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복수하는 회귀자를 사랑하는 법-141화 (141/193)

#141

샤워를 마치고 나온 사영은 완전히 녹초가 된 기분으로 침대에 털썩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지쳤는데 쉬이 잠들지는 못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머릿속에는 오늘 유준과 있었던 일이 계속 반복되어 영사되고 있었다.

유준에게 자자고 말한 건 단순히 유준을 상처 입히거나 그에게 실망감을 주기 위한 수단만은 아니었다. 사영은 그것을 통해 자신이 느끼는 혼란스러운 감정 역시 함께 정리하길 원했다.

말로는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유준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걸 스스로 부정할 순 없었다.

유준의 말대로 단순한 동료애라든가, 은인을 향한 고마움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게 아님을 사영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영은 제가 가진 미혹을 떨치고 싶었다. 페로몬을 흘리며 짐승처럼 그에게 안기고 나서 복잡해 보였던 감정이 실은 육체적 끌림에 지나지 않는 거였다고 정리하길 바랐다.

오직 그 하나를 위해 익숙하지도 않은 뻔뻔한 짓까지 해 가며 유준에게 들러붙었던 건데.

“후….”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런데도 결국 원하는 바를 하나도 이루지 못했으니 마음이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잠자리를 가지고 감정을 정리하긴커녕 유준의 고백 때문에 오히려 짐을 하나 더 얻은 셈이다.

이런 상황을 피하려고 그간 필사적으로 모른 척을 해왔던 건데. 막연히 의심만 했던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나자 막다른 골목에 몰린 기분이었다.

결국 사영은 그의 질문에 아무것도 대답하지 못한 채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다는 말로 야멸차게 굴 수밖에 없었다.

유준은 그런 사영의 반응에도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그럼 잘 생각해 보라는 말과 함께 당황해 얼어있는 사영의 입술에 쪽, 하고 입맞춤까지 남기고 나갔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홀로 남은 사영은 유준의 향에 취해 혀를 섞은 터라 제 몸에 남은 흥분을 혼자 풀기까지 해야만 했다.

그것도 기껏해야 앞쪽뿐이었다. 수음을 하면서도 젖은 뒤를 차마 어쩌지 못해 달아오른 몸이 진정될 때까지 샤워기 물을 한참이나 맞고 있어야 했다.

“괜찮으려나….”

거기까지 기억을 더듬자 불현듯 유준이 걱정되었다. 저 못지않게 흥분한 유준 역시 진정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 탓이다.

“…지금 그 걱정 할 때냐.”

그러다가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원치 않은 고백을 받아 놓고 기껏 한다는 생각이 이 모양이라니. 제 마음이지만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분명 원치 않은 상황이었다. 원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피하고 싶었다.

어찌 보면 노골적이라고 할 수도 있었던 유준의 표현을 보면서도 왜 여태 모른 척, 아닌 척을 해 왔겠냐는 말이다.

이제 와 사랑이라니. 그렇게 비참하게 당해 놓고. 그 모진 고통의 길의 끝에 가까스로 여기에 다다라 놓고 다시 사랑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

하지만 정작 허공을 바라보는 사영의 눈동자에 어린 감정은 마음만큼 단호하지 못했다.

매몰차게 끊어 내려고 하면 제 편이라고는 아무도 없던 순간부터 오로지 사영의 말 하나만을 믿고 함께해 준 유준이 떠올랐다.

보답할 능력조차 없는 인간을 전적으로 도와준다는 건 절대로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사영이 짠 복수의 계획이라는 것도 실은 허접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도 유준은 내도록 사영을 돕고 지지하고 더 나은 길을 제안하며 여기까지 이끌어 주었다. 그런 상대에게 가지는 마음이 어찌 무겁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이제 명확하게 내 마음을 표현했어요. 윤사영 씨의 의문에도 전부 답을 해 줬죠. 그러니까 이제는 윤사영 씨 차례에요.’

‘윤사영 씨한테 나는… 도대체 뭡니까?’

더는 물러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마주한 유준의 마지막 질문이 연신 머릿속을 헤집었다. 사영은 그 질문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해답을 찾고 싶지 않았다.

고민 끝에 다다른 답이 결코 제 마음에 들지 않으리라는 걸 예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 서로에게 가진 마음이 진심이라고 한들 그것이 얼마나 오래도록 이어지는가는 또 다른 문제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진심을 다한 사랑을 다시 한번 잃는다면 사영은 그때 받을 상처와 고통을 다시 참아 낼 자신이 없었다. 삶에 있어 그토록 엄청난 절망은 한 번으로 족했다.

사영은 두 번 다시 그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그것만이 사영이 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

유준은 요즘 사춘기 소년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했다. 그래서 웬만한 감정 기복에는 정민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뒷좌석에 앉은 유준이 급기야 콧노래를 흥얼거리자 이번만큼은 정민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요? 뭐 좋은 일 있어요?”

“좋은 일? 무슨 좋은 일?”

“아니, 아까부터 콧노래를 다 부르길래.”

“내가?”

“네, 형이요.”

정작 유준은 제가 그러고 있다는 것도 몰랐던 모양이다.

“몰라, 그런 적 없어.”

그뿐만 아니다. 이번에는 아예 그런 적이 없다고 대뜸 발뺌을 한다. 정민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유준을 쳐다보았다.

언제 콧노래를 불렀냐는 듯 짐짓 굳은 표정을 가장한 유준이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입가에 어린 미미한 미소가 보인다는 건 모르는 모양이다.

윤사영과의 관계에 진전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막연히 이유를 상상해보며 정민은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요즘 유준은 언제 사랑에 관심이 없었냐는 듯 연기할 때를 제외하곤 오로지 윤사영에게만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

천하의 김유준이 설마 차이지는 않겠지, 싶다가도 첫사랑이라면 첫사랑일 텐데 이러다 호되게 맘고생 하는 건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되기도 했다.

다만 그렇다고 정민이 그의 연애사에 이러쿵저러쿵 훈수 둘 입장도 아니라 그냥 어련히 잘하겠거니 하며 지켜볼 뿐이었다.

그리고 정민의 예상대로 유준은 지금 기분이 아주 좋은 상태였다. 당연히 이유는 윤사영 때문이다.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창밖을 바라보는 유준의 입술 사이로 다시 기분 좋은 허밍이 흘러나왔다. 어젯밤부터 유준은 내도록 이런 상태였다.

어제 일을 단순하게 보자면 고백해놓고 제대로 답도 듣지 못한 채 쫓겨난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유준에게 중요한 건 사영의 대답이 아니라 그의 눈빛이 담긴 감정이었다. 떨리는 호흡과 매몰차지 못한 그의 목소리였다.

사영이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자신을 거부할 거라는 건 사랑을 깨닫는 순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감정 따윈 버리고 몸을 섞자며 과격하게 나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만약 사영이 정말로 유준에게 일말의 감정도 없었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우리는 그저 계약 관계일 뿐이며, 도움을 주는 것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고 있지만 그뿐이라고 말했어야 했다.

당신과 내가 사랑을 바탕으로 한 연인 관계로 발전한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고, 당신의 마음은 정중히 거절하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사영은 이러한 마음을 밝히는 대신 도망치는 걸 택했다. 유준에게는 그게 곧 희망의 불씨였고 사영의 진심을 엿볼 수 있는 작은 틈이었다.

그러니 유준이 어떻게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있을까.

유준의 입가에는 어느새 완연한 미소가 어렸다. 윤사영이 보고 싶었다.

***

“…오케이! 자, 다들 고생했어요.”

“수고하셨습니다!”

한참을 신중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보던 감독의 입에서 마침내 오케이 사인이 나왔다. 그와 동시에 숨을 죽이고 있던 촬영장에 단숨에 소란스러워졌다.

방금 끝난 신이 영화 <하지>의 마지막 촬영이었다. 베테랑 감독과 스태프, 능숙한 연기자들 덕분에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촬영이 끝났다.

마치 축제처럼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오는 현장을 카메라가 부지런히 담았다. 가장 먼저 단독으로 화면에 잡힌 건 당연히 작품의 주인공인 유준이었다.

수많은 역경과 시련을 딛고 마침내 왕의 자리에 오른 강무준을 연기한 유준은 곤룡포를 입고 왕의 위엄을 마음껏 뽐내는 중이었다.

가장 먼저 정명철 감독과 인사를 나누던 유준은 제게 다가온 카메라를 보고 손을 흔들며 상냥하게 인사했다. 얼굴 가득 담긴 환한 미소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처음 유준의 캐스팅 소식이 알려졌을 때 대다수는 기대감을 보였지만 과연 유준이 사극 연기도 잘 소화할 수 있을까 의심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성공시켜왔다 하더라도 현대극만 줄곧 해온 유준이 사극에서는 그가 가진 연기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감독을 비롯해 가까운 곳에서 유준의 연기를 지켜본 이들은 머지않아 그들이 얼마나 헛된 걱정을 했는지 깨닫게 될 거라 확신했다.

유준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으로서 극을 지배했고 놀라운 연기를 보여 주었다.

정명철 감독은 이 작품이 자신에게도, 그리고 유준에게도 또 한 번의 전환점이 되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영 씨, 이리 와요.”

그때, 여전히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앞에 두고 유준이 한 발자국 떨어져 조용히 인사를 나누고 있던 사영을 크게 불렀다.

감독 역시 얼굴 가득 넉넉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사영을 맞이했다. 먼저 사영을 향해 입을 연 건 감독이었다.

“우리 윤 배우, 여러모로 마음고생도 많았을 텐데 고생했어요.”

“감독님이 제일 고생하셨죠. 별 볼 일 없던 저를 믿고 이렇게 좋은 역을 맡겨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진짜 내가 그때 윤 배우 캐스팅 안 했으면 어땠을지 지금도 자다가 그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요.”

“정말 저는… 정말…. …모든 분께 전부 다 정말 감사드려요.”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표정으로 몇 번 말을 고르던 사영은 곧 입을 다물고 감정을 억누른 후 감사하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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