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순간적으로 눈앞에 붉게 물들었다. 무슨 판단을 내릴 새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감당하기 힘든 분노가 이성을 전부 잡아먹었다. 욕설을 내뱉을 여유조차 없었다.
한재우가 일방적으로, 억지로 사영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은 굳이 두 사람의 몸짓을 자세히 볼 필요도 없이 확신할 수 있었다.
사영은 유준이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우종에게 앞뒤 설명도 없이 메시지 하나만 급하게 남긴 걸 보면 한재우의 방문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는 뜻이다.
윤사영에게 남아 있는 한재우를 향한 감정이 정확하게 어떤 건지 지금의 유준은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설령 미련이 남아 있다고 한들 유준이 오기로 한 상황에서 그와 스킨십을 나눌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얼굴을 부여잡고 바닥에 볼품없이 쓰러진 재우를 내려다보는 유준의 얼굴엔 살기라고 불러도 좋을 감정이 어려있었다.
“일어나 이 새끼야.”
“유, 유준 씨….”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사영이 정신을 차린 건 유준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였다.
그의 음성은 아주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얼핏 들으면 크게 화가 난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사영은 그 음성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감정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전신에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사영의 눈동자에 재우의 멱살을 잡고 일으키는 유준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주먹을 꽉 쥐는 그의 다른 손도.
“유준 씨, 그만…!”
사영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두 다리에 겨우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켜 유준에게 다가가 가까스로 그가 한 번 더 주먹을 휘두르기 전에 붙들 수 있었다.
“놔.”
유준이 차갑게 내뱉었다. 사영은 고개를 마구 저었다.
“이제 됐어요. 이제 괜찮아요.”
“놔요, 윤사영 씨. 내가 해결할게요.”
한 음절 음절을 꾹꾹 눌러 뱉은 유준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사영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지금 유준이 느끼는 분노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다가와 사영은 자신을 옥죄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영은 그대로 유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유준 씨. 괜찮아요. 그냥… 그냥 더는 저 사람을 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새카맣게 짙어졌던 유준의 눈동자에 조금이나마 빛이 돌아온 건 그 순간이었다. 등과 허리에 닿아오는 사영의 떨림이 유준의 이성을 붙들었다.
사영은 겁을 먹고 있었다. 한재우가 한 짓도 사영을 두렵게 만들었겠지만 그의 성격으로 눈앞에서 이토록 과격한 폭행 장면을 보는 것도 심적인 타격을 입을 게 분명했다.
유준은 숨을 몰아쉬었다. 한재우는 입술이 터진 꼴을 하고서도 비웃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유준을 쳐다보고 있었다. 더 때리려면 때려보라는 태도였다.
“한심한 새끼.”
결국 유준은 몇 번이나 숨을 내쉰 다음에야 간신히 내팽개치듯 재우를 놓아줄 수 있었다. 한재우는 볼품없이 비틀거리다가 간신히 넘어지지 않고 서서 유준이 아닌 사영을 바라보았다.
유준이 그 시선을 막으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꺼져, 이 새끼야. 쓰레기 같은 새끼.”
“사영아. 오늘 내가 한 말을 꼭 잘 생각해 줘.”
한재우는 여전히 마치 김유준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의 말에 유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 대단히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도 나눈 것처럼 구는 태도가 같잖으면서도 거슬렸다.
“기다릴게, 사영아. 연락해.”
“꺼지라고.”
유준이 이번에는 대놓고 재우의 몸을 현관으로 툭툭 밀며 말했다. 재우는 예상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밖으로 내쫓기는 순간까지 재우는 계속 사영을 집요하게 쳐다봤지만 사영은 마지막까지 한 번도 재우를 쳐다보지 않았다.
“한 번만 더 윤사영 앞에 얼쩡거리면 진짜로 너…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해 줄 테니까 그런 줄 알아.”
재우를 현관 밖으로 밀어낸 후 문을 닫기 전 경고를 날린 유준이 그대로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았다.
뒤를 돌아보자 다리가 풀린 건지 바닥으로 쓰러지듯 주저앉는 사영의 모습이 보였다.
“사영 씨!”
놀란 유준이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갔다. 애처롭게 떨리는 몸을 감싸 안고 여기저기 살피며 입을 열었다.
“어디… 어디 다친 곳은 없어요? 저 개씨발새끼가….”
“유준 씨….”
“네. 나 여기 있어요.”
“제가… 제가 원해서… 원해서 한 거 아니에요.”
말을 하면서도 연신 사영의 몸을 살피던 유준의 움직임이 덜컥 멈췄다. 사영의 목소리가 날카로운 화살촉이 되어 심장을 찢고 들어왔다.
“한재우가 갑자기 찾아왔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집요하게 구는지 한 번은 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들어오라고 한 거예요.”
“…….”
“우종이한테 미리… 미리 연락도 했어요. 절대 무모하게 굴려고 한 게 아니라… 이런 상황을 원한 것도 아니고… 유준 씨는 촬영 중이라 연락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서 제가….”
“사영 씨.”
“우종이가 더 빨리 올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제 나름대로는 방비한다고 했는데…”
“잠깐. 잠깐만, 사영아.”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변명처럼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는 사영을 유준은 다시 한번 진정시키듯 다독였다. 불안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는 사영을 향해 유준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지금 나한테 그런 설명을 할 필요는 없어요. 지금 중요한 건 윤사영 씨가 괜찮은지, 그걸 살피는 거예요.”
“아….”
“많이 놀라고 무서웠을 거잖아요. 원해서 한 거 아니라는 거… 그런 거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나한테 해명할 필요 없어요.”
“저는… 저는….”
쉽게 말을 잇지 못하는 사영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유준은 바로 그 반응이 사영이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그의 상태인 걸 알았다.
유준은 그대로 사영의 몸을 가만히 당겨 품에 안았다. 놀라 뻣뻣해졌던 사영의 몸이 금세 힘을 풀고 유준에게 기대왔다. 사영의 두 손이 유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유준은 조급하게 사영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그의 등을 다독였다. 오직 사영의 앞에서만 풀리는 유준의 다정한 페로몬이 한재우의 역겨운 향을 밀어내고 사영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빠르고 불안하게 쏟아지던 사영의 호흡이 유준의 품에서 서서히 안정을 찾았다.
유준은 사영이 숨을 고르게 내쉴 수 있게 된 후에야 안고 있던 몸을 살짝 떨어트리고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이제 좀 괜찮아요?”
“…네.”
“일어날 수 있겠어요?”
이어진 물음에 사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준은 아주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사영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천천히 그를 일으켰다. 사영은 거부하지 않고 유준의 품에 의지한 채 움직였다.
사영을 소파로 이끌어 앉힌 유준은 혹시라도 사영이 다친 곳은 없는지 손목 등 드러난 피부를 꼼꼼히 살폈다.
적어도 눈으로 보이는 상처는 없는 것 같았지만 다행스럽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사영이 말리는 바람에 다 풀지 못한 분노가 여전히 유준의 안에서 휘몰아쳤다.
설령 반죽음이 될 때까지 한재우를 팼다고 해도 유준의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을 테다.
다만 유준은 그런 자신의 분노가 사영에게 느껴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참았다. 안 그래도 놀라고 무서웠을 사영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진 않았다.
대신 유준은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뭔가… 얘기하고 싶어요?”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한재우가 무슨 짓을 한 건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알고 싶었다.
그래도 유준은 참았다. 사영이 스스로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다. 자신이 이토록 참을성이 좋은 사람인 걸 유준도 처음 알았다.
도대체 그 사랑이라는 게 사람을 얼마나 달라지게 하는지. 가진 줄도 몰랐던 낯선 모습을 얼마나 드러나게 하는지 경험하면서도 매번 놀랍기만 했다.
“힘들면 조금 쉬었다가 나중에 얘기해도 돼요.”
살면서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여겼던 사랑에 빠진 멍청이들의 행동을, 지금 유준은 아주 정확하게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우습게도 그런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후….”
배려가 가득한 유준의 태도에 사영은 다시 한번 숨을 깊이 내쉬었다. 갑자기 몰아친 상황에 정신이 없었는데 유준 덕분에 그래도 빨리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유준이 대답을 재촉하지 않을 거란 믿음 아래 사영은 지금의 상황과 제 감정을 가만히 되짚어 보았다.
한재우의 고백은 확실히 그를 잘 안다고 자부했던 사영으로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사랑한다고, 비록 처음엔 다른 이유로 너를 이용했지만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너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오래전의 사영은 한재우가 제게 그렇게 고백해오기를 꿈꾸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사영이 처한 상황은 더더욱 최악으로 치달아갔고 결국엔 그조차 바라지 못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영은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버리지만 않게 해 달라 빌곤 했다.
그런데 이제 와 한재우의 사랑이라니.
‘사랑해. 사랑해, 사영아.’
꿈에서조차 바라지 못했던 고백이, 그 음성이 다시금 떠오르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놀랍게도 그건 만족이나 희열과는 거리가 먼 감정이었다.
오래도록 원했던 바를 성취한 기분도, 마침내 원수를 제 발아래 꿇린 감상도 아니었다.
사영은 그저 허탈했다. 한재우와 윤사영, 두 사람 모두가 한심했다. 그 어떤 희극도 이보다 우습진 않을 것 같았다. 그랬다. 놀랍게도 사영은 한재우의 고백을 조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