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별것도 아닌 질문 하나로도 유준은 기뻐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사영의 가슴을 또 한 번 간지럽게 했다. 짧은 정적 후 유준이 대답했다.
- 당연히 있죠. 왜요?
유준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기대하는 바가 분명 있으면서도 내심 아닌 척을 하는 음성이 잔망스럽기가 그지없었다. 억지로 내리누르는 입가가 자꾸만 씰룩거렸다.
흠, 하고 괜히 헛기침을 작게 뱉은 사영이 말을 이었다.
“상의드릴 것도 있고 해서 같이 저녁 먹었으면 하는데 혹시… 저녁때 집으로 오실 수 있을까요?”
민감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다 보니 밖에서 보는 건 아무래도 위험 부담이 있을 것 같아 집으로 오라고 한 건데 막상 말을 뱉고 나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사영은 괜히 말을 덧붙였다.
“아니면 제가… 유준 씨 집으로 가도 되고….”
그것도 딴에는 늘 유준만 왔다 갔다 하는 게 미안해서 한 말인데 오히려 분위기만 더 어색해졌다.
사영은 애꿎은 입술만 깨물며 유준의 대답을 기다렸다. 또 한 번의 적막 끝에 유준이 대답했다.
- 7시까지 갈게요.
“…네. 기다릴게요.”
이어진 대화는 별다른 내용도 아니었건만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사영은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사영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나서야 제 얼굴에 열이 오른 걸 알아챘다. 심장도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사랑에 상처를 입었다고 하여 사랑을 모르는 건 아니다. 지금 사영은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사람의 모습 그대로였고 사영 역시 그걸 알고 있었다.
사랑의 유통 기한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좋을 거라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유준이 자신을 언제까지 지금처럼 사랑해 줄 수 있을지 알 수 있다면 적어도 그것이 상실의 아픔을 견딜 만한 기간인지 예상해보기라도 할 텐데 말이다.
“이제는 하다 하다….”
정말로 별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그게 어떻게든 유준의 마음을 거부하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이유를 찾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숨을 깊이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난 사영이 ‘아…!’ 하고 탄성을 흘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유준에게 저녁을 먹으러 집으로 오라고 했으니 그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건 제 몫이란 생각이 그제야 든 탓이었다.
사영은 서둘러 주방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최근에는 그래도 집에서 종종 밥을 챙겨 먹어서 전처럼 냉장고가 텅 비어있진 않았지만 손님을 대접할 만한 재료가 있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을 위해 요리를 하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재우는 사영과 식탁에 같이 앉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냉장고 문을 닫은 사영은 다시 휴대폰을 쥐고 이것저것 레시피를 검색해 보기 시작했다. 7시까지는 아직 시간이 꽤 남았는데도 괜히 마음이 조급했다.
그러다 사영은 문득 멍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조용한 집을 가만히 훑어보았다. 아무도 없던, 그 누구도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제 삶에 정말로 타인이 아주 깊이 들어왔다는 게 실감 났다.
그건 낯설고, 어색하고, 조금은 부담스럽기까지 한 일이었지만 싫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한 번 더 짧은 한숨을 내쉰 사영은 습관적으로 밀려들려는 복잡한 상념들을 정리했다. 일단은 제가 직접 초대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게 우선이었다.
***
“이게 무슨….”
유준은 사영의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당황스러움에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집안에 가득한 음식 냄새가 너무 낯설어 말문이 막혔다.
눈앞에 어색한 얼굴로 서 있는 사영이 아니었다면 집을 잘못 찾아온 거 아닐까 의심했을 정도였다. 윤사영의 집과 음식 냄새라니, 이토록 어색한 조합은 더 없을 것 같았다.
“무슨, 뭐, 요리했어요?”
멍청이처럼 더듬어 한 질문에 사영이 민망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네. 아무래도… 밖에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아서….”
“…….”
“집에서 제대로 요리를 해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 맛이 괜찮을지는 모르겠어요.”
그 대답을 듣고서야 유준은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유추할 수 있었다.
저녁 시간에 만나기로 했으니 식사를 하긴 해야 하는데, 할 말이 밖에서 나누기엔 민감한 내용이라 직접 요리를 했다는 말이다.
당연히 밖에서 식사할 줄 알았던 유준으로서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황스러운 감정이 조금 지나고 나자 그 자리를 먼저 채우는 건 걱정이었다.
한 걸음 사영에게 불쑥 다가선 유준은 재빨리 그의 손을 붙들고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빠져나가려 하는 사영의 손을 더 힘주어 잡고 유준이 말했다.
“그럼 밖에서 먹고 이야기는 집으로 와서 하면 되지 혼자서 왜 이렇게까지 고생을 해….”
“아….”
“다치진 않았고?”
유준은 사영의 손을 연신 만지작거리며 섬세한 시선으로 보고 또 보았다. 오랜만에 한 요리라고 했으니 날카로운 칼끝에 베이기라도 했을지 모를 일이다.
마음에 미묘한 자책감이 피어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가서 먹자고 정확하게 계획을 잡아놓을걸. 아니면 일찍 와서 요리하는 걸 돕기라도 할걸.
혼자 식사를 준비한다고 고생했을 사영을 떠올리자 괜히 애가 탔다. 이게 이럴 일인가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유준의 눈꼬리가 시무룩하게 기울어졌다.
사영은 당황한 채로 눈을 깜빡거리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유준의 말처럼 해도 됐는데 거기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괜히 혼자 유난을 피운 것 같아 민망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 와중에 제 손에 상처가 났을까 살피는 유준의 시선과 손길이 너무나도 다정하고 따스해 마음이 간지러웠다. 유준이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나 오면 같이 준비하지. 혼자 힘들게 뭘 요리를 하고 그럽니까.”
“…요리 잘하세요?”
“아니요.”
어색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가볍게 질문한 사영에게 유준이 뻔뻔한 얼굴로 대꾸했다. 사영이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쳐다보자 유준이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이제부터 요리를 제대로 배워놔야겠단 생각이 드네요. 사영 씨 혼자 고생 안 시키려면.”
“굳이 그럴 필요는….”
“사영 씨가 고생해서 해 주는 밥 축낼 생각 없습니다. 나 그런 남자 아니거든요.”
그런 남자, 라는 어감이 웃겨서 사영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밥 한 끼 대접하는 걸로 뭘 이렇게까지 말하나 싶다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다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오늘은 제가 했으니까… 우선 먹을까요.”
“그래요. 맛있는 냄새 맡으니까 되게 배고프네. 손 씻고 올게요.”
유준은 그제야 사영의 여태 잡고 있던 사영의 손을 놓아주고 욕실로 향했다.
몇 번 와봤다고 이제 사영의 집이 제집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느꼈던 거북함 같은 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올 때마다 조금씩 늘어있는 가구나 사소한 인테리어 소품들을 보는 것도 유준의 즐거움 중 하나였다. 사영의 집은 이제 정말 ‘사람이 사는 집’ 같았다.
손을 씻는 유준에게서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사영이 혼자 준비하게 한 건 여전히 마음이 쓰였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사영의 개인적인 공간에 제대로 발을 들인 것 같아 마음이 들떴다.
자꾸만 치켜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릴 생각도 하지 않고 욕실 밖으로 나온 유준은 주방에 있는 사영의 모습을 보고 또다시 움직임을 멈춘 채 멍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이미 다 준비된 음식으로 식탁 위에 올려 두는 사영을 보았을 뿐이다. 단지 그뿐인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애틋해서, 그립고 어여뻐서 속이 탔다. 당장 다가가 품에 가득 안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사랑한다고, 평생 당신의 행복을 위해 살고 싶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유준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몇 번이나 심호흡을 내뱉었다. 부담스럽게 하지 말자.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천천히 내게 스며들도록 기다리자. 수도 없이 했던 다짐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그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부담이라도 지워 주고 싶었다. 사영의 앞에 무릎을 꿇고 빌고 싶었다. 내가 지금껏 당신을 도와줬으니 나한테 보답이라도 하라고 생떼를 쓰고 싶었다.
어느 날 나를 동정이라도 해 달라고 윤사영이 빌었듯, 이제는 유준이 그의 앞에서 동정과 연민에 호소하고픈 심정이었다.
“유준 씨, 준비 다 됐…!”
“윤사영 씨.”
애써 심호흡한 보람도 없이 유준은 어느덧 끓어오르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사영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사영이 무어라 하는 말을 막고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기며 허리를 감싸 안았다.
‘유준 씨…?’ 하고 놀란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영에게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며 유준이 말했다.
“키스합니다.”
“네?”
“셋 셀 테니 싫으면 말해요.”
“아니, 갑자기 무, 무슨…!”
“하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사영의 눈동자가 하릴없이 떨렸다. 손을 씻고 온다던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대관절 알 수가 없었다.
“둘.”
그 사이에도 유준은 낮은 목소리로 숫자를 셌다. 음절에 불과한 그 짧은 단어가 이렇게까지 뜨겁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기한 건, 원한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틈을 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영은 그를 밀어낼 수 있는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셋.”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그랬다는 핑계는 제법 그럴듯했다. 그래서 사영은 싫다고, 하지 말라고 말하는 대신 그저 얼어붙은 사람처럼 눈을 감았다.
곧, 입술을 가르고 화염처럼 뜨거운 살덩이가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