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어떤 속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유준과 만난 이후로 사영은 눈에 띄게 안정을 찾아갔다. 한동안 우종을 불안하게 했던 안정제도 더는 먹지 않는 것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본인은 알아채지 못한 것 같지만 유준과 연애를 시작하고 사영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말이나 행동이 특별히 달라진 건 아니지만 늘 사영의 곁에 있는 우종은 표정에서부터 너무나도 선명하게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사영은 전보다 많이 웃었고, 덜 불안해했다.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사람처럼 굴던 이가 자연스럽게 미래를 말했다.
물론 그 모든 게 김유준 단 한 사람으로 인한 변화는 아닐 테지만 사영이 유준을 크게 의지하고 있다는 건 모를 수가 없었다.
우종이 처음 ‘유준 형’이라는 호칭을 썼을 때 사영은 놀랐지만 우종이 유준을 친근하고 믿음직스럽게 여기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운전하며 룸미러로 연신 사영을 힐끔거리는 우종의 입가에는 내내 미소가 어려있었다.
우종이 저를 보며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사영은 홀로 생각에 잠겨있었다.
굳이 우종에게 내색하진 않았으나 요즘 의심스러울 정도로 잠잠한 한재우를 떠올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웃기지도 않은 병원 소동이 끝난 지도 한참인데 그 이후 한재우 쪽에서는 이렇다 할 제스처가 없었다.
그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나온 각종 추측 때문에 욕을 먹긴 했지만 사영과 유준 둘 다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전과 달리 이번에는 사영을 대변해 주는 의견이 많기도 했고 유준이야 당연히 그의 편을 드는 여론이 압도적이었으니 달리 상처받거나 따로 대처를 해야 할 만큼 반향이 크진 않았다.
오히려 사영은 한재우가 내세운 방법치고는 지나치게 얌전하고 소극적인 게 더 의심스러웠다. 오죽했으면 재우가 정말로 ‘아파서’ 입원한 건 아닐까 생각했을 정도였다.
분명 여기서 물러날 사람이 아닌데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길이 없어 답답했다. 그러나 사영은 곧 더 깊이 고민하는 걸 멈췄다.
앞으로의 활동 등 사영에게 있어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 많아 바쁘기도 했고 굳이 한재우를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유준의 조언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이제 사영에게는 무슨 일이 터졌을 때 함께 고민하고 일을 해결해 줄 회사도 있고, 기꺼이 그의 편에 서서 도움을 줄 유준도 있었다.
혼자 대중의 질타를 받아 가며 견뎌야 했던 지난날과는 달랐다. 게다가 한재우가 빼앗아 간 것들을 되찾는 것 역시 복수의 한 가닥이 될 수 있었다.
사영은 그에게 마지막 한 방을 날릴 수 있는 기회를 엿보며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래서 사영은 오늘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한재우를 길게 떠올리는 대신 해야 할 일을 열심히 잘 해내기로 했다.
“화보 촬영은 정말 오랜만이라 긴장된다….”
마지막으로 남은 김밥을 마저 꿀떡 삼킨 사영이 중얼거렸다.
복귀 후 인터뷰를 하면서 기사 사진을 찍거나 촬영장에서 사진을 찍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잡지 화보를 찍는 건 처음이었다.
연기와는 또 다른 매력에 은퇴 전에는 화보 찍는 걸 꽤 좋아했던 기억이 났다.
작품 속 캐릭터는 애초에 사영 본인과는 완전히 다른 타인이지만 이런 화보는 윤사영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걸고 촬영한다.
그런데도 막상 찍은 결과물을 보면 꼭 타인의 얼굴을 엿보는 것 같은 낯섦을 느낄 수가 있어 사영은 화보 촬영을 참 매력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용케도 사영이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우종이 앞에서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잘하실 거예요. 솔직히 형 얼굴 정도면 그냥 멍 때리고 대충 찍어도 작품이 나올걸요?”
사영은 능청스러운 우종의 대답에 당황하거나 부끄러움을 느끼는 대신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또 이상한 소리 하지.”
“틀린 말은 아닌데.”
지지 않고 대꾸하는 우종의 목소리에 미미하게나마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우종이 말을 더했다.
“그리고 유준이 형이랑 같이 찍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지금의 사영에게는 정말로 적절한 말이었다. 유준이 그 자리에서 모든 걸 저와 함께해 줄 거라는 걸 떠올리자마자 거짓말처럼 걱정이 사라지고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그 감정의 변화를 깨닫자마자 사영의 표정이 다소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토록 선명한 감정을 과연 언제까지 모른 척 외면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흔들림 없이 제게로 전해지던 유준의 마음이, 고백이 다시금 선명하게 떠올랐다. 사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람을 아프게 하지 않을 사랑이라는 게 과연 정말로 존재할 수 있을까. 김유준은 정말로, 그가 말한 사랑을 오래도록 제게 줄 수 있을까.
지금은 결코 해답을 알 수 없는 물음을 삼키며 사영은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진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
“나 좀 들어갔다 가면 안 됩니까?”
차를 향해 돌아서려다 말고 유준이 꼭 어리광을 피우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사영의 집 앞이었다.
화보 촬영이 끝나고 함께 식사를 한 뒤 평소처럼 유준이 사영을 바래다주고 가려던 참이었다.
사영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얼른 가세요. 다음 일정 또 있다면서요.”
그러자 유준이 정말로 속이 답답하다는 듯 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그의 뒤로 차를 세워 둔 채 유준을 기다리고 있는 정민의 모습이 보였다.
영화에 집중하고 싶단 이유로 잠시 미뤄 두었던 광고 촬영 등의 스케줄이 밀려있는 유준은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사영 역시 유준처럼 바쁘진 않지만 그래도 서서히 찾는 곳들이 늘어가고 있어 요즘 두 사람은 시간을 맞추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하루가 멀다 하고 유준이 퇴근을 거의 사영의 집으로 하다시피 해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함께 영화를 찍을 때와 비교하면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유준은 요즘 그게 불만이었다.
“일정 취소할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요. 정민 씨 기다리잖아요, 얼른 가요.”
사영은 이제 유준의 투정이 제법 익숙해진 사람처럼 능숙하게 그를 달랬다.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높은 곳에 있는 사람 같았던 때가 분명 있었는데. 사영은 아직도 문득 유준을 이렇게 편하게 대하고 있는 자신이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래. 간다, 가. 아쉬운 건 맨날 나만 그렇지.”
사영이 예측한 대로 당연히 유준도 사영과 함께 있고 싶어서 예정된 스케줄을 취소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만큼 아쉽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마음을 표현한 것뿐이다.
이번에도 전과 다름없이 담담하게 구는 사영의 모습에 유준은 유난하게 서운한 티를 내며 입술을 삐죽였다.
진짜로 서운한 건 당연히 아니고, 그냥 사영과 이렇게 사소하게 장난을 치는 게 좋아서 그런 거였다.
하지만 그 순간, 장난을 그만두고 진지하게 인사를 나누려는 유준에게 사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녀와요.”
“……?”
“가서 촬영 마치고… 그리고 다시 만나면 되잖아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유준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입을 뻐끔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사영이 먼저 만나자느니, 자길 보러 오라느니 하는 말을 한 건 처음이었다.
“다, 다시 와도 됩니까?”
얼마나 당황했는지 유준이 한껏 얼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놀란 건 유준뿐만이 아니었다. 말을 뱉은 사영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깊게 생각하고 뱉은 말이 아니었다. 헤어지는 걸 아쉬워하는 유준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었다.
유준에게 여지를 줘서 좋을 게 없다는 걸 모르지도 않는데 어느 순간부터 유준의 앞에만 있으면 말과 행동이 통제를 벗어나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럼 스케줄 마치고 올 테니까 기다려요. 아마 그렇게 늦진 않을 겁니다.”
“바쁘면 굳이 안 들려도 되….”
“기다려요.”
뱉은 말을 뒤늦게 수습하려던 사영의 의도는 실패했다. 언제 놀랐냐는 듯 뻔뻔한 얼굴로 다가와 살짝 고개를 숙인 유준이 순식간에 사영의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춘 탓이었다.
순간적으로 사고가 멈춘 사영의 눈에 손을 대충 흔들고서는 그대로 몸을 돌려 차에 올라타는 유준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 민망한 얼굴을 한 정민이 차창 너머에서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해왔고 이내 차가 출발했다.
멍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영은 차가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고개를 살짝 숙이며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제 모습이 참 가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둥 말은 그럴듯하게 해놓고 사사건건 유준에게 휘둘리지 않는 순간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사영은 제 행동들을 단순히 유준에게 휘둘린 것이라 명명해도 되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사영은 사실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괜히 유준을 핑계로 삼고 있는지도 몰랐다. 제 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기가 겁이 나서 말이다.
사영은 얼굴에 남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손을 들어 제 이마를 슬쩍 문질렀다. 조금 전 유준의 입술이 닿았던 곳으로부터 온기가 퍼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겨울도 어느새 훌쩍 지나 있었다. 아직 추위가 완전히 가신 건 아니지만 봄이라 칭하는 게 훨씬 더 어울릴 계절이었다.
사영은 그 자리에 서서 쏟아지는 햇살을 가만히 감상하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봄이 오고, 여름이 와도 자신만은 영영 겨울에 남아 있을 거라 여겼던 윤사영의 계절도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