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집으로 돌아온 사영은 한참 동안 소파에 누워 있다가 겨우 일어나 샤워를 마치고 침대로 올라갔다.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다. 유준의 말대로 몸살이 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몸의 고단이 아니었다. 커다란 베개에 기대앉은 사영의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이 어지럽게 얽혔다.
그중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한 생각은 영화 <하지>에 관한 것들이었다. 촬영장에 서 있는 것조차 적응이 안 되던 때가 있었는데 어느새 촬영이 끝났다.
그 말은 곧, 또 눈 깜짝할 새 개봉이 다가올 거라는 말이었다. 사영은 그 생각만 하면 숨이 턱턱 막히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결코 짧지 않은 공백기를 지나 다시 선보이게 될 자신의 연기가 과연 대중에게 어떻게 보일지 불안하고 두려워 잠이 오지 않았다.
모두가 좋은 말을 해 주었다. 유준이나 우종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장에서 만나는 동료들이나 스태프, 하물며 정명철 감독까지도 너무 잘해 주었다고,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영은 도무지 그들이 말한 것 같은 좋은 결과와 행복한 미래를 그릴 수가 없었다. 자신을 그리워했다고, 기다렸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끝끝내 실망해 돌아서는 상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고작 이런 연기를 보여 주려고 그 난리를 치며 돌아온 거냐는 목소리가 실제 듣기라도 한 것처럼 생생하게 귓가를 맴돌았다.
불안한 마음이 깊어져 다른 쪽으로 생각을 돌리려고 해도 수월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유준의 고백과 한재우의 태도까지 떠오르고 나면 상황은 오히려 더 심각해졌다.
“후….”
정말이지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사영은 피곤한 눈을 감았다. 오늘 마지막으로 본 한재우의 낯선 모습이 자연스럽게 눈앞에 떠올랐다.
분명 무언가 액션을 취할 거라고 생각했다. 한재우는 절대로 그냥 물러설 사람이 아니었다.
재우에게 유준을 사랑한다고 말한 후, 사영은 줄곧 한재우가 어떤 수를 들고나올지 신경 써왔다.
하지만 재우는 내도록 잠잠했다. 촬영장에서는 줄곧 조용했고 사영에게 따로 연락하거나 전처럼 협박하지도 않았다.
사영은 그 침묵이 오히려 불안했다. 절대로 가만히 보고 있을 사람이 아닌데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촬영이 다 끝나가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더니 이제 와 보여 주는 모습이라는 게 그토록 힘없고 초라한 모습이라니.
그가 보여 준 것이 진심일 거라고는 당연히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연기로 사영의 마음을 흔들려고 했던 이전과는 확실히 결이 다른 모습이 거슬리고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진심인 것처럼. 연기로 사영을 대했던 전과는 정말로 달라진 것처럼. 한재우는 과연 무엇을 계획하고 오늘의 그림을 만들어 낸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한층 더 무겁고 찝찝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영화 개봉만 생각해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한재우까지 신경 써야 하니 조금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다 사영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아무리 죽었다 살아났다고 한들, 한 생애 동안 윤사영의 전부였던 한재우가 여기까지 밀려난 것이 신기했고, 재밌었고, 이제야 그를 버릴 수 있게 된 자신이 조금 한심스러웠다.
그때,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었다. 사영은 깜짝 놀라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협탁 위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을 쥐었다. 상대는 김유준이었다.
사영은 반사적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밤이 늦었고 누워 있던 터라 목소리가 가라앉았을까 걱정이 된 탓이다.
다음에는 괜히 머리를 매만지고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그가 자신을 볼 일이 없다는 건 알지만 저도 모르게 몸이 그렇게 움직였다.
영화 개봉이며 한재우며 하는 어지러운 상념들이 순식간에 저 멀리 보이지도 않는 곳으로 밀려났다. 그 자리를 채운 건 가슴을 쿵쿵 울리는 심장 박동이었다.
“여보세요….”
- 아, 내 전화 안 받는 줄 알았네.
유준은 사영이 전화를 받자마자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틈을 두고 받았던 게 또 불만스러웠던 모양이다.
한결같은 유준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조금 전 자조적으로 지었던 미소와는 분명 다른 얼굴이었다. 사영은 다시 편안하게 등을 기대며 말했다.
“잘 들어갔어요?”
- 잘 들어와서 맥주도 한 캔 마시고, 씻고 왔죠.
“아….”
- 사영 씨는?
“네?”
- 윤사영 씨는 뭐하냐고요.
그 물음에 사영은 이질감을 느꼈다. 뭐하냐고 묻는 유준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평범하고 자연스러웠던 탓이다.
사영이 생각할 때 지금 그와 자신은 이렇게 소소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고백을 하고 거의 내쫓기다시피 돌아간 유준이 지금 제게 묻고 싶은 말은 따로 있을 것이다.
“유준 씨.”
사영은 초조한 사람처럼 입술을 깨물다가 말을 꺼냈다.
- 네?
“왜 안 물어봐요?”
- 뭐를?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왜 제 대답을 다시 묻지 않아요?”
그제야 무거운 적막이 흘렀다. 사영은 무릎 위에 덮고 있던 이불을 한 손으로 꼭 쥐었다.
사실은 사영 그 자신도 이 대화를 통해 다다르고 싶은 결말이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유준에게 따져 묻듯 하는 자신이 참으로 뻔뻔했다.
한참 만에 유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 물어보면, 지금 대답해 줄 수 있어요?
이불을 쥔 사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유준이 대답을 재촉하면 대답해 줄 수 있는가. 그의 질문에 대답할 말이 준비되어 있는가. 그건 유준이 아닌 사영이 자신에게 먼저 물었어야 할 말이었다.
- 아니다. 말을 잘못했네. 대답해 줄 수 있냐가 아니라, 내 고백을 받아 줄 수 있냐고 묻는 게 맞는 것 같네요.
“…네?”
- 나는 사실 대답 듣는 게 급하지 않거든요. 어차피 우리 애인 사이인데, 뭐. 그리고… 거절의 말도 들을 생각이 없고요.
유준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사영은 점점 더 영문 모를 얼굴을 했다.
그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전혀 이해되지 않았는데 유준의 목소리는 지극히 자연스러워서 자신이 뭔가 잘못 들은 건가 의심이 들었다. 당황한 사영이 어영부영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 잘….”
- 어차피 상황은 내 편이고, 지금이 아니라도 윤사영 씨는 결국 나를 사랑하게 될 텐데.
“…….”
- 지금 굳이 거절을 들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윤사영 씨는 결국 나를 사랑하게 될 텐데.
그 말이 질기고 단단한 올가미처럼 순식간에 사영의 심장을 옭아맸다. 유준의 말속에서 사영은 마치 김유준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처럼 들렸다.
“무슨, 무슨 말인지 저는 잘….”
사영은 방어적으로 대답했다. 유준은 마치 사영의 반응까지도 이미 예상한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 윤사영 씨가 겁이 나는 건 이해해요. 한재우 그 씨발… 씨발 새끼 때문에 사랑을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거, 당연한 일입니다.
“그….”
- 하지만 분명 세상의 모든 사랑이 배신과 기만으로 끝을 맺는 건 아닐 거거든. 나도… 나도 몰랐어요. 내 세계에 이런 사랑이 있을 줄은.
점점 숨을 제대로 쉬기가 어려웠다. 유준이 말하는 사랑이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지는 사영 역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이 모든 게 한편의 거대한 꿈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안간힘을 써도 사영은 결국 깨어나지 못했고, 꿈같은 현실에서 유준은 멈추지 않고 말했다.
- 내가 말하는 사랑은 다르다는 걸. 윤사영 씨가 나로 인해 겪게 될 사랑은 절대로 사영 씨를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사영은 아프지 않은 사랑을 몰랐다. 그런 건 동화 속 이야기에나 있고 현실에는 없는 것이었다.
- 그걸 내가 증명할 테니까. 지금은 아닌 것 같아도… 그래도 사영 씨.
사영은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유준의 목소리가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분명 엄청난 자신감인데. 여간해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오만함에 가까운 자신만만함이 담긴 말인데.
그런데도 사영의 귀에는 유준이 목소리가 너무나도 연약하고 절박하게 들렸다. 꼭 윤사영의 사랑을 얻지 못하면 죽는 사람처럼 말이다.
김유준이나 되는 사람이 제게 그 정도로 간절할 리가 없는데도.
- 그러니까 사영아. 나한테 한 번만 기회를 줘.
마음을 받아달라는 것도 아니고, 당장 거절하지만 말고 퍼부어 주는 사랑을 잠시만 받아달라는 애원이 생경한 파동으로 사영의 마음에 닿았다.
“나를 조금 더 알게 되면 오늘 한 말을 후회하게 될 거예요.”
- 글쎄, 그건 두고 보면 알겠죠.
사영이 마지막으로 짜낸 방어막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파동을 조금도 막아 낼 수 없었다.
“나중에… 나를 원망하지 말아요.”
결국 흘러나온 사영의 마지막 대답은 곧 유준의 뜻대로 해 주겠다는 허락이나 다름없었다.
***
한재우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기사가 났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이유는 과로였다.
여러 스케줄과 영화 촬영이 겹치면서 전부터 체력적으로 힘들어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버티다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나서야 긴장이 풀려 쓰러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사에서 정말로 알리고자 한 정황은 그게 아니었다. 한 측근의 제보에 따르면 한재우는 영화 <하지>를 촬영하는 내내 엄청난 심적 압박을 느꼈다고 한다.
연기와 상관없는 현장 상황 때문에 촬영장에서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것이 몸에 영향을 준 것 같다고 말이다.
‘연기와 상관없는 현장 상황’이라는 게 뭔지 자세하게 기술한 건 아니지만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다렸다는 듯 뜬 다른 기사에서는 한재우가 쓰러지기 전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사람이 김유준과 윤사영이었다는 추가 정보가 공개되었다.
그 외에 다른 말을 덧붙이진 않았지만 기사 전체에 은은하게 깔린 뉘앙스는 마치 대단한 폭로성 기사라도 되는 양 비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