 스스럼없이 자신에게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사영의 태도까지도 빠짐없이 전부 다 즐겁기만 한 유준의 속마음을 사영이 알 길은 없었다.

***

“나 진짜 갑니까?”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유준은 순진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리며 묻는 사영의 얼굴을 멍하니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모르고 그러는 건지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건지.

요즘 사영은 도통 예전 같지 않아서 종종 유준을 놀리기도 하는 통에 진의를 가리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그래서 싫으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건 아니었지만 오늘 같은 날은 조금 괘씸한 것도 사실이다.

“나 그냥 가도 안 아쉽습니까?”

키스도 하고, 서로 끌어안고 엉엉 울기도 했다. 유준은 조금이라도 더 사영과 함께 있고 싶어서 애가 타고 갈증 나 미치겠는데 사영은 이대로 헤어져도 전혀 아쉽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든 이 관계에 진심이 되지 않으려 애쓰는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이럴 때면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피곤할 텐데 어서 가서 쉬어요.”

그러나 사영은 여지를 주지 않고 대답했다. 유준은 말없이 사영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럴 거면 마찬가지로 아쉬운 감정이 아른거리는 눈동자나 어떻게 하지. 감출 거면 정말로 완벽하게 감춰 유준이 아주 작은 희망조차 가질 수 없게 만들 것이지.

말로는 유준을 밀어내면서도 사영의 눈동자는 늘 감추기 힘든 애정을, 흔들림을 보여 주니 유준으로서는 더 애간장이 녹을 수밖에 없었다.

유준이 윤사영이라는 사람을 아주 조금만 더 몰랐더라도 이게 전부 자신을 더 깊이 옭아매려는 그의 계략인 건 아닐까 의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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