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자꾸만 웃음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후 사영에게 들은 말이라고는 전부 다 부정적인 말들뿐인데도 자꾸만 희망이 차올랐다.
쓰러지는 사영을 보고 놀라 차에서 내려 달려온 우종이 유준의 얼굴을 의심스럽게 힐끔거렸다. 유준은 서둘러 표정을 정리한 후 사영을 다독이며 작게 입을 열었다.
“일단은 그런 복잡한 생각은 하지 말고 가서 쉬어요. 걸을 수 있겠어요? 많이 안 좋으면 병원에 가고.”
난데없이 이상한 소리를 했는데도 당황한 티 하나 내지 않고 자신을 진정시켜 주는 유준의 목소리가 이번에도 사영의 마음을 차분하게 달래 주었다.
사영은 유준의 옷깃을 꼭 쥔 채로 깊게 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이런 곳에서 나누기에 적절한 대화는 아니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억지로 내리누르며 사영이 대답했다.
“…아니,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냥 잠깐 어지러웠을 뿐이에요.”
“정말 괜찮겠어요? 아니면 내가… 같이 갈까?”
이어진 유준의 말에 사영이 유준의 품에서 살짝 몸을 떨어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사영을 쳐다보는 유준의 눈동자는 조심스러운 염려로 가득 차 있었다.
사영은 그 눈동자에 어린 감정을 잠시 만끽하다가 이내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오늘은 그냥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응. 그래요. 내 말대로 가서 푹 쉬고….”
선의를 거절하는 데도 유준은 서운하거나 아쉬워하는 기색이 하나 없었다. 오히려 유준은 옆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우종을 불렀다.
“우종아.”
“네? 아, 네!”
“조심해서 가고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바로 연락해. 알겠지?”
“네, 그럴게요.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세요.”
우종은 깍듯하게 허리까지 살짝 굽히며 대답했다.
유준이 둘 사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전에 우종은 사영에게 미리 유준과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진심이 아니라, 서로 원하는 바가 있어 잠시 그렇게 하기로 한 거라고 솔직하게 말해 주던 사영의 태도에 우종은 진심으로 감동했다.
외부에 알려지면 사영에게 극히 불리할 비밀을 솔직하게 털어놓다니 이보다 더 큰 신의의 증거가 어디 있겠냐는 말이다.
덕분에 유준이 현재는 완전히 사영의 편이라는 걸 알게 된 우종은 그의 부탁이 전처럼 의심스럽다거나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럼 형 몸이 안 좋은 거 같으니까 먼저 얼른 갈게요.”
“응. 그래. 운전 조심하고.”
유준은 내키지 않는 손길로 우종에게 사영을 조심스럽게 넘겨주며 아쉬움을 꾹 참고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제 차에 태우고 같이 올라가 혹시나 몸살을 앓을지도 모를 사영을 밤새 지키고 싶었지만 안 그래도 피곤한 사영을 굳이 더 불편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속도를 잘 조절해야 했다. 밀어붙일 때와 떨어져 시간을 줄 때를 구분할 줄 아는 게 중요했다. 어제 막다른 골목으로 사영을 내몰았으니 오늘은 조금 숨 쉴 시간을 주어야 했다.
“사영아.”
그렇게 유준과 사영이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고 돌아가려는 차에 그들 사이로 끼어든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소리가 난 곳을 쳐다보는 모두의 눈빛에 경계심이 어렸다. 어딘지 모르게 서글퍼 보이는 표정으로 다가오는 이는 다름 아닌 한재우였다.
사영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더는 예전처럼 한재우가 두렵지도, 어렵지도 않았지만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고 피곤했다. 지금은 그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물러선 사영의 앞을 유준이 가로막고 섰다. 사영이 원치 않으면 누구도 자신을 지나칠 수 없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분명해 보이는 유준의 등에 사영은 안도했다.
그 등이 든든했고 믿음직스러웠다. 어디서나 늘 홀로 눈치를 보고 긴장해야 했던 사영으로서는 사랑보다도 더 생경한 감정이었다.
“뭐야.”
어차피 주변에는 매니저들 말고 더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유준은 어떤 눈치도 보지 않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영아, 잠깐 나 좀 봐.”
그러나 재우는 유준에게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화를 내거나 자존심 상한 표정을 짓기는커녕 아예 유준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눈앞에 오로지 한 사람만 존재하는 것처럼 유준의 너머로 시선을 고정한 재우가 연달아 말을 이었다.
“할 말이 있어. 잠깐이면 돼.”
“너 지금 뭐 하냐?”
그 목소리가 얼마나 애절한지. 결국 그 가증스러움을 참지 못한 유준이 다시 한번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재우는 유준을 무시했다.
“사영아.”
“이게 미쳤….”
“유준 씨.”
결국 유준의 입에서 욕이 막 튀어나오려던 순간, 사영이 조용히 유준의 이름을 불렀다. 그와 동시에 유준은 제 등줄기를 타고 엄청난 전율이 오르는 걸 느꼈다.
뒤에 서 있던 사영이 먼저 유준의 손을 가만히 잡아 왔기 때문이다. 유준은 벌어진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려 사영을 쳐다보았다. 손안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각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한재우 앞에서 대단한 사이인 척 연기한 게 처음도 아니건만 오늘은 무엇이 달라 이다지도 심장이 날뛰는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혼자만의 기분 탓인지도 모른다. 사영에게 진심을 털어놓은 일에 취해 멋대로 상황을 곡해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유준에게 이 순간은 분명 특별했다. 마치 힘을 얻길 원하는 것처럼 제 손을 힘주어 잡는 사영의 손길에는 분명 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유준은 그걸 사영의 진심이라고 믿고 싶었다.
사영은 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유준의 눈동자를 잠시 마주 보다가 이번에는 손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의 팔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유준이 진정하길 바라는 몸짓이었다.
그 손길에 따라 낮게 숨을 내쉬는 유준을 보며 사영은 어느새 지나치게 뻔뻔해진 제 모습을 속으로 조금 자조했다. 조금 전 유준에게 어째서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물었던 게 부끄러웠다.
어디까지나 연기의 일종이라고. 한재우에게 복수하기 위한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런 핑계로 남을 속일 수는 있을지언정 자신의 마음마저 속일 수는 없었다. 뒤늦게 온갖 이유를 가져다 붙여보아도 유준의 손을 잡는 순간에는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을 뿐이었다.
사영은 다시금 혼란스러워지는 감정을 애써 갈무리했다. 지금은 우선 한재우를 정리하는 게 먼저였다.
비록 근처에 다른 사람은 없었지만 여기는 얼마든지 눈에 띌 수 있는 장소였다. 이런 곳에서 굳이 복잡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을뿐더러 소란의 주인공이 유준이 되는 것도 싫었다.
유준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저은 사영은 옆으로 한 걸음 나서 재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가 아직도 할 말이 남았던가요?”
그 말을 함과 동시에 사영은 제 손을 더욱 힘주어 잡는 유준을 느꼈다. 우습게도 사영은 그 압박감에서 힘을 얻었다.
“잠깐만. 내가… 내가 정말로 해야 할 말이 있어, 사영아.”
“나는 더 이상 한재우 씨에게 들어야 할 말도, 듣고 싶은 말도 없어요.”
“사영아.”
“정말로 꼭 필요한 말이 있으면 매니저를 통해 전해 주세요. 한재우 씨… 그런 거 잘하잖아요.”
분명 말을 시작할 때는 유준의 힘을 느끼고 있었는데, 어느새 사영이 더 힘을 주어 손을 잡고 덜덜 떨고 있었다.
제발 내 말을 들어달라고. 마음을 터놓고 나와 이야기를 나누어달라고. 제발. 제발 한 번만 내 진심을 제대로 알아 달라고.
그렇게 수없이 매달리고 거절당하기를 반복하던 나날들이 바람처럼 사영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이제는 과거라고 해도 좋을, 그런 날들이었다.
적막이 흘렀다. 사영의 비꼼에 놀란 건지 재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사영을 보고만 있었다.
하기야, 사영 스스로도 자신이 이렇게 비꼬는 말을 잘할 수 있는지 모르고 살았으니 재우가 놀라는 것도 당연하단 생각이 들었다.
한재우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윤사영은 세상에서 가장 순종적인 멍청이였을 테니 말이다.
“…그래. 마지막 촬영하느라 오늘은 많이 피곤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순간 흘러나온 한재우의 대답에 사영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한재우는 윤사영이 제게 기어오르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재우의 대답에서는 분노는커녕 사영을 향한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재우의 목소리에서는 오로지 지극한 애처로움, 그 하나만이 절절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사영은 한재우가 연기하는 다정함이 어떤지 알았다.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사영에게 건네던 거짓된 배려와 애정, 온기는 영혼에 새겨질 만큼 질리도록 겪었고 절대로 못 알아챌 리가 없었다.
그런 한재우가 갑자기 보여 주는 낯선 모습이 당황스러웠다. 재우가 기운 하나 없는 순순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럼 얼른 가서 쉬어…. 나중에 연락할게.”
그 순간 사영이 가장 강하게 느낀 감정은 놀랍게도 귀찮음이었다. 당황도, 분노도, 통쾌함도 그 무엇도 귀찮다는 생각을 이기지 못했다.
한재우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어떤 목소리로 말하든 이 자리에서 그와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지겨웠다. 그토록 오랫동안 오로지 한재우만 바라보던 삶을 살았는데 말이다.
사영은 그 자리에서 재우의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질 수도 있었고, 당황해 머릿속이 복잡한 얼굴을 할 수도 있었으며, 보란 듯이 한 마디 더 비꼬아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의 삶에 있어 더 이상 한재우는 중요한 의미가 되지 못한다는 것처럼.
재우의 어떤 말보다 그 사실이 사영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현기증이 일어 몸이 무겁고 머리가 멍한데 갑작스럽게 마주한 상황에 도무지 생각이 정리되질 않았다.
“이제 와 둘이 나눌 얘기가 아직도 남았나?”
그런 사영을 대신해 다시 나선 건 유준이었다. 유준은 재우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몸을 완전히 돌려 사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만 가요, 우리는.”
사영은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움직였다. 유준의 부축을 받다시피 해서 차에 올라타는 동안 재우의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었지만 사영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한재우에게 복수하는 일은 마지막 목표가 아닌 새로운 삶을 사는 과정임을, 사영은 비로소 깨달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