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한재우의 폭력 탓에 오랫동안 잊고 있던 쾌감을 향한 욕망이 순식간에 사영을 집어삼켰다.
유준의 살결에 코를 묻고 그 향을 폐부 가득 들이마시고 싶었다. 그의 아래서 다리를 벌리고 온통 그의 페로몬에 절어 밤새도록 울고 싶었다.
오메가로서의 본능 따위는 영영 되찾을 수 없을 거라고 여겼는데 유준의 향은 남아 있는지도 몰랐던 사영의 성욕을 적나라하게 끌어냈다.
그것이 단순히 알파에 의한 오메가의 신체적 반응에 불과한지, 아니면 상대가 김유준이라는 사실의 영향을 받는 건지. 사영은 굳이 그런 걸 생각하진 않았다.
사영은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싶었다.
“유준 씨…?”
하지만 금방 다시 입술을 겹쳐 올 거라 여겼던 유준은 사영이 숨을 다 고를 때가 되어서도 다시 다가오지 않았다.
그제야 무언가 잘못됐단 걸 느낀 사영이 유준을 부르며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유준의 눈동자는 여전히 깊고 어두웠지만 그는 어느새 사영을 집요하게 자극하던 페로몬까지 거둬들인 상태였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흔들리는 사영의 눈동자를 쳐다보며 유준이 말했다.
“윤사영 씨.”
“네….”
“이렇게 한번 자고 나면 우리 사이가 좀 단순해질 것 같아요?”
이어진 유준의 말은 그야말로 정곡을 찔렀다.
한껏 당황해 흔들리는 사영의 눈동자를 마주 보며 유준은 피식,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추측이 제대로 맞아 들어간 모양이지만 만족스럽거나 뿌듯하진 않았다.
처음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유준은 이미 몇 번이나 사영의 페로몬 앞에서 자신을 절제했고 이미 한계였다.
그런 상황에서 사영이 이토록 명백한 의도를 드러내며 다가오는데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 유준은 또다시 사영을 떨쳐 내야만 했다. 모르는 척 욕망이 이끄는 대로 그를 품을 수가 없었다.
사랑 같은 건 믿지 않는다고, 방어적으로 경고까지 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멍한 표정으로 저를 보는 윤사영의 사랑스럽고도 야속한 얼굴을 마주하며 유준은 말을 이었다.
“자고 나서 그냥 내가 잘난 알파라 육체적으로 끌린 것뿐이라고 확답을 내리면, 그러면 내가 상처받고 멀어지기라도 할 것 같았어? 진심을 모욕당한 것처럼 눈물 뚝뚝 흘리면서?”
“…….”
“그랬다면 정말… 윤사영 씨, 나를 너무 순진하게 보는 거 아닙니까?”
그 말을 하며 유준은 언제 자조했냐는 듯 예의 그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웃었다.
상처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확신을 가지고 묻긴 했지만 한편으로 유준은 사영이 제 추측을 부정해 주길 바랐다.
그런 게 아니라고. 유준 씨에게 나도 모르게 마음이 끌렸고, 그래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었던 거라고. 가능성 없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말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지금 사영의 표정과 눈빛은 유준이 정확히 그의 본심을 맞췄음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 한 줌의 서러움도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발언 그대로, 고작 이 정도로 질질 짜며 눈물을 흩뿌리고 이 자리를 벗어날 만큼 그는 어리지 않았다.
애초에 윤사영을 향한 마음을 인정할 때 어느 정도는 예상했다.
더는 사랑을 믿지도, 원하지도 않는다는 사영이 어떤 방식으로든 제 마음을 아프게 하리라는 걸 유준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준은 사영의 냉정함에 아프고 서러워하는 대신 지금을 기회로 삼기로 했다.
“이렇게까지 하는 거 보니까 내 감정이 뭔지 상관없다는 말도 거짓말인가 보네.”
“…….”
“사실은 알고 있는 거죠? 내가 무슨 감정으로 윤사영 씨를 보고 있는지. 왜 이렇게까지 윤사영 씨를 돕고, 계약 연애까지 들먹이면서 구질구질하게 구는지 알고 그러는 거잖아, 지금.”
“실수였든 뭐였든 제가 여러 번 유준 씨 앞에서 페로몬을 흘리며 유준 씨를 자극했잖아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유준 씨는 그것 때문에 그냥 나한테….”
“아니요. 난 아니에요.”
유준은 필사적으로 이어지는 사영의 설명을 막았다. 어차피 하나도 맞는 말이 없을 텐데 굳이 그 억지를 다 들어 줄 필요는 없었다.
“윤사영 씨는 내 잘난 외형이나 매혹적인 향에 홀려서 내 몸만 원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난 아니라고.”
“유준 씨.”
“말해 줄게요. 내가 왜 그날 윤사영 씨한테 키스했는지. 왜 추잡한 소문에 내 이름이 섞이는 걸 꺼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영 씨를 돕고 있는지. 왜, 가짜 연애 놀음에 이렇게까지 진심인 건지. 사영 씨가 궁금해하던 거 다 말해 줄게요.”
“아니요. 저는 듣고 싶지 않아요.”
사영은 발작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유준에게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유준의 팔이 사영의 허리를 안고 있었으므로 그 시도는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유준은 멈추지 않고 말했다.
“나는 윤사영 씨랑 자고 싶은 게 아니고, 단순히 동정이나 연민으로 도와주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만. 유준 씨, 제발.”
“나는 진심으로, 윤사영 씨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겁니다.”
사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마치 엄청난 고통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보아도 사랑 고백을 받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반응조차 유준을 주눅 들게 만들 수는 없었다. 유준은 다만 그가 안타까웠다. 사랑이 이토록 끔찍해진 그의 삶이 애달플 뿐이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고, 그 다음에는 동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내가 윤사영 씨를 돕고 싶은 건 윤사영 씨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윤사영 씨와 자게 된다면 그 또한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겠죠.”
사영은 숨을 헐떡였다. 유준이 쏟아 내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유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윤사영의 세계는 언젠가 한 번쯤은 깨져야만 했다. 한재우가 만들어 낸 삭막한 세계에 언제까지고 그를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사랑합니다, 윤사영 씨. 나는 이제 내 마음을 확신해요.”
연이어 제게로 쏟아지는 절절한 고백에, 사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그 사랑을 믿지 않아요.”
꼭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사영은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
“유준 씨의 마음이 진심이라고 해도… 달라질 건 없어요. 저는… 저는 사랑을 믿지도, 원하지도 않아요. 다시는 그런 거… 안 할 거예요. 하기 싫어요.”
사영에게 사랑은 기만이거나 고통, 둘 중 하나였다. 어떤 사랑은 타인을 이용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어떤 사랑은 자기 삶을 망치고 진창에 처박는 원인이었다. 그게 사영이 아는 사랑의 전부였다.
그래서 사영은 어떤 사랑도 싫었다. 겨우 얻은 두 번째 삶에서까지 그런 걸 겪고 싶진 않았다.
그 말을 뱉으며 사영은 이번에야말로 유준이 제게 실망할 거라 생각했지만 유준은 예상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래요?”
지극히 가벼운 태도로 어깨를 한번 으쓱한 유준은 천진한 얼굴로 되물을 뿐이었다. 다급해진 사영이 말을 덧붙였다.
“저는 유준 씨 마음을 받아 줄 생각이 없어요. 저는 그냥… 그냥 제 복수를 위해 유준 씨를 이용했을 뿐이고 그게 다예요. 유준 씨도… 유준 씨도 시간이 지나면 지금 내게 고백한 걸 후회하게 될 거예요.”
“뭐,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사영은 정말로 절박한데. 자신은 물론이고 유준이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자신 때문에 괜한 시간을 낭비할까 초조해 죽겠는데. 정작 김유준은 사영의 말을 듣고도 태연하기만 했다.
“내가 궁금한 건.”
이어진 유준의 말에 사영이 어깨를 움츠렸다. 유준의 여유로움이 자신을 궁지로 몰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윤사영 씨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 이겁니다.”
“그게 뭐… 무슨….”
“윤사영 씨가 사랑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알겠으니까, 그래서 나는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
“그냥 꼴릴 때 자고 싶은 상대? 도움을 준 은인? 그것도 아니면 재수 없는 동료 배우?”
사영은 입을 뻐끔거렸다. 유준이 말한 그 무엇도 사영이 가진 유준에 대한 감정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사영이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이제 명확하게 내 마음을 표현했어요. 윤사영 씨의 의문에도 전부 답을 해 줬죠. 그러니까 이제는 윤사영 씨 차례에요.”
말을 하면 할수록 생각이 명료해지고 목표가 명확해졌다. 지금 당장 유준의 목적은 그것뿐이었다.
사영이 그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그게 무엇이든 제 안에 있는 진심을 살펴보고 깨닫는 것.
그 결과가 유준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그렇다면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다.
중요한 건, 사영에게 당신이 원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사랑하는 사이가 될 수 있다는 걸 알려 주는 거였다. 이미 윤사영에게 김유준은 별것 아닌 존재가 아니라는 걸 일깨워 주는 것이다.
“윤사영 씨한테 나는… 도대체 뭡니까?”
마지막 질문을 할 때 유준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유준은 사영이 정말로 제게 아무런 감정이 없지는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간 사영을 가까운 곳에서 마주하며 얻은 확신이었다.
사영은 분명 그의 삶을 통틀어서 얻은 그 어떠한 사람보다 자신을 의지했다. 김유준으로 인해 사영이 여기까지 달라졌다는 건 그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사랑은 아닐지라도 김유준은 윤사영의 두 번째 삶에 가장 특별한 사람이고, 그건 사영이 가진 감정 중 가장 사랑에 가까운 형태일 것이다.
유준은 그렇게 확신했다.