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42화 (142/193)

#142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변 사람들도 덩달아 감정이 복받친 얼굴을 했다.

사영이 어떤 시선과 싸워가며 이 자리에 섰는지, 영화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두가 지켜보았다. 적어도 촬영장에서는 사영의 진심을 의심하는 사람이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수고했어요.”

유준 역시 누구보다 먹먹한 목소리로 사영에게 말을 건넸다. 사영의 얼굴을 바라본 유준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말간 얼굴로 간신히 눈물을 참고 있는 사영의 얼굴이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운 탓이었다.

추위에 발개진 코끝과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린 눈매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절로 애틋해지게 만들었다.

유준은 황급히 사영의 허리를 안고 끌어당겨 자신들을 찍고 있던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게 했다.

“……?”

“카메라를 향해서도 인사해야죠.”

“아….”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잠시 놀란 얼굴을 했던 사영이 상황을 깨닫고 카메라를 향해 웃으며 인사를 남겼다.

사영은 유준이 나중에 이 영상을 보게 될 관객, 혹은 팬들에게 인사하라는 뜻으로 주의를 끌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유준의 의도는 전혀 달랐다.

유준은 다만, 지금 사영이 얼마나 어여쁜지 그 모습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기길 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사영을 더 사랑해 주길 바랐고 그렇게 사랑에 빠진 이들이 사영의 편이 되어 주길 원했다.

하지만 유준조차 모르는 게 있었다. 카메라에는 그런 사영을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 보듯 바라보는 유준의 얼굴 역시 고스란히 담기고 있었다.

누구라도 모를 수가 없었다. 이 순간 유준의 표정을, 눈빛을, 그 얼굴이 가진 총천연색의 감정을 본다면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김유준은 윤사영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감정을 증명하는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유준은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사영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

“한재우 씨 왔어요?”

들뜬 분위기 속에서 먼저 재우를 발견하고 말을 건넨 건 유준이었다. 재우는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감독과 배우들이 몰려있는 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며칠 전에 먼저 마지막 촬영을 마친 재우는 지금껏 촬영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촬영분이 없으니 올 필요가 없기는 했다. 그러나 만약 모든 게 재우의 의도대로 흘러갔다면 그는 아마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계속 촬영장에 찾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촬영에 들어갈 때부터 이미 어딘지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모습을 하고 있던 재우는 그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오늘이 되어서야 나타난 것이다.

“안녕하세요, 김유준 씨.”

유준이 뭔지 모를 위화감을 느낀 건 다가온 재우가 주눅 든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왔을 때였다. 그를 부를 때만 하더라도 제대로 속을 뒤집어 놓을 생각이었는데 재우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유준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대로 지나친 재우의 시선은 한 걸음 물러나 있는 사영을 향해있었다.

유준이 반사적으로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 재우가 사영을 향해 말했다.

“촬영 무사히 마친 거 축하해, 사영아. 수고했어.”

그 목소리에 당황한 건 유준뿐만이 아니었다. 재우가 다가오는 걸 보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사영 역시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입을 벙긋거렸다.

재우가 내뱉은 문장 그 자체보다는 목소리가 문제였다. 다른 사람들 앞인 걸 감안하더라도 재우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절절하고 감성적인 면이 있었다.

다정함이 아니라 애틋함이었다. 마치 지독한 후회를 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한재우 씨도 수고하셨어요.”

사영 역시 같은 걸 느꼈는지 미미하게 경계심이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준은 사영의 목소리에 어린 경계의 감정에 적잖이 안도했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저렇게 불쌍한 척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지금 이 자리에서 신경 쓰고 싶진 않았다.

유준이 굳이 재우를 부른 것은 사영과 자신의 관계를 과시하려는 이유뿐만이 아니라 그를 철저히 주변인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굳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워 한재우를 이 자리의 주연으로 끼워 줄 필요는 없었다.

서로 간의 인사가 끝나자 유준은 더 이상 재우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등을 돌려 사영의 허리를 감싸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주변에 있던 스태프 중 몇몇이 한재우의 눈치를 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유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사영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로 잘했어요.”

“아….”

“진짜로 좋은 작품이 나올 거예요.”

좋은 작품. 그 단어를 듣자마자 사영은 방금 재우를 보고 느꼈던 당황스러움 따위는 전부 다 잊어버리고 기대에 가득 찬 얼굴을 했다.

머지않아 자신이 새롭게 시작한 연기를, 스스로 해석하고 연기한 캐릭터를, 그 캐릭터가 존재하는 세계를 담은 작품을 사람들 앞에 보여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죄어오는 기분이었다.

뭐라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사영의 눈동자가 별빛처럼 반짝였다.

순식간에 둘이 만들어 내는 친밀한 기운 밖으로 밀려난 한재우는 그저 말없이 사영의 얼굴을 쳐다봤다.

윤사영은 진심으로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현장의 소란스러운 분위기는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막판에 이어진 강행군에 다들 체력적으로 매우 지쳐있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뒤풀이는 따로 날을 잡아 진행할 예정이었던지라 배우들은 곧바로 촬영장을 떠나 돌아갈 수 있었다.

유준과 사영은 촬영장에 꽤 오래 남아 말단 스태프에게까지 꼼꼼히 인사를 건넨 뒤 나란히 매니저가 차를 대기시킨 곳까지 걸어 나왔다.

“사영 씨, 괜찮아요?”

유준이 사영의 손을 슬쩍 잡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넨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네…?”

“좀 멍해 보여서.”

유준의 엄지손가락이 사영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사영은 ‘아…’하고 짧은 탄성을 흘리며 유준을 바라보았다.

어젯밤의 고백 이후 사영은 유준에게 아직 이렇다 할 대답을 들려주지 못했다. 유준 역시 사영에게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오늘 하루 동안 사영은 사적인 일을 머릿속에 들여놓지 않기 위해 애썼다.

당장 중요한 건 마지막 촬영을 무사히 마무리하는 일이었다. 개인적인 고민으로 집중력을 흐트러트리고 싶진 않았다.

유준은 촬영장에서 사영을 마주쳤을 때 평소처럼 편하고 자연스럽게 대해 주었다. 그는 마치 어젯밤의 고백 같은 건 없었던 일처럼 굴었다.

사영은 유준에게 깊은 고마움을 느꼈다. 그가 마지막까지 연기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어 주어서 사영 역시 집중력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나란히 걷던 두 사람은 어느새 대기하고 있던 각자의 차 앞에 다다랐다. 걸음을 멈춰 선 유준은 사영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쥐고 자신을 쳐다보도록 한 뒤 입을 열었다.

“바로 집으로 갈 거죠?”

“네….”

“가자마자 아무 생각하지 말고 따뜻하게 하고 푹 자요. 고민도 하지 말고, 걱정도 하지 말고.”

사영은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유준의 말을 듣기만 했다. 지금 가장 사영의 대답이 궁금할 사람이 아무런 고민도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게 현실감이 없었다.

“오랜만에 온 정신을 쏟아서 연기를 했으니 긴장이 풀리면 몸살 올지도 몰라요. 조금이라도 어디 안 좋은 거 같으면 바로 연락하고. 혹시 내가 불편하면….”

“…….”

“우종이한테라도 꼭 연락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사영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폭풍이 자신을 덮쳐오는 걸 느꼈다.

사영은 촬영이 끝나면 유준이 당연히 어제 일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세상만사 당당한 유준이라고 해도 타인에게 제 마음을 고백하는 게 쉬웠을 리 없다. 그런데 유준은 그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듯 돌아가야만 했다.

그래 놓고 지금 한다는 말이 몸을 잘 돌보란다. 혹시 어제의 고백 때문에 내가 불편하면 다른 사람에게라도 꼭 연락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사영은 문득 이 모든 게 너무나도 현실성이 없는 꿈처럼 느껴졌다.

죽었다 살아난 건 말할 것도 없고 한재우와 이혼한 것도, 연예계에 복귀해 그토록 사랑한 연기를 다시 시작한 것도, 그리고 김유준이라는 잘난 남자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도 전부 다 거짓말 같았다.

그 순간 사영은 땅 밑이 흔들리는 걸 느꼈다. 하늘이 일렁이며 흘러내렸다. 천지가 어지럽게 뒤바뀌어 어디가 위고 아래인지 구분하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었다. 유준의 말대로 마지막 촬영으로 인한 긴장이 풀린 데다가 유준 때문에 갑자기 격렬한 감정을 느끼니 몸이 버티지 못한 것이다.

“유, 윤사영…!”

유준은 갑자기 허물어지는 사영의 몸을 다급하게 받아 안았다.

“왜 그래, 윤사영. 어디… 어디 아파…?”

겁에 질린 듯 떨리는 유준의 목소리가 윙윙 귓가를 울렸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던 사람의 생경한 목소리가 어지러운 와중에도 심장을 파고들었다.

“왜….”

유준의 품으로 신음과 같은 사영의 목소리가 부서졌다. 유준은 그가 하는 말을 들으려 고개를 숙였다. 울먹임과 같은 목소리로 사영이 말했다.

“왜 이렇게까지 해요….”

“…….”

“나는… 무서운데….”

사영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를 끌어안은 유준의 두 팔에 힘이 들어갔다.

뱃속에서 화염이 솟구치며 전신으로 엄청난 열기가 퍼져 나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기가 통하는 것 같기도 했다.

고통스러운 사영의 목소리에서 치열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사영은 지금 김유준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 그에게 자꾸만 기우는 마음을 외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유준에게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무서워서, 더는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아서, 그깟 감정놀음에 삶 전부가 무너지는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해서.

그래서 사영은 필사적으로 유준의 감정을, 그리고 그 자신의 감정을 피하고 있었다. 유준은 그걸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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