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일어나요!”
사영이 다시 소리치며 재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여태 재우 앞에서 담담하기만 하던 사영이 동요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속에서 작은 희망과 함께 희열이 느껴졌다.
그게 무엇이든 사영에게 다시 격한 감정을 끌어냈다는 게 만족스러웠다. 그가 정말로 제게 아무런 미련도 남아 있지 않은 건 아닌 것 같아 마음이 들뜨기까지 했다. 고작 윤사영을 두고 말이다.
“사영아….”
재우는 사영의 뜻대로 몸을 일으키는 대신 버티며 오히려 몸을 더 웅크렸다. 무릎으로 기다시피 다가가 사영의 발목을 붙들고 고개를 숙였다. 바닥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내가… 내가….”
“진짜 왜 이래요!”
“내가 잘못했어….”
그 순간 재우를 일으키려 안간힘을 쓰던 사영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 반응이 재우의 마음에 더 불을 지폈다.
담담함만 아니라면 어떤 반응이라도 좋았다. 자신이 아직 사영에게 감정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한 것 같아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재우는 더욱 애틋하게 사영의 다리를 붙들며 말을 이었다.
“나는… 나는 몰랐어. 내 삶에 네가 꼭 필요한 존재였다는 걸 그때는… 그때는 내가 몰랐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게 너무 당연해서… 내 마음을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던 거야. 그래서 몰랐어.”
준비하지도 않은 말들이 기다렸다는 듯 술술 흘러나왔다. 말을 하면 할수록 재우는 이것이 다만 목표를 위한 연기에 과도하게 몰입한 건지 아니면 정말로 진심으로 우러난 말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윤사영을 되찾고 싶었다. 단순히 김유준과 헤어지게 만들고 그를 다시 외롭고 비참한 진창으로 떨어트리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아니, 지금 재우의 머릿속에는 오히려 그런 의도는 남아 있지 않았다. 재우가 바라는 건 오직 윤사영이 다시 자신을 사랑해 주는 일뿐이었다.
당신만 곁에 있다면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얼굴로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웃어 주길 바랐다.
“네가 너무 그리워….”
“…….”
“네가 없는 집으로 돌아가는 게 싫었어. 그럴 리가 없다고, 내가 너 따위를 사랑할 리가 없다고 계속 부정하고 또 부정했지만 더는 내 마음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사영아….”
“그만…! 그만 말해요!”
사영이 겁에 질린 사람처럼 뒷걸음질 치면서 소리쳤다. 재우는 다시 한번 안심했다.
사랑한다는 고백마저도 그를 흔들 수 없을까 봐, 사영이 제 고백을 듣고도 감정 없는 목소리로 필요 없다고 말할까 봐 얼마나 두려웠는지 모른다.
재우는 이제야 줄곧 애써 외면하고 있던 자신의 감정을 깨달아갔다.
“한 번만 기회를 줘.”
“이제 그만 돌아가요. 더 안 들을래요.”
“내가 네게 잘못했던 것들을 보상할 수 있게 해 줘, 제발. 제발 사영아….”
“필요 없어요! 이제 와… 이제 와 나한테 왜 이래요!”
사영의 목소리가 아프게 허공을 갈랐다. 한번 소리치고 나자 막힌 숨이 트인 것처럼 사영을 소리쳤다.
“나는, 나는 김유준 씨를 사랑한다고… 내가 분명…!”
“사영아….”
“이제는… 이제는 늦었어요. 나는… 나는 유준 씨를….”
사영은 몇 번이나 유준의 이름을 입에 담았지만 한없이 떨리는 그 목소리에서는 어떤 확신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흔들림을 너무도 선명하게 느낀 재우는 천천히 꿇었던 무릎을 세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제게서 몇 걸음 물러서 있던 사영과의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재우의 손이 사영의 손목을 쥐었다.
“이거 놔…!”
사영이 발작적으로 손을 뿌리치며 외쳤지만 재우는 놔주지 않았다. 자그마치 5년 동안 살을 부대끼며 살았다. 윤사영이 자신을 사랑한 건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었다.
고작 몇 달 만에 그 깊고 깊은 감정이 전부 사라졌을 리가 없었다. 이렇게 단시간에 떨쳐버릴 수 있는 감정이었다면 그토록 오랫동안 그 모든 수모를 참을 수 있었을 리가 없었다.
김유준을 입에 담으면서도 제대로 자신을 뿌리치지 못하는 사영의 행동이 바로 그 증거였다.
재우는 손에 힘을 주어 사영을 바짝 끌어당겨 허리를 감싸 안았다. 사영의 두 손이 필사적으로 재우의 가슴을 밀고 어깨를 때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렇게 거부하면서도 주먹 한번 날리지 못하는 사영의 나약함이 한심하고도 사랑스러웠다.
“사영아….”
“놔! 놓으라고!”
“사랑해. 사랑해, 사영아.”
그 순간 두 사람 사이로 흐르던 모든 공기의 흐름이 멈추었다. 시공간이 전부 정지한 것만 같은 적막이 흘렀다.
사영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재우를 밀어내던 움직임도 멈춘 채 멍하니 재우를 쳐다보기만 했다.
한재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따뜻한 사영의 입술이 닿았다.
***
입술이 닿는 순간 사영은 마법에서 풀린 사람처럼 다시 재우를 거부했다. 입을 꾹 다문 채로 열지 않은 채 몸을 떨어트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재우는 한 손으로 사영의 허리를 강하게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가 멀어질 수 없도록 목덜미를 꽉 쥐었다. 가녀린 몸을 결박한 채로 입술 새를 연신 압박했다.
이전의 사영은 제가 가까이 다가가면 순종적으로 눈을 감고 먼저 입을 벌려 자신을 맞이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영의 거부가 싫진 않았다. 오히려 짜릿했다.
속으로 두려워하면서도 억지로 몸을 열던 사영도 자극적이긴 했지만 강하게 자신을 거부하며 몸부림치는 사영을 제압하는 것도 흥분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결국 윤사영은 자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읍…!”
재우는 사영의 몸을 등 뒤의 벽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등이 강하게 벽에 부딪히며 사영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고 재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넣었다.
사영의 몸부림이 한층 더 강해졌다. 그러나 벽과 재우의 몸 사이에 갇힌 사영의 연약한 몸은 제대로 힘을 내지 못했다.
오히려 벗어나려 애쓰는 사이 사영의 허벅지 사이로 재우의 다리가 파고들기까지 했다.
“싫… 흐읏!”
옆으로 돌려 피하는 사영의 입술을 집요하게 따라온 한재우의 혀가 거칠게 사영의 입 안을 유린했다. 언제 절절한 고백을 했냐는 듯 재우의 행위는 과격하기 그지없었다.
“……! 윽!”
그와 동시에 재우는 제 페로몬을 있는 대로 풀어냈다. 강렬한 알파의 향이 순식간에 정복하듯 오메가를 감쌌다.
사영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어 커졌다. 순간적으로 힘이 빠진 몸이 덜덜 떨렸다. 재우의 다리가 사영의 허벅지 안쪽을 노골적으로 문지르며 자극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초인종이 울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얼어있던 사영의 몸이 그 소리에 반응하며 크게 들썩였다.
그와 동시에 사영을 붙든 재우의 손에도 더 힘이 들어갔다. 사영을 벽으로 밀어붙인 몸 역시 비켜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재우는 지금 찾아온 이가 어쩌면 김유준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매니저일 수도 있고 그 밖의 다른 인물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김유준일 가능성이 1%라도 있다면 이건 기회였다.
김유준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마음만 먹으면 윤사영과 입을 맞추고 그의 몸을 열 수 있는 게 누구인지 알려 주고 싶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이 오메가를 완벽하게 소유한 알파가 누구였는지 그가 알길 바랐다. 그깟 몇 달의 시간으로는 윤사영과 내가 함께해온 그 어떤 것도 무너트릴 수 없다고 말이다.
유준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해 이대로 밖에서 발을 구르다 돌아간다면 그것도 좋았다. 김유준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재우는 결코 여기서 윤사영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재우는 오히려 사영의 입 안 깊숙한 곳까지 혀를 밀어 넣었다. 페로몬을 더 강하게 일으켜 오메가의 본능을 자극했다.
<하지> 촬영이 시작된 이후 하루하루 죽어 가는 것만 같던 영혼이 다시금 충만해졌다. 윤사영을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소리도 없이 조용히 다가온 누군가가 강한 힘으로 재우를 사영에게서 거칠게 떼어 냈다.
순식간에 몸이 돌아간 재우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엄청난 힘이 한재우의 얼굴을 후려쳤다.
쓰러진 한재우를 금방이라도 죽일 것처럼 살벌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건 유준이었다.
***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한재우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유준의 눈동자에 그 모습이 아주 느리게 스쳤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열 때문에 귓가가 멍멍했다. 곁에서 사영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크게 상관은 없었다. 지금 유준에게 중요한 건 눈앞의 쓰레기를 죽여 버리는 일뿐이었다.
촬영을 마친 후 사영에게 이제 출발한다는 메시지를 보낸 유준은 사영에게서 아무런 답이 없는 걸 보고 그가 잠든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아침 일찍부터 움직이기도 했고 헤어지기 전 사영의 얼굴에 피로감이 어려있던 걸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이 좋으면 자다 일어난 사영을 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 괜히 마음이 들떴다.
요즘 유준은 사영의 무방비한 모습을 보는 게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일인지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유준은 굳이 사영에게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우종에게 전화가 온 건 유준이 사영의 집 근처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별로 좋은 내용은 아니었다.
우종은 사영이 갑자기 제게 보낸 메시지를 알려 주며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유준은 불안해하는 그에게 내가 집에 거의 다 왔으니 확인해보겠다고 말하며 차의 속도를 높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종에게 사영의 집 비밀번호를 물으면서도 괜한 기우이길 바랐다.
사영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유준은 불안감이 최고조에 다다른 상태로 사영의 집에 도착했다.
유준은 급한 마음에 초인종을 먼저 누른 뒤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 짧은 사이 심장이 얼마나 터질 것처럼 뛰었는지 모른다.
제발 아무 일 없기를. 들어가면 사영이 자다 깬 얼굴로 놀라 자신을 쳐다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마침내 안으로 들어온 유준의 눈에 들어온 건 거실에서 몸을 겹친 채 입을 맞추는 한재우와 윤사영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