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고마워요.”
유준이 놓아주는 커피 잔을 두 손으로 받으며 대답하는 사영의 눈동자가 여전히 불안하게 떨렸다. 사영은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키스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어졌다. 유준이 먼저 시작했지만 혀를 섞고 숨결을 나누는 과정에서 사영이 먼저 애가 닳아 입술을 겹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만족스러운 희열 앞에서 도대체 왜 갑자기 유준이 키스를 해왔는지, 그런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도 않게 되어 버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간신히 서로에게서 멀어진 두 사람은 미묘한 어색함 속에 밥을 먹었다. 사영은 연신 음식이 정말 맛있다고 말해오는 유준의 칭찬에도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시선을 들라치면 사랑에 빠진 남자의 집요한 눈빛이 노골적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서 사영은 식사하는 내내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했다.
그 모습이 우스운지 유준이 풋, 하고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화가 나거나 수치스럽진 않았다. 그 웃음에서조차 애정이 느껴진 탓이다.
밥을 다 먹고 나서는 더욱 어색한 상황이 이어졌다. 유준은 사영이 혼자 요리하느라 고생했으니 나머지는 전부 제게 맡기라며 사영을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게 했다.
요리를 못 한다기에 다른 집안일에도 능숙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유준은 익숙하게 식탁 위를 치우고 식기세척기를 돌리고 세척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식기는 손수 설거지를 해놓기까지 했다.
하기야 유준도 혼자 살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그게 당연한 일인데 그가 가진 분위기 때문인지 그 능숙함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설거지를 하면서 싱크대에 튄 물까지 완벽하게 닦아 낸 유준은 커피도 자신이 타겠다며 여전히 사영을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결국 사영은 식탁 앞에 앉아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유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제는 그가 타준 커피를 손에 쥐고 있었다.
먹는 것조차 해 주지도 않을 사람을 기다리며 혼자 요리를 하고, 정성 들여 준비한 요리를 제 손으로 전부 쓰레기통에 버리고 치우던 삶은 이제 정말 없었다.
지금 사영의 삶을 채우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다시 없을 보물처럼 자신을 귀하게 대하는 김유준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밖에서 먹을 걸 그랬어요….”
이제야 사영의 앞에 앉는 유준을 보고 사영이 멋쩍은 표정을 말했다.
어차피 밥 먹으면서 진지한 대화는 하나도 나누지 못했는데 밖에서 적당히 먹고 집으로 들어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됐을 일이다. 사영은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들떠 있었던 모양이라고. 사실 다른 건 다 핑계고, 유준을 위해 직접 뭐라도 해 주고 싶었던 모양이라고. 사영은 차마 유준에게는 할 수 없는 말을 속으로 가만히 곱씹었다.
먼저 커피를 크게 한 모금 마신 유준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대답했다.
“둘이 오붓하게 먹으니까 좋은데요, 왜. 대신 다음에는 요리도 내가 할게요.”
“그럼 안 되죠….”
“안 될 건 또 뭐가 있어요? 아, 그냥 다음에는 우리 집으로 초대해야겠다.”
“…요리 못하신다면서요.”
남의 집에 와서 여태 뒷정리와 설거지까지 해놓고 다음에는 요리까지 하겠다는 남자가 정말로 어이가 없어서 사영은 부러 새침하게 말했다. 유준은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 대답했다.
“여태 관심이 없어서 안 한 거지, 마음만 먹으면 금방 잘할 겁니다.”
사영은 할 말을 잃었다. 다른 사람이 했으면 우스운 허세에 지나지 않을 말도 김유준이 하면 그럴듯하게 들렸다.
유명한 셰프처럼 능숙하게 요리하는 유준의 모습이 본 것처럼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건 그렇고.”
점점 더 깊어지는 사영의 상상을 멈춘 건 다소 장난스러웠던 지금까지의 목소리와는 조금 결이 달라진 유준의 음성이었다.
진중하지만 결코 차갑진 않은 표정을 한 유준이 사영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상의할 일이 뭡니까?”
“아….”
“뭐길래 밖에서는 얘기하기 어려웠던 거예요?”
유준의 질문에 사소한 상상들로 들떴던 사영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진짜 중요한 시간은 지금부터였다.
“잠시만요.”
사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가져왔다. 순간적으로 눈에 띄게 가라앉은 사영의 감정을 느낀 유준 역시 말없이 사영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식탁 위에 휴대폰을 내려놓은 사영이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영화 촬영이 시작된 후… 한재우는 저와 단둘이 있을 때면 전처럼 폭언을 퍼붓곤 했어요.”
순간 유준에게서 사나운 기세가 일어났다. 사영조차도 순간적으로 움찔했을 정도였다.
딱히 표정에 변화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가 스스로 감추기 힘들 정도로 화가 났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한재우의 폭언을 공개하는 건 타인에게 제 치부를 드러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심지어 그 말에는 유준을 향한 폄훼의 말들이 섞여 있었다.
그걸 유준 앞에서 고스란히 내보여야 하는 사영은 지금 유준이 보여 주는 살기에 가까운 분노가 마치 자신을 향한 응원인 것 같아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그걸… 몰래 녹음해놨거든요.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아…!”
그와 동시에 유준이 탄성을 터트렸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잠시 놀란 듯 보였던 유준의 얼굴이 이내 다른 감정으로 일렁였다.
그는 마치 사영을 대견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영이 말을 이었다.
“당장에 쓸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미리 유준 씨랑 의논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오늘… 그걸 상의하고 싶었어요.”
“…그랬군요.”
“일단… 녹음본 들려드릴게요.”
그와 동시에 휴대폰 액정을 터치하는 사영의 손끝이 떨렸다. 그리고 재생 버튼을 누르기 직전, 사영의 시선이 다시 유준에게로 향했다.
유준은 잠시 입술을 깨물며 숨을 골랐다. 그는 조금 초조해 보이기도, 불안해 보이기도 했다. 사영이 그 기저에 깔린 염려의 감정을 읽어 내는 사이 유준이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말했다.
“네. 우선 들어보죠.”
사영의 손끝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
사영이 재우에게 학대에 가까운 폭언을 들어왔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사영의 입을 통해 그 말을 전해 들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날것의 악의를 직접 듣는 순간, 유준은 기실 제가 사영이 겪은 고통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심장이 아팠다. 비유가 아니었다. 가슴을 뚫고 들어온 칼날이 제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내면 딱 지금처럼 아플 것 같았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서 한재우가 혀로 뱉는 폭행을 묵묵히 받아 냈을 윤사영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방금 유준이 들었던 녹음은 오히려 나았다. 그때는 적어도 사영이 복수를 꿈꾸고 있었고 사영의 곁에는 그의 말을 믿고 도와주는 김유준 자신이 있기라도 했다.
하지만 유준은 단순히 제가 들은 몇 개의 음성이 전부가 아님을 알았다. 이건 빙산의 일각조차 되지 못했다.
차가운 아스팔트에서 홀로 죽어 갔던 한 사람을 빼고는 이 세상에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악랄한 말들이 애써 담담한 얼굴을 한 채 앉아 있는 사영의 기억 속에 빼곡히 존재할 것이다.
아무런 힘도 없고, 믿어 주는 이도 없이, 심지어 제게 칼을 꽂아대는 사람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윤사영이 홀로 견뎌야 했던 그 말들이.
“내가….”
음성 재생이 끝난 지 한참 만에 유준은 입을 열었다. 마치 무언가가 목구멍을 헤집어놓은 듯 거친 목소리였다.
유준은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헐떡였다. 생전 느낀 적 없는 살기가 전신을 가득 채웠다. 유준은 진심으로 한재우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이것 역시 비유가 아니었다.
“윤사영 씨… 내가….”
유준의 두 주먹이 눈에 보일 정도로 덜덜 떨렸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생채기를 냈다.
그러나 더 큰 고통에 휩싸여있는 유준에게 그것은 사소한 아픔조차 되지 못했다.
“저는 괜찮아요….”
그런 유준을 위로한 건 사영이었다. 괜찮다고 말하는 사영의 목소리는 아주 미미한 떨림만 있었을 뿐 깊은 서러움이나 분노를 담고 있지 않았다.
유준이 대신 아파해 줘서. 손을 뻗으면 만질 수도 있을 만큼 선명한 감정으로 유준이 화를 내줘서. 그래서 사영은 담담하게 지난 상처를 내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영의 말은 위로가 되긴커녕 오히려 유준의 마음을 더 쓰라리게 만들었다.
이 지독한 일을 괜찮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견뎌야 했을 괜찮지 않은 날들이 유준의 숨을 틀어막았다.
결국 유준의 눈에서 흘러나온 눈물 한 방울이 툭, 하고 식탁 위로 떨어졌다. 당황한 사영이 ‘유준 씨…!’하고 그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유준의 입이 열렸다.
“내가 미안해요….”
“유준 씨, 그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왜 유준 씨가 사과를….”
“이런 일들을 혼자… 혼자 겪게 해서… 내가 지켜 주지 못해서….”
“…….”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사영아.”
사영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오늘 유준을 기다리면서 사영은 그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몇 번이나 상상했었다. 화를 내줄 거라고 생각했다. 사영은 하지 못했던 거친 욕을 해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 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지만 어쩌면 음침하게 녹음이나 해놓은 자신을 소름 끼치게 여길 수도 있을 거라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했다.
삶은 늘 사영의 기대를 배반하는 쪽으로 흘러갔으니 이번이라고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한편으로는 잘했다고 칭찬해 줄 걸 기대했고, 한편으로는 그가 이런 식의 공격을 내키지 않아 할지도 모른다고 미리 마음의 방벽을 세웠다.
하지만 그 많은 예상 속의 어떠한 김유준도 윤사영에게 울며 사과를 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