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한동안 잠잠했던 한재우 동정 여론이 다시 요란하게 불타올랐다. 어떤 이들은 함께 일하는 동료 배우를 향한 최소한의 예의와 배려도 없는 김유준의 행실을 지적했다.
그러면 또 다른 쪽에서는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서로 합의하에 제대로 이혼을 마친 상대와 연애한 게 뭐가 문제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막말로 유준은 한재우와 별다른 친분도 없는데 굳이 마음 가는 사람을 억지로 밀어내야 할 이유가 뭐가 있냐는 말이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가장 많은 손가락질을 받게 된 건 사영이었다.
사영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적어 내려가는 추측 속에서 사영은 두 남자를 양손에 쥐고 제멋대로 휘두르는 희대의 악역이었다.
한재우와 결혼 생활을 유지하던 그때처럼, 사람들은 이미 사영이 가지고 있던 나쁜 이미지를 끌어와 쉽게 그를 매도하고 한재우와 김유준 모두를 피해자로 몰았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전과 달랐다. 전에는 누구도 사영을 위해 큰 목소리를 내주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사영을 변호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자신이 먼저 반해서 거절하는 사영을 계속 쫓아다녔다고 말한 유준의 인터뷰는 무작정 윤사영을 악독한 인물로 몰아가는 사람들을 비판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되었다.
누군가는 우스갯소리처럼 천하의 김유준이 대놓고 어필하는데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냐고 말하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러분들이 모르시는, 혹은 잘못 알고 계시는 부분들이 많아요. 그런 것들을 바로잡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생각입니다.’
같은 인터뷰에서 유준이 의미심장하게 했던 말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이미 사실이라고 믿고 지나왔던 일들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콩깍지가 제대로 씌어 가해자와 피해자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김유준을 성토하는 목소리와 김유준이 저렇게까지 말했을 땐 분명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숨겨진 사실이 있었을 거라고 여기는 목소리가 대립했다.
어차피 대다수 여론 싸움은 누가 사실을 말하고 있느냐보다는 사람들이 누구를 더 믿고 싶어 하느냐가 더 중요한 법이었다. 그런 의미로 한재우는 결코 김유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한재우와 윤사영이 이혼하기 전, 오랜 시간 동안 집요할 정도로 꾸준히 언급되었던 윤사영의 성격에 관한 기사들과 교묘하게 그것들을 묵인하고 오히려 힘을 실어주던 한재우의 반응을 파고들어 물 위로 끌어 올리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일방적으로 욕을 먹으면서도 ‘이기적이고 악독하며 어떻게든 한재우를 괴롭혀 제 옆에 주저앉히려고 한다던 윤사영’은 어째서 단 한 번도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았는지 궁금해했다.
사실은 안 한 게 아니라 할 수가 없었던 건 아니냐고 말이다.
세상은 시끄러운데 정작 이 일에 연관된 당사자들은 말이 없는 조용히 시간이 흘렀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는 말이다.
***
윤사영 절대지켜......
방금 팬카페에 올라온 글 보고 왔는데 미친다 진짜....ㅠㅠㅠㅠㅠㅠㅠㅠ
지도 속이 말이 아닐 텐데 자꾸만 팬분들 속상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만 하는데 억장 무너진다 진짴ㅋㅋㅋㅋㅋㅋ
막말로 정식으로 누가 뭐 문제제기 한 것도 아니고 드러난 사실은 결혼생활 하다가 안 맞아서 합의이혼 한 건데 루머로 몇년째 존나 당당하게 사람패는 거 진짜 질리고 넘 악랄함
제대로 된 증거도 없으면서 맨날 침묵이 곧 증거지 ㅇㅈㄹ하면서 아주..
댓글 개지랄날 거 알지만 넘 빡쳐서 이렇게라도 말 안 하면 못참겠다 진짴ㅋㅋㅋㅋ
영화 촬영 잘해놓고 이 난리라니 진짜 지겹다 지겨워....
└ 진짜 개짜증나 허구헌날 윤사영한테 제발 좀 놔달라 뭐해 달라 하던데 그러면서 맨날 왜 건드냐고!! 진짜 제발제발제발 이제 좀 각자 갈길 갔음 좋겠다 내소원
└└ 평소 행실 똑바로 했으면 언급될 일 없겠지?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누가 보면 뭐 바람이라도 핀줄ㅋㅋㅋ 뭔 행실 시발 조선이야 뭐야 ㅋㅋㅋㅋㅋ
└└ 22222 꼬우면 가서 연애하세요~
└ 아직 영화 개봉도 안했는데 윤사영팬 많이 늘었네 ㅋㅋㅋ
└└ ㅋㅋㅋ 응 마자 많이 늘었어~
└ 나 아직 등업 안되서 댓글을 못쓰는데 미치겠음 ㅠㅠ 우린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건강만 잘 챙겼음 좋겠다 진심 ㅠㅠ
└└ 그나마 슨스같은거 안해서 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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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봐요, 내가 뭐랬어요.”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앉아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유준은 자신만만하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그 옆에는 잔뜩 들뜬 얼굴로 대본 몇 개를 품에 안은 사영이 앉아 있었다.
흥분한 숨을 들썩이며 사영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직 영화 개봉도 안 했는데… 믿기지가 않아요.”
얼마나 흥분한 건지 노상 창백하기만 하던 뺨이 발갛게 물들어있다. 그런 사영의 얼굴을 흐뭇한 표정으로 보는 유준의 입가에는 연신 미소가 머물렀다.
유준은 오늘 사영에게 가겠다는 문자 하나 달랑 보내 놓고 집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적잖이 당황한 모습을 볼 수 있겠거니 하며 왔는데, 막상 도착하니 은근히 반기는 기색이라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 얘길 하고 싶어서 그런 모양이었다.
지금 사영이 보물처럼 애지중지 품에 안고 있는 대본은 어제 우종이 주고 간 것으로 사영 앞으로 온 작품 시나리오들이라고 했다.
아직 그 수가 많지는 않고 기대작들은 아니나 사영의 말마따나 복귀작이 개봉도 하지 않은 상황인 걸 감안하면 좋은 시작이었다.
흐뭇한 표정으로 사영을 보는 유준의 눈에 조심스러운 손길로 대본 겉표지를 쓰다듬는 사영의 모습이 비쳤다.
영화가 개봉하고 나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관심과 사랑을 받을 텐데 아직도 그걸 깨닫지 못한 사영이 가련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영은 벌써 몇 번이나 보고 또 봤던 대본을 다시 열어 보며 흥분한 목소리로 재잘댔다.
“몇 년에 한 편씩이라도 좋으니 작품을 계속할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목소리에서 옅은 물기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우종에게 대본을 받은 뒤 사영은 종일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밤이 새도록 그것들을 읽고 또 읽었다. 작품의 퀄리티를 떠나 하나하나 고맙고 소중하지 않은 이야기가 없었다.
연예계에 복귀한 후 아직 이렇다 할 결과물을 보여 주지 못한 것도 그렇거니와 아직까지도 한재우와 관련된 온갖 추문을 달고 있는 자신에게 뭘 믿고 이런 관심을 주나 싶었다.
그 순간, 따스한 온기가 사영의 뺨에 닿아왔다. 고개를 들자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얼굴을 한 유준이 보였다. 말문이 막힌 사영을 향해 유준이 말했다.
“고맙다고 섣불리 덜컥 선택하지 말고 조금 더 기다려봐요. 앞으로 점점 더 좋은 작품들이 들어올 테니까.”
사영은 유준의 말과 행동 중 어떤 것에 먼저 반응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해 입만 벙긋거렸다. 유준이 손이 이번에는 사영의 눈가를 슬슬 매만졌다. 사영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뭐하긴. 매력 어필 중이지.”
“…….”
“그렇게 눈을 반짝이면서 좋아하니까 너무 예쁘잖아요.”
이어진 유준의 말에 사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칭찬을 받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질겁한 얼굴이었다.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입술에 꾹 힘을 주고 있으려니 사영이 진심으로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그럼 거짓말이겠어요?”
“영화나 드라마 말고 실제로 그런 말 하는 사람 처음 봤어요.”
기껏 예쁘다고 해 줬더니 무슨 신기한 생명체를 보듯 하는 사영의 말에 유준이 허, 하고 기막힌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이런 말 다른 사람한테 하는 건 처음이거든요.”
“아… 원래 잘하시는 거 아니구요?”
“미쳤어요?”
“아니, 너무 자연스럽길래….”
이번에는 유준이 질색하는 얼굴을 하자 사영이 눈동자를 도로록 굴리며 웅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사영은 아무리 연인 사이라고 해도 저런 낯간지러운 말은 절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유준은 처음 하는 거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우니까, 사영의 입장에서는 유준이 원래 연애를 하면 이렇게 살갑게 구는 타입인가보다 하고 생각할 수밖에.
유준은 삐진 사람처럼 입술을 삐죽였다. 정말로 삐진 건 아니고, 사영과 이렇게 사소하게 티격태격하며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게 좋아서 그랬다.
사영에게 유달리 온갖 간지러운 표현을 날리는 이유도 둘 사이가 너무 어색해지거나 무거워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물론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유준은 지금 사영을 짝사랑하는 상황이었다. 사영은 얼마든지 유준을 불편하다 느낄 수 있었고 유준은 그런 상황을 절대로 원하지 않았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한 사영에게 유준이 말을 이었다.
“오해하지 말아요. 정말로 나도… 윤사영 씨가 처음이니까.”
“아….”
“애초에 내가 누구한테 이렇게 애가 닳아서 갖은 표현을 할 필요가 있었을 것 같습니까?”
턱을 치켜들며 당당하게 말하는 유준의 말에 사영이 그도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준과 하룻밤만이라도 만나고 싶어 하는 이가 지금도 줄을 서 있을 텐데 그의 말마따나 유준이 이렇게 낯간지러운 소리까지 할 일이 뭐가 있었겠냐는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한층 더 의아함이 깊어졌다. 지난날이 어떠했든 지금 유준은 사영의 대답을 일방적으로 기다리고 있는 입장이었다.
심지어 사영은 이미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불신을 여러 번 밝힌 바 있고 유준의 마음을 받아 줄 생각이 없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유준은 어떻게 이렇게 흔들림 없이 당당할 수가 있는 걸까.
유준이 가진 커리어와 사람의 감정을 얻는 일은 분명 별개의 영역일 텐데 유준은 어떻게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원하는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걸까.
사영은 수년을 함께 보내고도 끝끝내 한재우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 유준은 어떻게 시간이 제 편이 될 거라고 확신할 수가 있을까.
그런 의문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을 때, 사영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유준 씨.”
“네?”
“유준 씨는 무서운 게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