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마치 크게 동요한 것처럼 그를 붙들고 울부짖듯 소리친 건 일종의 연기였다. 그와 자신을 모두 비웃었기에 사영은 그 짧은 순간에도 냉철하게 판단을 내리고 행동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고백 이후에 벌어졌던 한재우의 강압적인 입맞춤까지 아무렇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심지어 그 모습을 유준에게 들켰을 때는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라도 유준이 그 모습을 보고 오해하거나 실망해서 돌아선다면 차라리 잘된 일일 텐데. 그래서 사영으로서는 피하고만 싶은 사랑을 거두어들인다면 더 나았을 텐데.
그런데도 사영은 그 순간 유준이 상황을 오해하거나 실망할까 봐 두려웠고 그가 다정히 자신을 걱정했을 때 안도했다.
유준을 벗어나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오히려 깊은 늪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아니, 어쩌면 사영은 스스로 늪에 빠져들고 있는지도 몰랐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이는 제 감정을 곱씹으며 사영은 느리게 입을 열었다.
“한재우가….”
“네.”
“한재우가 저를 사랑한다고 말했어요.”
“…….”
“너를 아프게 했던 날을 후회한다고. 그러니까… 다시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유준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뻔뻔하고 악질적인 행동에 헛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화가 나는 것과는 별개로 유준은 한재우의 고백이 별로 놀랍지 않았다. 한재우가 사영과 제 관계에 지나치게 반응할 때부터 유준은 이런 날을 어느 정도는 예상해왔다.
중요한 건 한재우의 때 지난 고백 따위가 아니라 사영의 마음이었다. 유준이 물었다.
“그래서… 사영 씨는 어땠습니까?”
이제 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다 버리지 못한 불안감이 크기를 키웠다. 사영이 다시 한재우에게 흔들리기라도 한다면 냉정하게 대처할 자신이 없었다.
유준의 초조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는 믿지 않아요.”
“아….”
“이도 저도 뜻대로 되지 않으니 그냥 저를 흔들고 싶었던 거겠죠, 그 사람은. 한재우의 사랑은… 제가 그토록 갈구했던 거니까.”
말 그대로였다. 사영은 한재우가 말한 사랑이 진실한 감정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한재우의 사랑은 승부욕이나 정복욕, 사영을 망가트리고 싶은 파괴욕 등과 별반 다르지 않은 감정이었다.
그는 그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윤사영이 한재우를 극복하는 게 너무 싫어서 키우던 개한테 먹이를 던져 주듯 제 사랑을 던지고 사영이 그걸 물고 다시 진창으로 내려오길 바라는 것뿐이다.
그래서 사영은 한재우의 눈물 앞에서도 그 어느 때보다 더 차가워질 수 있었다.
“설령 그 고백이 진심이라고 해도….”
그 순간, 애매하게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사영의 눈동자가 유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순간 유준의 심장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강하게 조여들었다.
“이제는 알겠어요.”
“뭐… 무얼….”
“한재우의 사랑 같은 거… 이제 제게는 무의미하다는 걸요.”
그 순간 유준은 저조차 몰랐던, 제 안에 숨죽여 도사리고 있던 간절한 바람을 깨달았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바라고 또 바라왔다.
한재우의 진심 어린 사랑조차 윤사영에게 무의미하게 되길. 단 한 톨의 모래만큼의 가치도 가지지 못하길.
자신을 아프고 비참하게 만든 남자에게 되돌아가는 결말의 가능성을 영영 세상에서 지워 버릴 수 있길. 유준은 너무나도 간절하게 바라고 있었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삭이려 애쓰는 유준 앞에서 사영은 어느새 미소까지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한재우는 아마… 내가 자기 고백에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할 거예요. 내가… 그렇게 연기했거든요.”
“연기를 했다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한재우 앞에서?”
“네. 아직도 그의 말에 흔들리는 내 자신이 싫은 것처럼. 유준 씨에게 너무나도 죄스러워 차마 그 마음을 인정할 수 없는 것처럼.”
유준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재우가 고백해올 거라고 예상한 것도 아닌데 그 앞에서 목적을 가지고 연기까지 했다니.
사영이 한재우를 완전히 극복했음을 그보다 더 완벽하게 증명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한재우는 앞으로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잘못된 선택을 하겠죠.”
굳이 사영이 그의 앞에서 연기까지 한 건 일종의 승부수였다. 그를 옭아맬 덫이었다.
사영이 제게 마음이 있다고 착각한 재우는 조금 더 자신만만해질 거고 그 오만함이 결국 한재우를 더 비참하게 만들 거라 사영은 확신했다.
“어쩌면 저는… 이제야 정말로 한재우에게 복수할 준비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사영의 그 말은 너무나도 많은 감정을 내포하고 있었다.
두 번째 삶을 얻은 뒤로 사영은 줄곧 복수를 위해 달려왔지만 한순간도 진정으로 준비가 되어 있던 적은 없었다. 이제 사영은 그걸 알았다.
말을 마친 사영은 다시 한번 깊은숨을 내쉬며 아직 미세하게 떨리는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아무리 상황을 이용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고백과 그 이후에 벌어진 상황에 놀란 것까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순간 사영은 제 어깨를 감싸 끌어당기는 힘을 느꼈다. 눈을 한번 깜빡이고 나니 어느새 사영의 몸은 유준의 품에 안겨있었다.
사영의 입에서 왜, 라는 물음이 맴돌았다. 갑자기 왜 이런 스킨십을 하는 건지 말 그대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사영은 유준의 몸을 밀어내는 대신 얌전히 그 품에 안겨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숨을 고르는 것만으로는 다 털어 내지 못했던 감정들이 유준의 체온으로 인해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유준의 커다란 손이 사영의 등과 허리를 다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유준이 속삭이듯 말했다.
“놀라고 무서웠을 텐데… 정말 고생했어요.”
그 다정한 목소리에 사영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한재우가 강압적으로 자신을 취하는 건 너무나도 익숙한 일이라 딱히 겁먹을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유준의 말을 듣는 순간 사영은 자신이 그 순간 두려움에 떨었다는 걸 깨달았다.
사영은 거듭 괜찮다고, 이런 건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는 대신 유준의 허리를 마주 안았다. 순간적으로 유준의 몸이 긴장하는 게 느껴져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이 남자를 믿어도 될까. 유준이 말하는 사랑을, 정말로 믿어도 괜찮을까.
그가 주는 온기가 너무 좋아서, 따뜻해서, 또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게 또 한 번 제 자신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미련한 짓이 되는 건 아닐까.
결코 미래를 알 수 없는 삶의 기로에서 사영의 마음이 속절없이 흔들렸다. 사영은 어리광을 피우듯 유준의 어깨에 감은 눈가를, 뺨을 문질렀다.
세상 어떤 시련 앞에서도 저를 지켜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강한 품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안겨있고만 싶었다.
더는 외면할 수 없었다. 사영은 분명 유준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외면하는 것도 더는 통하지 않을 일이다.
그런데도 차마 유준에게 제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는 건 이 감정이 미래의 그 무엇도 보장해 줄 수 없는 허망한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유준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해서, 자신이 유준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 사랑이 훗날 서로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냐는 말이다.
이대로 유준에게 솔직한 마음을 전부 다 내보이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과 사랑 때문에 마음을 열고 상대를 제 인생에 끌어들여 내 연약한 부분을 다 내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강하게 충돌했다.
그래서 사영은 하고 싶은 말들을 가까스로 삼킨 후 입을 열었다.
“얼굴에 상처가 났으니… 한재우는 분명 이걸 이용하려고 들 거예요….”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 수도 있는데….”
“시간이 지나고 진실이 드러나면 결국 사람들도 나한테 잘했다고 할 텐데, 뭐.”
유준은 신기한 사람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사영은 제게는 심각하기 그지없는 일들이 전부 정말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가벼운 문제가 되어 버리는 것 같았다.
뒤통수와 목덜미를 연신 쓸어 주는 유준의 손길을 얌전히 받고 있던 사영은 곧 제 귓가에 쪽, 하고 닿아오는 입술을 느꼈다.
가슴이 간질거리고 입술이 씰룩거렸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마음이 들어 심장이 두근거렸다.
혹시나 심장 박동이 유준에게 전해지기라도 할까 봐 사영은 그제야 뻔뻔하게 어리광부리던 걸 멈추고 천천히 유준의 품에서 벗어났다. 사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손은 괜찮아요?”
“손?”
“혹시… 다치지는 않았나 해서요.”
“아….”
사영의 걱정에 유준이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픕니다.”
사영이 얼른 유준이 내민 손을 붙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불거진 뼈가 다소 벌게져 있긴 했으나 상처는 없는 것 같았다.
“다행히 상처는 안 난 것 같은데….”
“그래요? 엄청 아픈데….”
그러더니 사영의 손이 닿을 때마다 ‘아…!’하고 엄살을 피워댔다. 그제야 엄살임을 알아챈 사영이 허망한 얼굴로 유준을 쳐다보았다. 유준은 뻔뻔하게 웃었다.
“왜요?”
“…정말 유준 씨랑 있으면, 세상에 무서울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요.”
“당연하지. 나랑 있는데 뭐가 무서워요?”
사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이가 없어서가 아니라, 유준의 말이 정말로 맞는 말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와 있으면 겁날 게 없을 것 같았다. 그와 함께라면 사영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사랑이라는 감정도 괜찮지 않을까, 유준이 말한 것처럼 사랑에 빠지고도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그토록 지독했던 지난 삶의 망령들이 어떻게 이토록 단시간에 제게서 멀어질 수가 있는 건지 도무지 믿기질 않았다.
사영은 하루가 다르게 허물어져 가는 감정의 벽을 느끼며 유준의 손을 놓지 않고 꼭 쥐었다. 조금 전 허리를 끌어안았을 때처럼 유준이 긴장했다.
세상 모든 일에 자신만만한 이 남자를 이렇게 긴장하게 만드는 존재가 자신이라는 사실이 묘한 희열을 불러일으켰다.
“…촬영은 잘했어요?”
사영은 유준을 보며 느끼는 제 모든 감정들을 속으로 진득하게 만끽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유준은 곧 능숙하게 마주 손깍지를 껴오며 대답했다.
“오늘 나한테 사영 씨 안부를 묻는 사람이 있었던 거 알아요?”
긴장과 두려움이 몰아쳤던 공간이 금세 일상적인 언어들로 가득 찼다. 윤사영의 일상은 더 이상 한재우가 무너트릴 수 없을 만큼 단단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